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하워드
“으흠, 으흠. 아아—!”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중저음.
떡 벌어진 어깨에 옹골지게 들어찬 근육, 부리부리한 눈매와 윤기가 흐르는 수염까지.
“에잉— 이거 눈높이가 낮은 것이 영 적응이 안 되는구만!”
거기다 가슴팍에 겨우 닿는 작은 신장이 더해진, 그야말로 완벽한 드워프 한 명이 이곳에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에 새로 생성한 나의 아바타였다.
‘「커스터마이징」으로 최대한 키를 늘렸는데도 이 정도라니. 대충 짐작하긴 했지만 직접 되어 보니까 느낌이 또 다르네.’
사실 종족으로써의 한계 때문인지 키의 최대치에도 한계가 있어, 늘린 키도 거기서 거기였다.
나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눈앞의 드워프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개체 정보>
-개체명 : 하워드
-종족 : 드워프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장인정신」
-특이 사항 : 한성현의 여덟 번째 아바타. 매개체로 장인의 애장품 곡괭이가 사용되어 드워프로 탄생했다. 「장인정신」의 영향으로 제작과 관련된 행위에 추가 보정이 가해진다.
불사왕 한스, 뱀파이어 하인즈 2세, 성자 하인리히, 용인 할리, 상인 휴버트, 엘프 해리스에 이은 드워프 하워드!
사망한 원조 하인즈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일곱 번째인 아바타였다.
“좋아, 딱 생각대로군. 처음 주어지는 스킬도 원하던 종류로 붙었고.”
역시 「커스터마이징」으로 생성된 개체는 그와 관련된 종족 특성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하워드는 전투 쪽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필요한 물건을 바로바로 맞춤 제작해 줄 수 있는 데다, 실력까지 뛰어난 장인은 구하기도 힘들지.’
굳이 병장기류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만든다는 행위는 장인의 수준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인 법이었다.
아바타인 하워드는 「장인정신」뿐만이 아니라 성장 속도와 학습 능력 증가 버프까지 받고 있으니, 그 수준도 빠르게 발전할 터.
상인 휴버트가 필요한 물건은 곧바로 조달해 줄 수도 있으니 최고의 환경이 갖춰진 셈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한 가지 난관이 남아 있었는데···.
‘엘프 해리스 때와 마찬가지로 제반 지식이 전무하다는 게 문제야.’
오히려 그때보다 더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애초에 기술이라는 것은 대를 이어 계승되며 발전하고 보완되는 것.
아무리 손재주가 뛰어나고 재능이 있다고 해도 독학으로 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할리의 인맥을 쓰는 수밖에 없겠지?’
할리와 자오닉은 생사를 함께한 사이니 그 정도 부탁 정도는 들어주지 않을까?
거기다 그 자신은 모를 테지만, 그와 하워드는 결코 남이 아니지 않은가!
엄밀히 따지면 부자지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손자라고 해야겠군.’
모종의 이유로 헤어진 딸(엘린느)이 먼 타지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아들(하워드)이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비극적 서사 한 편이 뚝딱 완성되었다.
‘정작 자오닉에게 말할 수는 없으니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온 대륙에서는 이종족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만큼, 그들은 같은 동족끼리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돕는 경향이 있었다.
제대로 기술을 배우지도 못한 어린 떠돌이 드워프 행세를 하면 그도 쉽게 내치지는 않으리라.
‘물론 지금 당장은 곤란할 것 같긴 한데.’
아직 한창 어수선한 상황인 만큼, 일단 북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은···.
“으허헛— 그럼, 지구의 기술부터 배워볼까?”
하워드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씨익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 보다는, 일단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을 습득해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
‘정령술과는 경우가 달라. 대장 기술은 지구에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어.’
물론 두 세계의 법칙이 다른 만큼 심화로 넘어가면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겠으나, 기본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지구의 기술은 대부분 기계를 이용하긴 하지만 거기에 접목된 원리를 파악하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나중에 각 세계의 차이점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뭔가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지. 지구는 관련된 정보를 얻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까 이쪽 먼저 준비해야겠어.’
