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굴러 온 호박 (3)
[크워어어어——!]
산맥 안쪽에서 재차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포효.
영적인 압력이 담겨 격하의 존재를 억압하는 소리에 할리와 하인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물론 그들에게 큰 효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본능을 자극하는 이 울림이 거슬리긴 마찬가지였다.
‘이 근방에 둥지를 튼 드래곤이 있었나.’
애초에 광활한 북부 산맥의 자락이었으니, 드래곤 한 마리 정도 틀어박혀 있어도 이상할 것 없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었다.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가 광기에 이렇게 잡아먹혔다고?’
아까부터 들려오는 놈의 포효 소리가 도저히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언데드인 본 드래곤이 되며 그 소리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 담겼던 엔트라시오처럼, 지금 놈에게서는 광기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일단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건 분명하군.’
몬스터가 광기에 영향을 받기 쉽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은 몬스터보다는 지성체라고 봐야 하는 존재였다.
그것도 아우테리카의 모든 종족을 통틀어 최고의 지성과 능력을 갖춘 생명체였는데···.
까드득! 까득!
할리가 부지런히 마석을 씹어 삼키는 와중에도, 머리는 팽팽 돌아가며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희소하다는 드래곤이 여기에 있었던 데다, 지금 상태까지 좋지 않다는 거지?’
안 그래도 그 개체수가 적었던 그들은 두 차례의 불사왕 사태를 거치며 더욱 수가 줄어, 이제는 거의 멸종 위기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대륙을 죽음으로 뒤덮으려는 불사왕은 드래곤에게도 위협적인 적이었고, 당연히 그들은 대륙 연합과 함께 힘을 합쳐 불사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초대 불사왕은 대륙 정복의 최대 걸림돌이 될 드래곤들을 먼저 철저하게 사냥하는 데 주력했다.
설령 다른 전선에서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그들의 개체수를 줄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
그 덕분에 대륙 연합은 전선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불사왕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드래곤들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탄생한 두 번째 불사왕은 쐐기를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후에 이온 대륙에서는 드래곤을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벌어졌던 곳과 먼 동부 지역에서나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들의 성향을 봐도 쉽게 타락할 리가 없는데.’
그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 왜 당장 한스에게 계승된 언데드 드래곤이 엔트라시오 하나밖에 없겠는가.
‘그 고고한 자존심 때문에 불사왕에게 잡힐 것 같으면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자폭하는 것은 예사요, 설령 사체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거부 반응이 심해 언데드로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지.’
한스에게 계승된 전대의 정보를 통해 파악한 당사자들의 생생한 정보였다.
심지어 어찌어찌 언데드로 되살렸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한 다른 드래곤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 어떻게든 파괴해 버렸다고 하니.
자신은 물론 동족의 타락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고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엔트라시오가 한스의 손에 들어온 것만 해도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었어.’
그런데 그런 드래곤이, 대륙 전체에 광범위하게 살포되면서 인간에게도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하는 수준의 광기에 잡아먹혀 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사실 어찌 된 일인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크하하핫! 드래곤이라니! 이게 웬 떡이야?”
하인즈가 차가운 얼굴로 입꼬리를 치켜올렸고, 마석을 전부 먹어 치운 할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사실 자세한 내막은 직접 확인해 보면 알 일이었다.
“드래곤 고기는 무슨 맛일까!”
신이 난 할리가 놈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전력으로 질주했다.
방금 에너지를 빵빵하게 채워서인지 그 발걸음이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용혈이라면 광기만 제거하면 먹을 수 있겠지. 괜찮은 보양식이 되겠군.”
그런 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인즈가 가볍게 자신의 연미복을 정리하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당연히 그의 목적지 또한 포효의 발원지.
드래곤이 있는 곳이었다.
***
-아파, 괴로워, 내가 왜 이런 꼴이, 역시 죽이자!
-그놈 때문이야. 그놈이라니 누구지? 무능한 인간들, 멍청한 엘프들, 냄새나는 드워프들! 또··· 또 있었던 것 같은데?
-다쳤으니 회복해야 해. 회복을 위해선 잘 먹어야지. 그러니까 먹자. 잔뜩 먹자!
[쿠오오오오——!]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레드 드래곤, 헤라토스는 몽롱한 기분으로 포효를 터트렸다.
그러자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니 좀 더 이것을 만끽하고자 하는 욕구가 샘솟았다.
어째선지 오랜 시간을 정양하며 보내야 했던 몸 상태가 급속도로 회복되어서, 이제는 마음껏 밖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군, 아주 좋아. 생각보다 더 빨리 회복되었어. 역시 이 몸은 위대하다!’
