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귀로(歸路)
공중에 떠오른 시커먼 덩어리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뼈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척추와 갈비뼈를 시작으로 증식을 거듭한 골격은 팔과 다리, 두개골까지 만들고서야 멈추었고.
이내 깊게 파인 시커먼 눈구멍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흐으으—]
화르륵—!
뼈밖에 없는 몸에서 타오르듯 피어오르는 짙은 흑마력.
아크리치 드웰 맥케인이 온전히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근원만 남아있다면 흑마력만으로도 이렇게 빨리 재생할 수 있다니. 언제 봐도 사기라니까.’
그 모습을 보며 한스가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드웰이 곧바로 그를 향해 엎드리며 감격 어린 탄성을 토해냈다.
[오오— 불사왕이시여! 저는 틀림없이 용사에게 당한 줄 알았는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은, 신체를 잃고 근원만 남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용사의 신성력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불사왕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용사가 바로 나를 소멸시키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신전 깊은 곳에 봉인 당하는 처지가 되었을 텐데.’
그때 이후로 시간은 얼마나 지났고, 그가 어떻게 자신을 구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드웰 맥케인.]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앞에 불사왕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우웅—
그렇게 호명되는 이름과 함께 계약이 새로 덧씌워지고.
[아아— 이 드웰 맥케인, 불사왕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삼백 년 전에 이어서, 이곳에서 다시금 새로운 주종관계가 체결되었다.
그렇게 아크리치가 의욕에 불타고 있을 때, 그들의 옆에 흐릿한 인영이 일렁이더니 이내 한 여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 베일이 달린 모자와 상복과도 같은 드레스를 갖춰 입은 밴시 퀸, 올리비아였다.
[소녀, 올리비아···. 왕을 배알하옵나이다···.]
[그래, 올리비아. 갑자기 무슨 일이냐?]
[왕께서 내리신 명에 대한···, 중간보고를 드리고자 찾아왔나이다···.]
그가 올리비아에게 내린 주문은, ‘역천의 서약’에 대한 정보를 캘 수 있는 만큼 전부 캐 오라는 것이었다.
할리가 북부 산맥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린 명령이었으니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호오— 벌써?]
이어지는 올리비아의 보고.
그녀는 일차적으로 서부 지역 전체를 영역으로 두고 샅샅이 훑어나갔다.
바로 조사할 수 있는 곳은 물론이고, 결계로 차단된 곳은 드나드는 인물들을 감시하여 그 연결 고리를 추적하는 데 열중했다.
그로 인해 알아낸 놈들의 아지트만 벌써 몇 곳이었고,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늘어날 전망이었다.
[현재, 중앙의 제국 일부까지 조사 영역을 확대하였고···. 중요 거점으로 의심 가는 장소를 발견해··· 예의 주시하는 중이옵나이다···.]
벌써 중앙 지역까지 진출하다니.
역시, 무섭도록 유능하기 그지없었다.
[크흐흣— 좋구나, 좋아. 수고했다 올리비아.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소녀··· 왕을 위해, 이 한 몸 분골쇄신하겠나이다···.]
한스의 치하에 올리비아가 공손히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였다.
[올리비아 님께는 뼈도 몸도 없는데, 어떻게 분골쇄신(粉骨碎身)을···.]
[드웰.]
[···네! 불사왕이시여, 하명하소서!]
그녀의 등장에 어느새 잊혀졌던 드웰이 구석에서 낮게 구시렁거리다, 한스에게 호명받고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곧바로 네가 해 줄 일이 생겼구나. 당분간 올리비아와 함께 움직여 그녀를 도와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역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많으니 일이 편해졌다.
시키기만 해도 어지간한 일들은 알아서 다 처리할 수 있으니.
[올리비아, 드웰과 같이 놈들을 복종시켜라. 필요하다면 카람을 데리고 가도 좋다.]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적재적소, 방비가 강한 곳이면 더 강한 부하를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도 뚫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그만큼 중요한 거점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그곳은, 재림한 불사왕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
“뒤져라!”
콰직—!