재료 공학, 그중에서도 금속 가공에 관한 야금학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필요한 자료를 조사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자료를 조사해 하워드가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분류하고, 단계별로 나눠서 정리하는 걸 어느 세월에 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진소란.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한 가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좀 있는데.”
정원에서 보안을 강화하는 작업을 마친 하인즈가 대포폰을 꺼내 들어 헤테로시스의 관리자, 진소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럴 때 부하들을 써먹지 언제 써먹겠어?’
혈맹에는 전투에 적성이 있는 흡혈귀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무직이나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고, 조직의 덩치가 커진 만큼 양지에서 고용된 일반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 돈이라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대한 빨리. 대학 교수든 전문 기술자든 전부 섭외해서···.”
그것이 논문이든, 동영상 자료든, 누군가의 노하우든···.
나는 그저 명령만 내려놓고, 아랫사람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서 정리한 결과를 받아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타라크에 공방을 하나 마련해야겠어. 시간을 아끼려면 실습은 아우테리카에서 하는 수밖에.’
내가 지구에서 할 일은 그저 자료를 보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건 「장인정신」을 가진 드워프, 하워드의 몫.
‘온갖 보정을 받는 만큼 독학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를 수 있겠지. 그 수준을 넘어서면 지구에서 장인들을 초빙해 직접 배울 수밖에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다른 세계에서 온 장인들도.’
다른 차원 출신의 장인들은 지구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쌓아온 경험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체계로 발달한 기술은 그 나름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 테지.
그리고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의 어둠 속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한 ‘혈맹’은.
조건에 맞는 이들의 정보를 입수하고, 대가를 지불해 협조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다.
***
로셀리아 대신전.
“흐아아··· 피곤해 죽을 것 같아요···.”
하인리히와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찾아온 리에스타 성녀가 체통 없이 테이블에 엎드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말과는 달리 매끈한 피부와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자랑하는 외견은 피곤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지만, 그건 강대한 신성력과 축복의 영향일 뿐.
그녀는 수면과 식사 등,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보내고 있었다.
평소의 허술한 행동과 대비되는 그 책임감 있고 철두철미한 모습에 성녀를 다시 보게 될 정도였다.
“으앙—! 티온이랑 뮤랑 셀리가 보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도! 벌써 못 본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다들 잘 있을까요?”
···물론 틈만 나면 보이는 이런 언행들 때문에 그런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참고로 티온과 뮤는 지렁이, 셀리는 무당벌레였다.
어떻게 각 개체를 구별하는지, 그 작은 것들을 넓은 화단에서 무슨 수로 찾아내서 관찰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거기다 이렇게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자연의 섭리로 죽더라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녀는 벌레들에게 축복과 신성력을 쏟아 부어 최상의 컨디션으로 살 수 있도록 도움은 주지만···.
설령 눈앞에서 천적에게 잡아먹히더라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마치,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처럼.
“잠깐 시간 내서 화단에 다녀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시간을 그리 잡아먹지도 않을 텐데요.”
“으··· 아뇨. 한 번 보면 몇 시간이고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기 전에는 화단에 가지 않겠다고 저 자신과 약속했는걸요! 그리고 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성녀가 맡은 일은 대륙 정상 회의를 위한 사전 조율이었다.
각 세력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탈리아 왕국에서는 브라이트 공작이 직접 올 거라고 했으니까. 제국에서는 황태자가 움직일 거라 했던가? 여러모로 까다로울 수밖에 없겠군.’
그런 대외적인 업무는 오랜 시간 성녀로 지내며 이름이 알려진 그녀가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하인리히가 성자로 인정받았다고는 하지만 교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전면에 나서기는 살짝 이름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그래서 성기사 출신인 그는 성기사단과 성전사대를 비롯한 무력 부문의 업무를 맡아, 배우면서 일을 처리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불사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굉장히 중요했던 만큼, 그 업무 강도는 성녀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 연계할 업무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아, 하인리히 님도 그 소식 전해 들으셨죠?”
