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광룡 사냥 (2)
금이 가고 부서지면서도 쉴 새 없이 수복하며 엉겨 붙어 오는 본 드래곤과, 항마력을 뚫고 들어오는 마법을 난사해 정신없이 두들겨대는 불사왕.
날갯죽지 같은 약한 부위를 노려 운신을 방해하는 뱀파이어에, 도대체 뭐 하는 놈인지 모를 유사 인간··· 아니, 기생충 한 마리까지.
[키야아아——!]
답답한 상황에서 밀려드는 짜증과 분노에 헤라토스가 다시 전신을 뒤틀며 온몸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고오오—!
거친 급류처럼 쏟아져 나오는 그 적대적인 마력은 가까이 붙어있을수록 파괴적이기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놈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피를 이용해 연신 광룡의 몸을 썰어대던 하인즈는 미련 없이 몸을 빼냈지만···.
“엇차!”
푸욱—!
이 명당자리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할리는 자신을 강제로 밀어내려는 힘에 버티며, 손톱과 발톱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놈의 상처에 박아 넣었다.
뿌드득— 찌직!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은 압력이 놈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지고.
그간 진화를 거듭해 어지간해선 흠집도 나지 않았던 그의 몸 곳곳이 찢기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재생」으로 회복한다 해도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할리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최고의 보양식이 이렇게 코앞에 널려 있는데, 이 정도 상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육체변이」를 최대한으로 발휘해 귀밑까지 찢어진 입에 뱀처럼 늘어나는 턱, 그 안에 빼곡하게 돋아난 톱니 같은 이빨들까지.
콰직! 콰지직!
할리는 파괴되는 자기 몸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부지런히 입을 움직여 용의 피와 살을 탐했다.
그 극상의 식재료들은 「괴식」의 힘을 빌려 끊임없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그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되어 부서지는 몸을 더욱더 강하게 재생시켰다.
그리고 그 행위가 계속해서 반복되자···.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괴식」이 특수스킬「폭식」으로 진화합니다.》
마침내 「괴식」스킬이 한계를 넘어 진화에 이르렀다.
‘하긴. 용의 피와 살을 그렇게 먹어 치웠는데 당연한 건가.’
스킬을 진화시키기 위해선 숙련도와 별개로 각자가 요구하는 ‘업’이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광룡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그 살을 산채로 뜯어먹는 건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업적이다.
거기다 할리의 괴물 같은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그간 끊임없이 사용한 만큼, 자잘하게 누적된 경험치도 적지 않았을 테고.
마침 광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의 급류가 멈춘 틈을 타 슬쩍 새로 얻은 스킬의 정보를 확인했다.
「괴식」은 소화하기 힘든 것들을 흡수하는 데 도움을 주어, 더 많은 양을 빨리 먹을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에너지가 필수인 그에게 꼭 필요한 스킬이었는데.
이번에 진화한 「폭식」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이거, 할리와 시너지가 장난 아니겠는데?’
그는 시선을 내려 상처에서 다시 돋아나기 시작한 광룡의 비늘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는 그것을 뽑아낸 후 살점만을 취했었지만···.
쩌억—
이번엔 그냥 입을 최대한으로 벌리고 그대로 물어뜯었다.
까드득!
원래도 단단했던 용의 비늘이 ‘광기’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되어, 진혈을 넘어선 하인즈조차 전력을 다해야 부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콰지직! 콰직!
그것은 할리의 이빨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유리처럼 부스러졌다.
입에 넣고 씹는 행위에 한해서 주어지는 「폭식」의 강한 보정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광룡의 일부를 먹어 치우는 것과 동시에, 그 ‘먹는’ 행위를 통해 놈의 신체에 흐르던 무언가도 함께 뜯겨 나왔다.
‘이건?’
그것의 효과는 곧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가 물어뜯었던 부위의 재생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였으니까.
‘이거 굉장한데?’
단순히 이전보다 더 잘 먹게 된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폭식」의 대상에 속한 개념까지 취할 수 있게 된 건가?’
쉽게 말해, 방금 그는 헤라토스의 살점뿐만 아니라 그 부위에 깃든 ‘재생력’과 ‘광기’까지 통째로 뜯어먹어 버린 것이었다.
