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전조 (3)
“여—! 할리!”
할리가 숙소에서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을 때, 신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털보와 덩치, 칼자국의 남부 전사 삼인방이었다.
“이야— 이전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까 더 괴물이 된 것 같아?”
“타라크에서 온 용병 놈들도 그것 땜에 다들 쫄았잖어. 알게 모르게 뒷담 까던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
“덕분에 칼코스의 각인을 우습게보던 놈들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얼마나 통쾌하던지.”
역시 할리는 남부의 자랑이다, 진정한 전사의 귀감이다 등···.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를 둘러싸고 칭찬 세례를 퍼붓는 삼인방의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하하하! 고마워 친구들! 그런데 얼마 전까진 여기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결국 할리는 그들의 말을 끊으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가 구출 임무를 위해 북부 산맥에 머문 기간이 제법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들이 이제야 강철의 성채로 도착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동안은 성채 뒤쪽에 저지선을 구축하는 데에 동원됐었지. 이번에 영주가 직접 이곳으로 오면서 우리도 같이 따라왔지만.”
“여기가 요충지기는 해도 한 놈도 빠짐없이 막을 수는 없잖어. 새어 나가는 놈들도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지형 특성상 가장 최전선의 강철의 성채가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어, 몬스터들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내고는 있지만···.
그 넓은 산맥에서 밀려오는 놈들을 성 하나로 전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이번 사태에 많은 병력이 필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산맥과 경계를 마주한 부분이 아오니아 백작령밖에 없는 툴크 왕국이라 이 정도지, 북부 산맥의 중앙부 전체가 영역과 맞닿은 아제리온 제국은 지금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대응에 나설 정도였다.
할리는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실컷 떠들다,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지휘부가 있는 중심부로 향했다.
‘지금은 딱히 피곤하지도 않으니, 그냥 바로 영주를 보러 가면 되겠지.’
해야 할 일은 생각났을 때 바로바로 끝내두는 게 좋았다.
편할 때 오라고 했어도, 아마 그쪽에서도 그걸 더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데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그는 또다시 구면인 상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오랜만입니다, 할리 씨. 오늘 활약도 대단하셨다 들었습니다. 하긴, 할리 씨라면 당연한 일이겠죠.”
함께 구출 임무에 파견되었던, 지금은 이 근방의 경비를 책임지게 된 레인저 찰튼이었다.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그는 군 소속이어서 헤어진 이후 처음 만나게 된 것이었는데···.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그동안의 근황을 나눌 수 있었다.
“한스는 아직도 군 의무실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있습니다. 포션이 있었다지만 부상이 심한 상태로 무리해서 움직여 회복하는 데 상당히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레인저 한스도 일단은 큰 후유증은 없이 복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한스’의 이름을 잇는 자로서 그 정도는 이겨내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그리고 보르도는···. 가져온 유품으로 부대에서 합동 장례를 치렀습니다. 저희가 산맥에 다녀온 동안, 부대의 피해도 상당했던 것 같더군요.”
그리고 이후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그의 고향으로 유품을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보르도는 할리와는 별로 인연이 없던 이였지만, 자신이 함께한 여정에서 사망한 만큼 신경 쓰이던 것도 사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애도를 표하는 것뿐이었다.
“아, 제가 괜히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지휘부는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앞으로도 좋은 활약 부탁드립니다.”
찰튼은 안쪽의 건물을 가리키며 그에게 경례하고는,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사라졌다.
‘음, 뭔가 오늘따라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설마 또 있진 않겠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며 건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이 강철의 성채에서 만날 수 있는 지인이라고 해 봐야, 함께 산맥 내부로 향했던 용병들밖에 더 있는가.
그리고 이미 그들과는 마주칠 때마다 안부를 나누고 있었다.
“일찍 왔군. 안쪽으로 안내하지.”
하지만 그런 판단은 너무 섣부른 감이 있었으니.
‘아, 이 양반을 잊고 있었군.’
그를 맞이한 것은 함께 의뢰를 수행했던 기사, 로빈이었다.
산행을 떠났을 때의 가죽 갑옷이 아닌 멀끔한 금속 장비로 완전히 무장한 것을 보니, 확실히 기사는 기사였구나 싶었다.
“기사 나리, 그간 잘 지냈나 봐? 못 본 사이 신수가 훤해진 것 같아.”
“착각이다. 그래도 여기선 잘 씻을 수 있으니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편하게 쉴 시간도 없군. 그 고생을 하고 왔는데 곧바로 근무 투입이라니···.”
함께 고생하며 친해진 만큼 그들의 대화에는 격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가 편하게 근황을 주고받을 자리가 아니었던 만큼, 그런 대화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단 영주님께 네 성격에 대해 여러 번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태도 같은 건 좀 더 신경 써 주면 좋겠군.”
“응? 내 태도에 뭔가 문제가 있나?”
뻔뻔하게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할리.
물론 그 개성적인 몰골 때문에 괴이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최대한 공손하게··· 부탁한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예의 하면 이 몸이 아닌가? 난 새치기 한 번 해본 적 없는 몸이라고!”
물론 본의 아니게 앞 사람에게 양보받는 일이 매우 잦기는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자발적인 배려였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함부로 폭력을 쓰지도 않고 말이지!”
초창기에는 도시에서 할리가 지나갈 때마다 혀를 차며 뒷담을 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일일이 찾아가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에 그가 내세운 방안은, 따뜻하게 그들을 포용하는 것이었다.
