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산맥 탈출 (3)
할리는 일단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끌어올렸던 힘을 가라앉히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 존재감이 워낙 요란했던지라 할리에게 감지되긴 했으나 아직 거리는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놈의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은 편이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앞으로 10분 정도? 느껴지는 힘에 비해선 평범한 수준이군. 상당히 덩치가 큰 놈인 모양이야.’
또 마도구의 방해를 뚫고 그 거리에서 전투의 기척을 느낄 정도인 것을 보니, 생각 이상으로 감지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었다.
할리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다가오는 위기를 알아채지 못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후우··· 후우. 아니, 할리 씨! 대체 뭐죠? 원래 강한 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 날아다니는 도끼도 그렇고!”
“역시 그 악명··· 아니, 명성에는 이유가 있다니까. 지금 보니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것 같네.”
“···생각 이상···.”
지친 와중에 서둘러 재정비하면서도 속 편한 공치사를 늘어놓는 이들.
“크흐흑, 보르도···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어쩔 수 없다, 한스. 일단 유품부터 수습하자.”
“이 친구야···, 돌아가면 내가 배 터지게 맥주를 먹여주겠다고 했는데···.”
사망한 동료의 시신을 앞에 두고 비탄에 잠긴 레인저들과 드워프.
“마커스, 거리는 얼마나 남았지? 얼마 안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
“전투가 너무 잦았습니다. 당연히 그만큼 지체될 수밖에 없죠. 그래도 하루 내로는 산맥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이들까지.
경험이 많은 만큼, 싸움이 끝난 직후에도 곧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며 떠날 준비를 하는 일행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곧바로 강적과의 전투를 벌이기엔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자기 혼자라면 모를까, 지금 그들이 저놈과 마주치게 되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죽어버리리라.
‘역시 이대론 안 돼. 시간이 더 필요하다.’
막막한 이야기였지만, 다행히도 일행 중에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
할리는 상황을 전파하기 위해 손뼉을 쳐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으하하—! 친구들? 유감스럽게도 지금 상황이 별로 안 좋아서 조금 급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아직 광기를 끌어낸 여파가 남아있어 평소 이상으로 과한 말투가 튀어나와 버렸지만, 지금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할리? 또 무슨 일이지? 설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일행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들 그의 말투보다는 그 말의 내용에 더 집중했다.
지금까지 할리가 한 경고 중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조금 풀어져 있던 그들의 분위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는 어느새 이동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에게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할리의 말에 곧바로 앞으로 나선 이가 있었으니···.
“10분? 5분이면 충분해!”
이미 한 번 몬스터의 준동을 회피한 전적이 있던 드워프, 자오닉이었다.
***
대륙 중부에 자리한 아제리온 제국.
수도 제론을 둘러싼 황실 직할령 중 하나인 토베아 시는 수도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기는 하나, 나름대로 교통의 요지로써 성세를 누리고 있는 곳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 하나가 도시의 부촌을 가로질러 한 저택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후, 열린 문으로 들어선 마차는 이후의 모든 보안 절차를 생략하고 빠르게 안을 내달렸다.
이윽고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앞에 멈춰 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스르륵—
그 안에서, 윤기가 흐르는 긴 분홍색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아름다운 여인이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해맑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차분한 발걸음으로 저택 내부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테리. 혹시 앤드류 씨는 지금 뭐 하고 계시는지 아시나요?”
“지금 놀이방에 계십니다. 말씀 전해드릴까요?”
“네, 제가 2층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좀 해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자연스럽게 응대한 그녀는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거닐었다.
그렇게 허락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구역에 발을 들이민 순간.
우웅—
묘한 진동음과 함께 특수 결계의 울림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가면을 바꿔 쓰듯, 그녀의 얼굴에 걸려있던 자애로운 미소는 순식간에 끈적끈적하고 농염한 웃음으로 변해 있었다.
“흐음~ 올리비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나 보네? 이건 좀 번거로울지도.”
그녀는 슬쩍 복도의 창밖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읊조렸다.
언데드들이 준동했을 때부터 이럴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은근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도 한때 그녀와 함께했던 만큼 그 능력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동료라면 더없이 든든한 존재였지만, 적으로 마주한다면 그 이상으로 꺼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밴시 퀸 올리비아였다.