‘아직 급이나 숙련도가 낮아서인지, 효과가 완벽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지금 상황에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거기다 그에게 ‘온전히 먹고 소화 시킨다’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돌연변이」가 새로운 정보를 각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육체변이」를 사용하자—.
그의 한쪽 팔에서 짙은 핏빛의 비늘 하나가 돋아났다.
‘···광룡의 비늘.’
원래 뿔을 만들기 위해선 대상의 뿔을, 꼬리를 만들고 싶다면 꼬리를 먹어야 했다.
당연히 비늘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모든 유전자 정보가 깃들어 있는 마석을 한계치까지 섭취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였다면 드래곤 하트를 먹기 전까진 비늘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텐데.’
아무리 「괴식」이 대단하다고 한들 용의 비늘까지 온전히 소화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아직 완전하진 않군. 그래도 비늘 하나에 이 정도면 흡수 효율도 상당히 높아졌는데?’
지금까지도 용의 몸뚱이를 씹어 먹으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계속 육체를 진화시키고 있었지만, 마석이 아닌 만큼 효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체화한 비늘의 완성도를 보니 흡수율이 몇 배는 더 증가한 것 같았다.
생각이 더 깊게 뻗어나갔다.
할리의 「돌연변이」는 다양한 종의 유전자를 수집해 완전 진화 생물이 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의 드래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이계에 존재하는 용의 피를 이용해 만들어진 기적의 산물.
그리고 이 아우테리카에서 드래곤은 생명체의 정점에 가장 가까운 종족이었다.
심지어 지금 광룡은 ‘광기’에 침식되어 개체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육체 진화를 이룩한 상태였으니···.
‘일단 거기에 딸린 페널티는 차치하더라도 말이지.’
이 몸뚱이도 절대 평범하지 않으니 그 정도는 할리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터.
“쓰읍— 군침이 도는군. 크흐흣!”
당연히 놈의 드래곤 하트를 먹는다고 완전히 용이 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효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손실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광룡의 심장이 할리를 좀 더 완성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줄 거란 사실이었고···.
때마침 그에게 그것을 위한 능력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크하핫! 이놈! 어디 심장이나 한번 보자꾸나!”
흥분한 할리가 다시 광룡의 상처를 물어뜯었다.
「폭식」의 힘으로 턱을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이빨이 닿는 족족 살점이 떨어져 목구멍으로 넘어와 흡수되었다.
콰득! 콰드득!
그는 굴을 파듯 용의 피와 살을 먹어 치우며 상처 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원래라면 상처가 급속도로 재생되면서 외부의 진입을 저지해야 했지만···.
놈의 재생력이 억제된 이상,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캬르륵——?]
한스가 불러낸 검은 사슬에 휘감겨 본 드래곤과 엎치락뒤치락하던 광룡 헤라토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신의 가슴 부위를 살폈다.
아까부터 웬 유사 인간이 매달려 벌레처럼 그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자신의 단단한 몸과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믿고 적당히 견제만 하고 있었거늘.
그런데.
재차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그의 체내를 흐르던 무언가가 뜯겨져 나갔다.
[키야아아——?!]
상처에서 흐르는 피,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현저하게 느려진 재생 속도.
가슴에 매달린 기생충은 조금씩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들며 심장부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위기를 직감한 광룡이 거칠게 몸을 뒤틀었지만, 한스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쿠오오오——!]
자신의 가슴살을 후벼 파려는 광룡의 손길을 막기 위해 엔트라시오가 몸을 날려 놈을 끌어안았다.
타락한 두 드래곤의 격렬한 포옹이 이어지는 와중, 본 드래곤의 벌어진 갈비뼈 사이로 할리의 하체가 버둥거리며 놈의 몸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크흐흣— 얌전히 있어라. 금방 끝날 테니까. 이거 내가 공들여 만든 작품이 완성되어간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기분이 좋구나.]
지금의 할리를 만든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한스가 뿌듯하게 말하며 다시 놈을 억누를 마법을 발동했다.