할리의 뛰어난 오감으로 뒷담을 파악할 때마다, 그저 두 눈을 마주하며 건치를 드러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줄 뿐.
절대 폭력적인 대응은 하지 않았다.
효과는 놀라웠다.
그의 진심이 통했는지, 이후엔 그런 경우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물론 눈이 마주치니까 오히려 시비를 거는 인간들도 늘었지만,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걸린 시비를 피하는 건 상남자 할리가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먼저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으니, 이 정도면 예의범절의 화신이라고 봐도 될 터였다.
“···그래. 그래도 세운 공이 있으니 괜찮겠지. ···실력도 있으니까.”
그 당당한 주장에 압도된 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할리는 마침내 마주할 수 있었다.
“오! 자네가 할리로군, 이쪽으로 와서 앉게나.”
이 근방의 지배자인, 타르민 아오니아 백작을.
“자오닉과 로빈에게 자네 칭찬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과연 직접 보는 건 확실히 다르더군.”
이제 서른 후반에 접어든 영주는 할리의 개성적인 차림을 보고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지만, 이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에게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하핫! 이거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대가를 받고 움직인 것뿐인데. 으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 영주의 미간이 재차 꿈틀거렸다.
영주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로빈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할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존댓말을 쓴 것만으로 그에겐 충분히 노력한 것이었으니까.
‘아, 이게 할리식 예의라고. 그래도 로빈의 얼굴을 봐서 최대한 양보한 건데!’
그런 할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주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흠흠, 어쨌든. 의뢰 건도 그렇고, 이번에도 큰 활약을 해 주고 있으니 한 번 얼굴이라도 직접 보려고 불렀네. 뭔가 추가 보상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말이야.”
그러면서 그가 선심 쓴다는 듯 넌지시 제시한 보상은 영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기사 작위라니, 물론 할리의 무력을 보면 영입하려 드는 게 당연하긴 하지만···.’
그게 보상으로 선심 쓰듯 내줄 한 건 아니지 않나.
적어도 지금까지 몇 번이고 자신을 증명해 온 그에게는 그랬다.
그리고 자유롭고 거친 야생의 광전사, 할리는 이런 문제에선 굉장히 단호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아,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런 것보다, 그냥 현물로 주시는 게 어떤지?”
“그··· 그런 거? 현물?”
“그, 왜. 커다랗고 튼튼한 양손 도끼 하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쓰는 녀석은 영 부실해서 말이오!”
“······.”
말을 하다 보니 말투의 급이 슬쩍 떨어졌지만, 떨떠름한 표정의 영주는 그걸 따질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로빈은 그저 해탈한 표정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고.
“네··· 네놈! 감히 영주님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거기다 이 무슨 무례한!”
하지만 영주의 다른 기사들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응접실에 들어올 때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노려보고 있던 기사들이, 적의를 드러내며 무기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물론 할리는 그저 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아우테리카에 온 지 일 년 반이 넘었나.’
이제 짬이 찰 만큼 찬 그가, 이곳의 생리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귀족이라는 권력층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됐다. 모두 물러나.”
“하, 하지만 영주님···!”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나!”
영주의 일갈에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뒤로 빠지는 기사들.
‘지금 같은 난세에는 오로지 힘만이 전부. 그리고 할리는 그것을 넘치도록 증명했다.’
하물며 그는 지금 북부 산맥에서 범람하는 몬스터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강자였다.
한 번의 거절 정도는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
원래 좋은 인재를 얻기 위해선 삼고초려는 기본으로 고려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 도끼라고 했지? 아예 자오닉을 통해 맞춤으로 하나 만들어 주지. 자네도 만족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영주처럼.
“으하하! 감사합니다, 영주님. 역시 큰 영지를 다스리는 분답게 통이 아주 크시군요!”
“그렇지, 내가 또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네. 하하하!”
그래, 어딜 날로 먹으려고 드나.
편의도 좀 봐주고, 선물 공세 좀 하고, 여러 차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부어야만 인재를 얻을 수 있는 법이었다.
‘물론 그때가 되어서도 무조건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세상사 완벽한 게 어디 있나, 다 그런 거지.
그렇게 할리는 서북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영향력과 명성을 떨쳐 나가고 있었다.
***
“로드, 모든 조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역천의 서약 쪽에서 인계받은 정보도 교차 검증을 끝냈습니다.”
“그래? 정보에 이상은 없나?”
“네! 현재, 광기 사태로 마물의 숲을 방어하기 위해 진혈 둘이 자리를 옮긴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지금 수도 탈라리아에 남은 진혈은 많아 봐야 둘, 브로코슬락의 전 로드와 현 로드뿐입니다.”
“흐음···. 그 조심성 많은 뮬로의 판단이라고 하기엔 너무 대범하군. 새 로드의 의향인가?”
수하의 보고를 듣던 이가 잠시 입가를 매만지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정면으로 맞부딪쳐도 이길 자신이 있는데, 진혈 둘까지 자리를 비웠다라···. 이거 일이 너무 쉬워지겠는데?’
전력 차는 압도적.
브로코슬락을 집어삼킨 현 로드의 수준은 잘 모르겠지만, 성혈이 아닌 건 확실하다.
“뭐, 좋아. 그래도 일은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겠지. 다른 진혈들을 소집하고, 전투 부대를 준비시켜라.”
백발에 하얀 눈동자를 가진 사내, 비스크 유페르쉬가 자신의 앞에 조아린 수하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우리는 탈라리아로 간다.”
명실상부 대륙 최강의 뱀파이어 집단, 유페르쉬 클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