헤라토스는 삼백 년 전 2대 불사왕과의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드래곤이었다.
아직 어려서 참전하지 못했던 초대 때와는 달리, 그가 직접 겪은 전투는 생각보다 더 수월했다.
대륙인들은 물론 드래곤들도 바보가 아니었고, 여러 대비를 통해 전보다 더 효율적인 대처를 했으니 당연한 일.
그러고도 서부 지역이 통째로 넘어가고 제국 하나가 패망하기는 했지만, 초대에 비하면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선방한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활약에 취해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데 여기가 어디··· 아! 내가 만들었던 곳이지. 근데 뭐 때문에 만들었더라?’
결과적으로 불사의 군대와 싸우다 함정에 빠진 헤라토스는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무수한 강자들도 속절없이 죽어가던 대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었지만, 그가 입은 부상은 절대 그렇게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거대한 몸 곳곳에 깊은 상처가 생기고, 그곳을 통해 심연을 머금은 죽음의 기운이 파고들었다.
그 어떤 회복 마법도, 성법도 통하지 않는 필사(必死)의 저주에 죽음만 앞두고 있던 헤라토스에게···.
마지막 행운이 찾아왔다.
때마침 몸을 갉아 먹던 저주의 주체인 불사왕이 결사대에 의해 토벌된 것이다.
그로 인해 시시각각 죽음으로 치닫던 그도 기사회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위중한 상태였던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회복을 위해 가장 확실한 수단을 사용했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 맞아. 이곳에서 나가려고 했지. 배가 고프니 오랜만에 실컷 먹어야겠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북부 산맥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안전을 위한 온갖 결계를 설치해 동면 준비에 들어갔다.
드래곤의 동면은 수백 년간 이어지며, 그동안 신체의 성장과 회복력이 극도로 활성화되는 만큼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친 몸으로 그 모든 결계를 설치하는 건 정말 죽을 노릇이었지만, 그동안 아껴왔던 온갖 마도구들과 자기 피까지 매개로 사용해 기어코 완성할 수 있었다.
다만, 마지막 행운이 지나고 그에게 찾아온 불행이 있었으니—.
회복력을 최대한으로 증폭하기 위해 주변의 기운을 끌어모으고, 몬스터를 유인해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결계도 함께 설치한 것이었다.
그가 어찌 알았으랴.
재차 심연이 열려 세상 전체에 ‘광기’가 퍼지고, 그의 영역에 바글바글한 몬스터들의 몸에도 그것이 가득 쌓이게 될 줄은.
당연히 결계에는 온갖 이상 상황에 대한 방비가 갖춰진 상태였지만, 거기에 심연의 광기에 대한 대처 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동면에 빠진 그의 몸속에 계속해서 광기가 쌓여가고, 그것은 마침내 그의 뇌리를 완전히 오염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크워어어어——!]
펄럭—! 펄럭—!
자신이 만든 둥지에서 빠져나온 헤라토스가 거칠게 날갯짓했다.
몸은 이미 깔끔하게 회복된 뒤였다.
제법 오랜 시간 동면하기도 했거니와, 그 몸에 축적된 광기의 양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으니까.
‘아아— 이 상쾌한 공기. 그런데 조금 아쉽군. 여기에 피 냄새만 조금 더해지면 좋을 것 같은데. 타는 냄새도 좋고.’
광기에 완전히 잠식당한 그의 사고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사이, 온갖 비약을 거쳐 황당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 인근에 인간 도시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다 브레스 한 발 쏴 주면 되겠군!’
그럼 타는 냄새와 비명 소리를 한 번에 만끽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먹이들을 생으로 씹다 보면 혈향도 함께 음미할 수 있겠지.
드래곤인 헤라토스는 마나를 흡수하는 것만으로 살 수 있어 무엇을 먹을 필요도 없었지만, 그런 사실은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광기에 잠식된 그는 영역 주변에 널려있는 몬스터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인간들이 많이 있을 만한 곳으로 가기 위해 거리를 가늠했다.
‘그럼, 가 볼··· 응?’
그 순간.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전신에서 폭발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는 존재.
‘···인간? 아니, 정말 인간 맞나? 거기다 하나 더 있었군.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이건 뱀파이어인가?’
주르륵—
그들을 인식하자 그의 거대한 입에서 군침이 흘러내렸다.
두 눈은 이미 새빨갛게 변해 한 톨의 이성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헤라토스는 자신의 상태에 조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일단, 전채 요리로 저것들부터 먹어볼까···?’
