#104
산맥 탈출 (2)
한껏 부풀어 오른 근육과 꿈틀거리는 핏줄.
쿠웅!
굵은 통나무 같은 다리가 힘차게 바닥을 찍고, 그 주인의 커다란 몸을 공중으로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솟구치는 그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아지랑이와 함께, 곳곳에 새겨진 「칼코스식 전투 각인」이 신비롭게 발광했다.
그리고.
쉬아악— 푸확!
「생체 오러」의 붉게 일렁거리는 빛에 휩싸인 도끼날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키가 4미터에 달하는 괴물의 머리를 몸통과 분리해 버렸다.
“카하하핫—! 덩치가 크다 보니 써는 맛이 있구나!”
뿜어져 나오는 트롤의 피로 피투성이가 된 채 광소하는 할리.
하지만 그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머리를 베어낸 직후 곧바로 트롤의 가슴팍에 도끼를 내려찍어 갈비뼈를 박살 내고, 그 틈으로 한 손을 쑤셔 넣어 마석을 뽑아냈다.
마무리로 놈의 커다란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오며 바닥에 착지—.
콰직!
···함과 동시에 바닥에 널브러진 커다란 머리통을 도끼로 두 쪽을 내놓았다.
쿠웅—!
머리와 심장이 파괴되었음에도 한참을 허우적거리던 트롤의 몸통은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 그래도 재생력이 강한 트롤이 광기까지 감염되니까 생명력이 괴악할 정도네.’
할리는 손에 들린 트롤의 마석을 으적으적 씹어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대 몬스터 사냥에 익숙한데다 압도적인 육체 능력까지 갖춘 그였기에 이렇게 쉽게 상대한 거지, 다른 이들이었으면 훨씬 고전해야 했을 것이다.
지금 트롤 무리와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숨을 몰아쉬는 저들처럼.
“후우우···.”
“허억, 헉··· 젠장. 이런 곳에 트롤이라니. 산맥을 벗어나는 중인데, 어떻게 전보다 더 깊은 곳에 들어온 것 같군.”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이 남하를 시작하자, 깊은 곳에 서식하던 놈들도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는 상황이었으니.
이미 최외곽에 머물던 몬스터와 인간들 사이에서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이동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안 좋아 질 거다.”
간간히 등장하기 시작한 상위 몬스터들에게는 기척을 죽이는 마도구의 효과도 그리 크지 않았다.
놈들이 원래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건만, 광기로 인해 강해진 본능으로 감지력까지 증폭된 것이다.
일행도 결코 약한 이들이 아니었으나 지금 상황은 소수의 파티로 뭘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었다.
며칠간 계속된 싸움은 그들의 피로를 가중시켰고, 신중히 상대해야 하는 상위 몬스터들도 심심하면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니···.
“제일 많이 움직인 할리 혼자만 쌩쌩한 거 봐. 그 비전 주술이라는 거 덕분인가? 부럽다 부러워···.”
“그래도 그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거기다 이제 하루만 강행군하면 산맥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힘내자.”
길잡이 마커스가 희망적인 말을 늘어놓으며, 다시 선두에서 지친 일행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예상보다 더욱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그간 할리는 북부 산맥을 헤매면서 광기에 물든 몬스터들의 행동 양식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다른 아바타들을 통해 얻는 정보에는 놈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해 쳐들어온다고 나와 있었지만, 그것은 일부만 맞는 말이었다.
놈들도 살아있는 생명체인 만큼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먹이가 필요했고, 몬스터들 사이의 먹이사슬 또한 그 생태계의 일부였다.
이 산맥에서 강한 몬스터가 약한 몬스터를 잡아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고.
‘약한 놈들이 눈이 뒤집어져서 앞뒤 가리지 않고 강자에게 달려드는 건, 이전보다 더할지도 모르지만.’
그 결과 강한 놈들이 역으로 사냥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같은 무리끼리도 뭔가 시비가 붙으면 곧바로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질 정도로, 놈들은 서로에게 극도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 놈이 다른 놈을 잡아먹게 되면, 살아남은 놈이 품은 광기의 농도가 그만큼 더 짙어진다.’
패배한 놈은 죽어서 식량이 되고 승리한 놈은 축적된 광기의 영향으로 전보다 더욱 강해진다.
이런 점만 해도 위협적이기 그지없는데···.
자기들끼리 먹고 먹히는 싸움을 벌이다가도, 인간을 비롯한 다른 지성체를 인지하는 순간.