광기에 물든 드래곤을 산 채로 제압하는 것은 그에게도 제법 버거운 일이었지만, 이제는 보람마저 느끼고 있었다.
[캬아아악——!]
생명의 위기 때문인지, 헤라토스가 지금까지 이상으로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다시 한번 주변의 광기가 몰려들며 놈의 육체를 더욱 강화시켰다.
뿌드득! 뿌드드득!
부풀어 오르는 근육과 거칠게 타오르는 검붉은 마력.
광룡 헤라토스는 자신을 끌어안은 엔트라시오를 깨물고 쥐어뜯으며 전신을 뒤틀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 속에 파고든 기생충을 죽이기 위해 신체를 조절해 근육을 조이는 것은 물론, 자기 몸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고 고밀도의 마력을 체내에 직접 투사하기까지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조금씩, 조금씩···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콰아앙! 콰드득!
기생충을 제거하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아챈 광룡의 반항이 더욱 거세졌다.
엔트라시오는 악착같이 놈에게 매달리는 것에만 집중하며 모든 마력을 방어와 수복에만 쏟아 부었다.
그 때문에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해 점차 부서져 나가고 있었지만, 지금 더 급한 상황인 것은 오히려 헤라토스 쪽이었다.
[흐우우웁——]
어찌나 급했는지, 브레스까지 사용하려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지근거리에서 브레스를 사용할 생각인가? 이젠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군.”
놈의 턱 아래에는 이미 하인즈 2세가 대기하고 있었다.
「은폐」와 「투명화」까지 사용한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그동안 별다른 활약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지. 상대가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이대로 끝내면 자존심 상하거든.”
그의 손에 쥐어진 커다란 피의 대검이 조용히 일렁였다.
그간 「정제혈정」을 사용하기 위해 모아왔던 여분의 혈액을 모조리 투자한 그 검에는, 「혼혈진화」의 영향으로 한계까지 진화한 하인즈의 흡혈 인자가 가득 담겨있었으며—.
그것은 「피의 신비」의 효과를 극한으로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매개체였다.
‘이쪽은 신경도 안 쓰는군. 그럴 정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내버려 둬도 별 상관없다고 여긴 건가.’
놈의 감지력을 생각하면 하인즈의 「은폐」 정도는 조금만 집중하면 간파할 수 있을 텐데.
이 상황에서도 한스와 엔트라시오를 견제하는 모습만 보일 뿐,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후회하게 될 테지만.
핏빛으로 발광하는 그의 눈이 브레스를 사용하기 위해 유동하는 마력의 흐름을 「간파」한다.
격의 차이로 광룡의 체내를 온전히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이 정도로 격렬한 마력의 유동이 있다면 그렇게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저기군.’
하인즈가 천천히 왼쪽 허리춤으로 옮긴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것은 하인리히가 「종합 무기술」을 통해 배웠던 검술의 준비 자세였다.
‘「로지아 성투법」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어차피, 지금 할 일은 그리 대단한 검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
「가속」을 사용해 전력으로 베어낼 뿐.
휘두르는 순간 채찍처럼 길게 늘어난 피의 대검이 날카롭게 공간을 갈라—.
극초음속을 넘어선 그 검 끝이, 아무런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광룡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쉬아아악——!
쿠구구궁—!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을 따라 충격파가 퍼지고.
푸화아악—!
광룡의 그 커다란 목이 절반이나 잘려 나가며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허얽——?!]
거기다 그곳을 통해 한창 브레스를 뿜기 위해 밀집시키던 마력까지 터져 나왔다.
그 여파로 안 그래도 치명적이던 상처가 너덜너덜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
[컥, 크헉——?!]
지금까지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광룡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상처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으니···.
‘이 정도 치명상까지 재생하다니. 징그러울 정도군.’
하인즈는 사용한 혈액을 될 수 있는 만큼 회수해 몸 안에 저장하며 가볍게 혀를 찼다.
물론 「초재생」이 있는 자신도 저 정도는 가능했지만, 솔직히 저 덩치로 저런 재생력은 반칙이 아닌가.
‘뭐, 이제는 상관없지만.’
그래, 이제는 놈이 재생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할리가.
마침내 놈의 심장부를 코앞에 두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