갑자기 치솟는 식욕에 지배당했을 뿐.
“카하하핫! 진짜 살아있는 드래곤이잖아! 와우, 이런 건 처음인데!”
“완전히 광기에 잡아먹혔군.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겠어. 어떤 식으로 강화되었는가가 관건인가.”
순식간에 헤라토스의 앞에 도달한 유사 인간과 뱀파이어가 차분히 그를 관찰하며 저마다의 평을 내놓았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식자재들이 뭐라 떠들든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니.
‘저 육즙이 많아 보이는 놈부터 먹을까? 씹을 때마다 생명력이 팡팡 터져서 맛있을 것 같은데. 뱀파이어도 제법 별미가 될 것 같고.’
그렇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였다.
‘어?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의 뛰어난 머리가 자신의 행동에서 위화감을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광기에 물들었던 뇌가 재차 논리적인 사고를 시작했다.
왜 자신이 저들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는지.
그 결과.
[크어엉——!]
그는 입을 크게 벌리며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래! 그냥 둘 다 한꺼번에 먹어버리면 되는 것을!’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본격적인 식사는 인간 도시에서 할 생각이었으니, 지금은 그냥 한입에 털어 넣어 버리고 갈 길 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헤라토스는 한층 강화된 육체 능력으로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이 있던 공간을 물어뜯었고···.
“후웁—!”
후욱— 콰아앙—!
이미 전투 태세였던 할리는 가볍게 그 자리를 피하며,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손으로 그 거대한 머리를 올려 쳐 버렸다.
[끄르륵——?]
갑작스런 충격에 헤라토스가 당황하던 것도 잠시, 그의 콧잔등에 시커먼 인영이 소리 없이 내려서고.
“실례.”
쉬악— 촤악!
그의 양손에서 사출된 날카로운 핏줄기가 순식간에 그 거대한 눈동자를 베어버렸다.
헤라토스가 엄청난 반응속도로 눈꺼풀을 덮었지만, 어디 하인즈의 공격이 그런 얇은 가죽으로 막을 수 있기야 하던가.
눈꺼풀이 베이며 양 눈에서 순간적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분노였을까.
피가 흐르는 눈을 질끈 감은 드래곤의 거친 포효와 함께,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이 폭발하며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그 공격에 잠시 뒤로 물러섰던 하인즈는 재차 놈에게 달려들려다 잠시 멈칫했다.
“···벌써 회복됐군.”
어느새 붉게 이글거리는 눈을 뜬 헤라토스의 눈은 상처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채였다.
‘눈꺼풀 때문에 공격이 좀 얕게 들어갔다고 느끼긴 했지만.’
놈의 반응 속도와 가죽의 내구성도 상상 이상이었다.
거기다 저런 무지막지한 회복력과 압도적인 거체에서 가해지는 파괴력까지 생각해 보면···.
“카하핫! 이거, 우리 둘이서는 힘들겠는데?”
물론 하인즈와 할리가 놈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신체 스펙도 절대 무시할 수 없거니와, 보아하니 저 드래곤은 광기로 육체 능력이 급증한 대신 마법 능력은 오히려 퇴화한 것 같았으니까.
거기다 드래곤이란 명성에 맞지 않게 지능적인 면은 전혀 없고, 그저 본능에 충실한 거대한 도마뱀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정도 덩치의 도마뱀이 저런 재생력을 가졌으면··· 백날 두들겨봐야 소용없겠군.’
그야말로 끝나지 않는 무한의 굴레에 갇히게 될 것이다.
‘아니, 보유한 에너지에 한계가 있는 이쪽과 다르게 드래곤은 주변 기운을 빨아들여 회복할 수 있으니.’
결국 그들이 물러나는 결말밖에 없을 터.
저 거대한 덩치의 도마뱀을 상대하기에는 그들과 상성이 그리 좋지 못했다.
압도적인 힘만 있다면 그조차 무시할 수 있겠지만···.
진혈의 뱀파이어 하인즈 2세와 야만 대전사 할리는 아직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안 되는데 뭐 어쩌겠는가.
그 정도 수준의 상대를 데려오는 수밖에.
그리고.
허공의 한 지점에 순간적으로 어둠이 뭉쳐 들었다.
고오오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던 어둠은, 이윽고 한 존재를 그곳에 불러내고서야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태양이 버젓이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필터를 씌운 것처럼 세상의 밝기가 한순간에 내려갔으며.
[크흐흐흣— 광기에 물든 드래곤이라니. 이거 좋은 재료가 될 것 같구나!]
드래곤들을 멸종 위기로 내몬 재앙이.
그곳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