놈들은 서로 언제 싸웠냐는 듯 힘을 합치고 그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
처음으로 나온 희생자는 드워프 자오닉과 함께 고립되었던 레인저 중 하나, 보르도였다.
부상을 입었던 동료 한스와는 달리 비교적 멀쩡했던 그는, 다른 이들이 몬스터를 처리할 동안 놈들의 시선을 끌며 견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큽!”
그만 몬스터들 사이에 끼어있던 홉고블린이 대롱으로 쏘아낸 독침에 저격당해버렸다.
“보르도!”
“안 돼!”
뒤늦게 그쪽으로 지원사격이 쏟아졌으나, 몬스터의 면전에서 순간적으로 전신이 마비된 보르도를 구하기엔 이미 늦은 뒤였다.
광기에 잠식되어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 오크가 급소에 화살이 잔뜩 박힌 채로 그를 덮친 것이다.
이후 생명이 다한 놈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독침을 쏘아냈던 홉고블린의 미간에도 볼트를 꽂아 넣었지만···.
이미 보르도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 후였다.
‘무기를 써? 그냥 휘두르는 게 아니라 바람총 같은걸?’
최전선에서 도끼를 휘두르며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찢어발기고 있던 할리가 그쪽을 흘깃 살피고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좀 더 조심했을 일행들이었지만, 지금까지 광기에 빠지고도 저런 무기를 사용하는 놈을 본 적이 없어서 방심했는지 대응이 늦어버렸다.
‘특별히 지능이 높은 개체였나? 아니면 광기의 침식을 덜 받은 상태였다거나?’
그 원인이 무엇이든 이걸로 일행의 부담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리라.
안 그래도 힘겨운 상황에 이제는 원거리 공격에 대한 견제도 함께 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실제로 그것 때문에 후방에서 이어지는 화력 지원이 줄어들었다.
아공간 마도구인 소형 화살통에서 쉴 새 없이 볼트를 꺼내 석궁으로 쏘아대던 미켈이 주변 경계를 맡으며, 한 발 한 발을 좀 더 신중하게 쏘게 된 것이다.
‘좋지 않아.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다. ···나만 빼고.’
아무리 그가 강하다지만, 혼자의 몸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물며 놈들은 징그러울 정도로 생명력이 강화된 몬스터들이 아닌가.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고, 임무 성공률 백 프로의 기록도 깨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 이참에 할리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해 보자.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그는 여전히 끊임없이 움직여 적을 참살하면서도 정신을 가다듬어 힘을 끌어올렸다.
「육체변이」로 안 그래도 컸던 그의 덩치가 조금씩 더 커졌으며, 그간 축적해왔던 에너지를 한꺼번에 태운 「생체 오러」가 거세게 이글거렸다.
「야성」이 날카롭게 벼려지며 주변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고, 「재생」은 몸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것에 이어 그의 몸 곳곳에 새겨진 「칼코스식 전투 각인」이 더욱 밝게 발광했다.
가슴의 ‘불꽃’과 눈가의 ‘번개폭풍’, 양 팔의 ‘맹수’와 ‘도끼’에 이어서 바지에 가려졌던 다리의 ‘달리는 말’과 ‘새의 날개’까지.
“후우우—.”
가볍게 내뱉는 숨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니, 그뿐 아니라 순식간에 연소되는 에너지 때문에 전신의 모공에서 열과 증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감각은 더없이 예리하고, 도끼를 휘두르는 손은 가볍기 그지없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할리는 그간 억눌러두기만 했던 ‘광기’를 조금씩 일깨웠다.
광기는 몸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의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절대 제대로 사용한다고 볼 수 없었다.
두근—
거칠게 뛰는 심장을 통해 무언가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근육은 물론 뼈와 장기, 그리고 뇌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고—.
-그래, 전부 찢어버리자! 앞을 막는 것들은 죄다! 크카카캇!
재차 활개 치기 시작하는 광기의 속삭임과 함께.
쉬이익—
한층 더 강화된 육체가 달궈진 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주변에 열기를 발산하고, 검은색이었던 오른쪽 눈은 붉게 물들어 불꽃 같은 안광이 타올랐다.
그렇게 할리가 광기를 온전히 일깨워 그것을 오롯이 제어하며 통제 아래에 둔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야성」이 특수스킬「광란의 야수」로 진화합니다.》
그는 광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크흐···크흐하후하학핫하—!”