평소처럼 말을 잇던 성녀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며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일 때의 화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툴크 왕국 쪽의 서북부 산맥에 관한 건 말씀이시군요.”
“네. 몬스터의 남하로 한창 난리인 산맥 쪽에 강대한 마력의 충돌이 감지되었어요. 물론, 불사왕의 흑마력도 함께요.”
그도 사전에 전해 들었던 정보였다.
한스도 나름 결계까지 치며 신경을 썼지만, 광룡과의 격렬한 전투는 그 정도 급조한 결계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성녀의 감지는 유독 특출났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아마,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겠죠.”
금빛 눈동자를 빛내는 그녀가 하인리히에게 조용히 말했다.
“드래곤 사냥이.”
역대 불사왕들은 대륙 정복의 가장 큰 방해물을 드래곤이라 판단하고 그들을 척살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덕분에 지금 드래곤은 멸종 위기에까지 몰릴 정도였고, 남은 이들은 조용히 몸을 숨기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몬스터들을 움직여 세상의 혼란을 부추김과 동시에 드래곤을 배제하기 위한 움직임까지. 이젠 정말 시간이 촉박한데, 이 와중에도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그렇게 많다니···!”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가는 성녀.
일을 진행하는 와중 받은 스트레스가 어지간히 컸던 것 같다.
‘음, 드래곤을 사냥한 게 맞긴 하지만.’
그리고 하인리히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녀를 위로하면서도 내심 얼떨떨한 기분을 억눌렀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아무래도 전과가 있다 보니.’
누굴 탓하랴, 지금까지 보여준 게 전부 그런 모습이었는데.
부모님에게 고자질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성토는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대로 협조하지 않는 이들로 시작된 그 불평은 이내 모든 사태의 원인인 불사왕에게까지 번져, 고상한 어휘로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
그리고 성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대륙의 절대 악이자 세계를 좀먹는 기생충, 모든 부정의 근원이며 배덕의 상징인 불사왕 한스는 지금 무엇을 하는 중이냐···.
바로.
성자 하인리히가 보낸 선물을 즐거운 마음으로 개봉하고 있었다.
***
[과연, 굉장히 유용하군. 이렇게 편하게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한스는 음산한 웃음과 함께 한 손에 들린 새하얀 결정을 바라보았다.
고체화된 신성력에 감싸인 그것은, 하인리히가 「아바타 클라우드」를 통해 보내준 아크리치 드웰 맥케인의 근원이었다.
‘사실 카람이나 올리비아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진 녀석은 아니지만, 이놈도 상당히 쓸 만한 녀석이란 말이지.’
무력이 부족해 불사의 군단 내에서 50위권의 서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제법 유능한 참모진 중의 하나였다.
2대 불사왕의 지낭(智囊)이었던 엘더 아크리치(Elder Arch-Lich)가 마지막 전투에서 소멸한 지금, 어찌 보면 가장 똑똑한 녀석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
‘했던 행동들을 보면 영 미덥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본 건 성검이 구현한 시련에서의 모습뿐이지 않은가.
아무리 성검이라도 단순히 그가 가진 힘이라면 모를까, 성향이나 사고방식 등을 완벽하게 재현하진 못했을 것이다.
‘뭐, 나야 부려 먹을 녀석이 유능할수록 좋으니까.’
한스가 한 손에 들린 결정을 향해 자신의 흑마력을 쏟아 부었다.
쩌적—!
순식간에 균열이 생기며 갈라진 신성력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발광하고는, 이내 서서히 검은 기운에 잡아먹혀 사라졌으며···.
우우웅—!
직후, 잠잠하던 아크리치의 근원이 서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흐흣! 자, 일어나거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그리고 막대한 흑마력을 가진 한스에게.
드웰이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