원래 언데드로서의 유령체들은 특정한 사념의 응집체로, 그 자체적으로 품은 살의 덕분에 어느 수준 이상의 강자라면 감지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통솔하는 유령들은 경우가 다르지. 그녀는 그것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성을 제외한 사념을 일시적으로 제거할 수 있으니.’
특유의 욕망도 살의도 품지 않은 단순한 영체는 감지하는 것 자체가 까다롭다.
물론 그렇게 되면 개체의 사고력과 판별력이 떨어져, 쓸 만한 정보를 추려내는 것조차 힘들게 되겠지만···.
그 또한 올리비아의 장기 중 하나였다.
분홍 머리의 여인이 복도를 지나며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은 태생적인 이유로 그들을 감지하는 게 좀 더 수월했으나, 그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뭐, 그래도 인간들도 학습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니까. 전대만큼의 활약은 할 수 없겠지.’
결계에 특별히 신경만 쓴다면 그들의 침입도 막을 수 있을 테니, 이미 불사왕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고위층들은 중요 시설마다 따로 조치했을 것이다.
그건 당장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저택 전체에 설치된 결계는 기본이고, 특히 방금 들어선 이 구역에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방범 설비가 구축되어 있지 않은가.
벌컥—
그녀가 복도 한 편에 있는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섰다.
‘현 불사왕의 목적도 전대와 같을 테니까, 올리비아도 그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될 거야.’
대륙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불사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본능과도 같았다.
불사왕의 심장을 받아들이며 막대한 힘을 얻었지만, 오히려 그것에 매몰되어 더 맹목적으로 거대한 힘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예전과 달라. 각지에 자리 잡은 세력은 물론이고, 교단의 영향력도 훨씬 커졌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보는 선에서 마무리되겠지.’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들 ‘역천의 서약’이 원하는 바였으며.
그녀가 불사왕의 신호를 무시하고 오히려 더 깊이 숨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또다시 그 불사의 군대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걸. 더럽고, 냄새나고, 맛있는 것들도 없고.’
전대에는 지상에 소환되었다가 어쩌다 보니 불사왕에게 종속되어 그를 따르게 되었지만, 삼백 년이나 지난 마당에 다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다른 언데드들과 자신은 입장이 다르지 않은가?
“뭐, 당분간 적당히 사리고 있으면 되겠지. 불사왕께서는 세계를 정복할 구상을 하느라 바쁘실 테니까~? 우리 같은 사회의 기생충들을 신경이나 쓰겠어?”
세상에 퍼진 유령들의 진짜 목적을 모르는 그녀가 그렇게 혼자 쿡쿡거리며 웃음을 흘리고 있을 무렵.
똑똑—
“시아나 누님, 저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탁한 금발에 녹색 눈을 한 능글맞은 사내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야— 역시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누님!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뺀질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그의 몸에서는 대낮부터 한바탕했는지 술과 향수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시아나는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오히려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앤드류 씨~? 할 일은 다 마치고 그렇게 놀고 있는 거겠죠?”
“아··· 그게 말이죠?”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서늘한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에 금발의 청년, 앤드류 위버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브로코슬락 클랜의 수장이 바뀐 건 확실한 거 같은데, 정작 그자에 대해서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네요.”
“일단 알아낸 것까지만 들어보죠.”
“예··· 일단 이름은 하인즈. 무력은 진혈 하나를 별 피해 없이 혼자 제압할 정도, 일반적인 진혈은 넘어섰지만 성혈까진 이르지 않은 것 같고요. 한 달 좀 전에 갑자기 탈라리아에 나타나 순식간에 클랜을 집어삼켜 버렸는데···. 그 이전의 행적은 불명입니다.”
브로코슬락 클랜 내부가 「정제혈정」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데다, 이후 하인즈가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를 알아낸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지만···.
“당신, 너무 풀어진 거 아닌가요? 그동안 시간도 충분히 드렸던 것 같은데.”
그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시아나에게는 괜한 엄살로 보일 뿐이었다.
“아— 좀 봐주세요, 누님! 제 능력도 그렇게 편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나마 이번에 능력이 강해지면서 간접적으로 관측할 수 있게 되긴 했는데, 아직 진혈을 직접 추적할 정도는 아니란 말입니다!”
이번 심연 개방에 일조하며 카르마를 수급한 그는 「궤적 관측」의 네 번째 강화를 마칠 수 있었다.