몸속에서 활화산과 같은 기운이 폭발하며 저도 모르게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평소보다도 더 미친 것 같은 웃음이.
‘아··· 요즘 좀 잠잠해졌나 싶었더니.’
하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광기를 완전히 개방한 전투 상태를 해제하고 나면, 이 광증도 다시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터.
···아마도.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급박한 상황이었던 만큼, 힘을 끌어올리면서도 할리는 여전히 전장 한복판에 있는 상태였다.
그는 오른손을 등으로 뻗어 그동안 걸어두기만 했던 다른 도끼를 뽑아 들었다.
상황이 급해지며 한 손은 마석을 곧바로 적출하기 위해 비워두고 있었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한 이상 이제 이것도 쓸데가 있었다.
양손에 도끼를 쥔 할리는 그대로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으랏차!”
쉬아악—! 퍼억!
미사일처럼 날아간 도끼 하나가 그대로 오크 한 마리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붉게 타오르는 오른쪽 눈과는 달리 잠잠했던 그의 왼쪽 눈이.
짙은 녹광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보석안 : 염동」
오크의 머리에 박혔던 도끼가 은은한 녹색 빛에 휩싸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쉬익— 퍽! 퍼퍽!
자유롭게 허공을 노닐며 일행을 노리는 적들의 머리를 하나씩 쪼개놓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조종할 필요도 없었다.
「광란의 야수」로 한층 강해진 그의 감각은 이미 이 전장 전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도끼에 깃든 염동력이 오러의 힘을 대신해 주니 공격력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다만 원격으로 에너지를 보내다 보니 연비가 쓰레기이긴 한데···.’
하지만 그 또한, 그에겐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다수의 몬스터와 싸우는 상태에서는.
콰드득— 아그작!
할리는 여전히 빈손으로 놈들의 심장을 뽑아, 마석과 함께 입에 넣고 연신 「괴식」으로 먹어 치웠다.
순식간에 연소하며 사라져가던 체내의 에너지 소모 속도가 서서히 둔화되었다.
‘이러고도 온전히 회복할 수 없다니.’
그가 지금 사용 중인 능력의 연계가 얼마나 소모가 극심한 기술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콰아앙—!
“크하하핫! 뒤져라!”
물론 그만큼 그 효과는 압도적이었다.
극도로 강화된 육체는 땅을 박차고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굉음을 동반했고, 붉은 오러에 휩싸여 휘둘러지는 도끼는 이미 한참 전에 음속을 넘어서 있었다.
이미 단순한 몸통 박치기만으로도 몬스터를 박살 낼 수 있을 지경.
이쯤 되니 지닌 힘에 비해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 몸을 제대로 가누기 위해서 에너지 소모 증가를 감수하고 추가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발바닥의 면적을 넓히고 발가락을 갈고리처럼 변형시킨 후, 상당한 오러를 쏟아 부어 땅과의 접지력을 증가시켰다.
그러고도 힘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 바닥이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펑펑 터져나갔지만, 전보다는 훨씬 편하게 힘을 투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에너지 소비량이 무시무시할 정도네. 「괴식」이 없었으면 얼마 유지하지도 못했겠군.’
그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몬스터들을 뺑소니치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도끼는 놈들을 토막 내며, 빈손은 부지런히 그 심장을 뽑아 입으로 가져간다.
그 와중에도 녹색 빛에 휩싸인 도끼는 혼자 하늘을 날며 몬스터들의 머리를 부숴대고 있으니···.
콰지직—!
그의 활약에 힘입어 싸움은 이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계속 이어지던 몬스터들의 증원도 이미 끊긴 상황이었는데, 드워프 자오닉이 서둘러 설치했던 간이 결계가 전투의 소음이 너무 멀리까지 퍼져나가지 않도록 적당히 흡수한 덕분이었다.
‘마도구로 급하게 설치한 거라 근방의 놈들이 몰려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선방한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정말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후우우—.”
그렇게 할리가 한숨과 함께 하얀 김을 내뱉으며 지금의 전력 전투 태세를 해제하려고 한 순간.
‘음?’
극도로 날카로워진 그의 감각에 이곳으로 맹렬하게 접근하는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두두두두···
아직 먼 거리임에도 느껴질 정도로 지축을 흔드는 진동, 「광란의 야수」의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감, 그리고 그 몸에 가득 들어찬 막대한 양의 ‘광기’까지.
‘아, 망했네.’
놈은, 정확히 이곳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