할리의 커다란 주먹이 몬스터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일상적인 풍경.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주치는 몬스터들의 수는 더욱 늘어났지만, 일행에게 더 이상의 추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단 한 사람으로 인한 변화였다.
“으하하하—! 전부 덤벼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은 기묘한 파동을 머금고 주변으로 퍼져나가···.
“크워어—!”
“끼에에엑!”
몬스터들을 자극해 놈들의 주의를 온통 할리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그에게 덤벼든 몬스터들의 최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퍼억!
푸화악—!
비산하는 신체의 일부와 주변을 물들이는 혈액.
놈들은 문자 그대로 갈려 나가는 중이었다.
“···이전에도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요.”
“음, 그렇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마법사 파비엘라와 기사 로빈을 시작으로, 광범위하게 어그로를 끌고 있는 탱커의 존재 덕분에 한결 편하게 버티던 일행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졌다.
거기다 그들과 싸우던 몬스터들도 할리가 한 번씩 광소를 터트릴 때마다 그쪽으로 주의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 그 틈을 타 처치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일단 돌아가면, 아는 놈들에게 확실히 말해둬야겠어. 뒤지기 싫으면 저 인간 건들지 말라고.”
“···대놓고 말은 안 하더라도 은근히 멸시하는 이들도 제법 됐었지. 나도 지인들에게 경고해 둬야겠네. 줄초상 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괴물처럼 날뛰고는 있었지만, 할리의 외견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우람하고 폭력적인 근육과 사나운 웃음을 머금은 야만 전사 그대로.
하지만 그 결과는 전과 차원이 달랐다.
그의 주먹질은 아무렇지 않게 몬스터의 몸뚱이를 으스러뜨렸고, 손끝은 질긴 몸을 우습게 파고들었다.
빠르고 육중한 몸놀림은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부딪힌 놈들이 튕겨져 나갈 정도였으며, 그의 조각 같은 근육은 어떤 외부의 충격에도 손상 하나 없이 굳건했다.
“그런데 정말 도끼는 쓰지 않을 생각인가 보네요.”
“영 성에 차질 않는다는데 어쩌겠어. 어디 소수 교단의 몽크(Monk)들이 저렇게 싸운다고 들은 적이 있긴 하다만, 저건 뭐랄까··· 무술이라기보단···.”
“야성적이네요.”
작게 수군거리는 레인저 한스와 찰튼.
그렇게 모두가 감탄하는 와중, 혼자 그런 모습을 불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끄응.”
바로 드워프 자오닉 스틸스톤이었다.
이윽고 한바탕의 싸움이 일단락되어 다시 자리를 옮기는 와중, 그가 참지 못하고 할리에게 다가가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이봐, 할리! 내 자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최근 할리를 보며 느꼈던 위화감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게 강하면서 어째서 엘린느를 지키지 못했느냐는, 일견 타당한 의문.
그리고 그런 의혹은 이미 그가 예상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힘을 숨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럴 거면 힘을 얻은 의미가 없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변명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흠흠, 아아— 그렇군. 그렇게 느끼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내 과거와 연관이 있는 문제여서 말이지.”
“···과거?”
할리가 헛기침하며 자오닉을 비롯한 일행을 가볍게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도 별다른 기색은 내비치지 않았지만, 은근히 관심 있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떠나기 전까지 보이던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간 서둘러 이동하느라 자세한 사정을 듣지 못했던 만큼, 그들도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오닉에게 하워드를 부탁할 생각인데, 이렇게 사소한 문제로 괜히 마음에 의혹을 남겨둘 필요는 없겠지.’
거기다 여기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좋은 관계를 맺어둔다고 해서 나쁜 일은 없을 터.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시점에서 새로이 써 내려가고 있는 위대한 서사시, ‘할리의 대모험’ 7막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놈도 만만치 않았지만, 나 혼자 몸을 빼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무섭게 뒤를 쫓아오는 트윈 헤드 오우거를 비롯한 온갖 괴물들.