‘직접 움직인 게 아니라 그런지, 기대했던 것보다 들어온 카르마가 적긴 했다만.’
그래도 이전까지 모았던 것과 합쳐서 고유스킬을 한 단계 강화하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시간과 장소, 또는 주변인을 특정해 진혈급에 이르는 강자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되긴 했으나.
‘아니, 진혈급 뱀파이어가 태평하게 걸어 다니는 것도 아니고. 툭하면 사라지고, 눈 깜짝할 새에 어디 딴 곳에서 나타나는데 그걸 어떻게 다 파악 하냐고!’
그가 하인즈가 탈라리아에 들어선 순간을 파악한 것도 순전히 운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능력은 일종의 CCTV 감식에 가까웠다.
지금도 대륙 전체에 뿌려진 그의 눈이 수십 개고, 조건만 맞는다면 언제든 그 위치를 변경해 과거를 읽어낼 수 있다지만···.
‘그걸 일일이 살펴봐야 하는 건 나 하나란 말이지. 아무리 정신력도 강화됐다고는 하지만, 그걸 어느 세월에 다 분석하고 있어?’
하지만 상급자가 뭐라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확실하진 않은데···. 수도 탈라리아에 도착한 방향을 봤을 때, 인근의 라펠라 시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지 마세요. 괜히 복잡해지기나 하니까.”
괜히 한마디 더 했다가 핀잔을 들은 앤드류가 시무룩해지자, 시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전에 한바탕 교단과의 충돌을 겪으며 탈리아 왕국에 심어뒀던 이들이 한순간에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거기다 브로코슬락 클랜이 새로운 체재 아래 더욱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이전보다 수작을 부리기 더 어려워졌다.
여러모로 그간 준비하던 계획이 비틀린 것은 당연한 사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이제 와서 그쪽과 다시 접촉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배제하는 수밖에.”
“응?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누님? 뱀파이어들과 동맹 맺은 거 아니었나요?”
“우리가 동맹을 맺은 건 유페르쉬 클랜이니까요. 마침 그들은 지닌 무력에 비해 정치적인 입지는 그리 좋지 않았으니, 이참에 브로코슬락을 밀어버리고 그들에게 탈리아 왕국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들은 본거지를 제국에 두고 전 대륙적으로 활동하는 클랜으로, 도시의 어둠 속에 숨어 사는 전형적인 뱀파이어들이었다.
“음··· 저쪽에도 성혈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괜히 피해가 커지지 않을까요?”
“그래봤자 죽을 날만 기다리며 동면에 든 과거의 망령일 뿐. 거기다 유페르쉬 클랜에는 제대로 성혈을 계승한 비스크 유페르쉬말고도 진혈이 넷이나 더 있으니, 브로코슬락의 성혈이 깨어나기도 전에 일을 끝마칠 수 있을 테죠.”
그렇게 말을 마친 시아나가 자줏빛 눈을 요사하게 빛내며 살짝 눈웃음쳤다.
“뭣하면 우리 쪽에서 살짝 도움을 줘도 되는 일이니까요.”
“뭐, 그런 일은 시아나 누님이 알아서 하십쇼. 그럼 전 다시 이전에 하던 대로, 주기적으로 고위층들의 움직임이나 살펴보면 되겠습니까?”
“후후훗,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녀가 모략을 획책하는 흑막처럼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잠시 눈치를 살피던 앤드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님? 그··· 뿔, 나왔는데···.”
“···아? 이런, 너무 마음이 풀어졌나 보네요. 밖에선 항상 긴장하고 있다 보니까, 이곳에만 오면 이런단 말이죠.”
“아하하— 그, 그렇죠. 긴장을 푸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뇨.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는 게 좋죠.”
시아나의 머리에 돋아났던 한 쌍의 날카로운 뿔이 다시 스르륵 줄어들며 사라졌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노는 것도 적당히 하도록 하세요, 앤드류. 아니면, 제가 같이 놀아 드릴까요?”
“아···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누님. ···아직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 말한 앤드류 위버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다가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누가 봐도 자신을 무서워하는 모습이었지만, 항상 있었던 일이기에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서재에 혼자 남은 그녀, 삼백 년도 전에 대륙에 소환되었던 악마족 서큐버스 시아나는—.
유페르쉬 클랜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통신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