할리는 위기 속에서도 엘린느의 도움으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경이 된 북부 산맥 한복판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숨 돌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런, 또 몬스터들이 다가오는군.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앗, 아아—!”
“···그렇지.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모두 전투 준비를 하도록.”
그렇게 몇 차례의 전투와 휴식 그리고 이동이 계속되었다.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차분히 나아간 그들이 산맥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조금씩 진행되던 할리의 이야기도 서서히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이대로라면 죽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인공에게 날아온 총알을 막고 부서져 버린 물건처럼,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을 대신 받고 산산이 박살 난 곡괭이, 엘린느.
그리고 그 희생 덕에 기사회생한 할리는 마침내 자각했다.
“위기의 상황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 피에 잠재되어있던 무언가를. 그리고 그게 내가 실험을 당했던 이유이자, 동시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지.”
이해를 돕기 위해 ‘할리의 대모험’ 앞부분의 이야기도 함께 풀어놓았다.
사악한 흑마법사 한스에게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4막 3장의 내용도 포함해서.
물론 느긋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상당히 축약된 내용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예상외의 호응을 끌어냈다.
그저 배경 설정이 덧붙여졌을 뿐인데, 모두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강하고 유능하지만 괴짜 같은 차림을 하고 다니는 또라이에서, 여러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세상에 저항하는 전사를 보는 시선이랄까.
‘역시 캐릭터성의 완성은 스토리인가.’
단순히 독창적인 외모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야기 속에서 인물이 겪은 어려움은 시련이 되고, 발버둥은 삶에 대한 투쟁이 된다.
그 안에서 개성이 살아나 더욱 생동감이 생기고, 그것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영웅담’의 시작이었다.
“그··· 그래서?”
침을 꿀꺽 삼키며 이야기에 몰입한 자오닉.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일행의 반응 속에서 할리는 담담하게 설정··· 아니, 이야기의 마무리를 늘어놓았다.
“그래, 내 핏속에는··· 용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엘린느가 만들어준 마지막 기회 덕분에, 그것을 각성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할리가 한쪽 팔을 내밀며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팔뚝을 뒤덮은 검붉은 비늘은 그의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 용인이라니···. 드래곤도 보기 힘들어진 마당에.”
“선대 중에 용인이 섞여 있었나 보네요. 아마 삼백 년 전 대전쟁의 여파로 제대로 전승이 되지 않은 거겠죠. 그 때문에 피 안에 잠재된 힘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고.”
마법사 파비엘라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서 설정을 보완해주었다.
‘오? 그거 좋군, 채택이다.’
역시 똑똑한 친구라 아는 게 많은 만큼, 자신의 지식에 기반한 정보로 납득한 모양이다.
“위기에서 각성한 용의 피라니. 그야말로 영웅담의 한 장면이네요.”
“어쩐지 비범하다 했지.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었구만?”
그제야 할리의 강함에 대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지. 거기다 그런 마지막이었다면, 엘린느도 기꺼운 마음으로··· 크흡.”
자오닉이 장렬하게 희생한 곡괭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홀로 눈물지었다.
그리고 할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아무래도 이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지어낸 이야기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
소설가나 극작가가 될 수도 있는 재능이지만, 그것을 악용하면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보통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어휴, 그런 놈들 때문에 나처럼 선량한 사람도 피해를 본다니까.’
자신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남을 속이는 사기꾼과는 달리, 세계의 평화를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같은 취급을 하는 건 굉장히 불쾌했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이제 다 왔다. 저기만 넘으면 강철의 성채가 보일 거야.”
많고 많은 사건을 겪고, 일행은 마침내 산맥을 벗어나 인간들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
“으음, 예상은 했지만.”
언제나 굳건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강철’의 이명까지 받았던 그 높고 단단한 성채가, 곳곳이 부서지고 피와 시체로 뒤덮인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지 곳곳에서 분주히 전장을 정리하는 인간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몬스터들이 다시 들이닥치기 전에, 일단 빨리 가도록 하지.”
일행을 이끄는 책임자인 로빈의 말에 일행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서둘러 강철의 성채로 향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