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유페르쉬 클랜 (1)
탈리아 왕국의 수도 탈라리아.
“으으—.”
최근 이틀간, 브리키의 신경은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평소처럼 브라이트 공작가 귀빈실의 침대에 누워 세월아 네월아 시간만 보내던 순간, 짧게 스쳐 지나간 어느 기척 때문이었다.
‘단순히 지나가던 건가? 그냥 우연?’
아주 찰나였지만, 그녀의 초월적인 감각은 그 불길한 무언가를 확실히 포착할 수 있었다.
감지하기 무섭게 금방 사라졌던지라 그저 착각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녀의 직감은 어느 정도 예지와도 맞닿아 있는 일종의 권능과도 같은 능력이었다.
심지어 그때의 느낌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가 이미 몇 번이나 느껴본 적 있던 기척이지 않았나.
‘지금은··· 잘 모르겠네.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데, 당장 문제가 될 것 같진 않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이전에 몇 번이나 느낀 적이 있던, 불사왕의 ‘죽음’의 기운이었으니까.
“···음?”
그렇게 한창 신경이 곤두서 있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멈칫하고, 천천히 한쪽 방향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브리키는···.
다음 순간, 이미 뮬로의 집무실 문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쿵쿵쿵—
“뮬로? 잠깐 들어가마.”
가볍게 문을 두드린 그녀가 상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브리키 님? ···어서 오십시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화도 내지 못한 뮬로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로 들어선 브리키를 보고 마찬가지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뮬로? 지금 바로 전투를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구나.”
“무슨 일입니까? 브리키 님이 이렇게 나오실 정도라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곧바로 인근의 클랜원들에게 비상 소집을 명했다.
항상 맹할 정도로 태평하던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일 정도면, 터져도 보통 일이 터진 게 아닐 테니까.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렇게 뮬로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어느새 다시 표정이 풀린 브리키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예민해져 있다가 갑작스레 느껴진 불안감 때문이라고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물론 그녀의 직감이라는 것 자체가 강한 근거이긴 했지만···.
“에이, 준비하라면 준비할 것이지 잔말이 많구나! 내가 괜한 헛소리를 할까.”
결국 그녀는 괜스레 투덜거리며 뮬로를 타박할 뿐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그녀가 바라봤던 방향인 라펠라 시가 위치한 곳에서—.
혈문(血門)이 열리고, 유페르쉬 클랜의 뱀파이어들이 빠르게 집결하고 있었다.
***
“···굉장히 불쾌하군.”
처음 라펠라 시로 넘어온 직후 내뱉은 비스크 유페르쉬의 감상이었다.
그 직후부터 그의 찡그린 표정은 풀릴 줄 모르고 있었다.
발밑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느낌에 도무지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지?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누군가가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감각으로도 그 발원지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함만 느껴질 뿐, 그가 성혈을 계승한 이후 처음으로 겪어보는 이질감이었다.
‘불길함인가? 브로코슬락의 영역에 들어와서? ···이 유페르쉬가 고작 그 정도 상대로?’
그렇게 비스크가 혼자 골몰하고 있을 무렵.
“···로드?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한창 바쁘게 휘하의 뱀파이어들을 확인하던 이가 일단의 무리와 함께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번 작전을 총괄한 클랜의 이인자, 테오도르 유페르쉬와 나머지 세 명의 진혈들이었다.
“아니, 괜찮다. 그보다 준비는 전부 끝났나?”
“예, 그렇습니다. 진혈 넷, 순혈 마흔넷. 전부 최정예들이니 브로코슬락 정도는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오직 순혈 이상으로만 구성된 유페르쉬 클랜의 최정예 부대.
심지어 이들을 이끄는 이는 성혈 비스크 유페르쉬였으니, 이 정도면 탈리아 왕궁도 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당연히 강자들도 분산된 데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심하고 있을 브로코슬락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긴말할 것 없겠지.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곧바로 탈라리아로 향하고, 오늘 내로 놈들을 깨끗이 정리한다.”
““예!””
비스크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불쾌감을 억지로 떨쳐내며 오로지 목표만을 생각했다.
탈라리아에 있을 브로코슬락의 로드를 족치는 것만을.
그리고, 그의 말이 끝마쳐짐과 동시에···.
푸드득—!
파다다닥—
수많은 박쥐 떼가 빠른 속도로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
수도 탈라리아와 라펠라 시의 중간 지점, 거기서도 수 킬로미터 상공에 시커먼 인영 하나가 부유하고 있었다.
휘오오—
어둠을 휘감은 채 밤하늘에 묻혀 오연히 지상을 굽어보는 절대자.
불사왕 한스였다.
‘움직이기 시작했군.’
브로코슬락 클랜이 암중에서 지배하는 탈리아 왕국은 이쪽에도 여러모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첫 시작을 알린 곳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는 둘째 치고, 하인즈를 통해 왕국 하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변방의 약소국이라지만, 국제적인 위상이 있는 만큼 휴버트 등이 자리한 타라크보다 더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사실.
거기다 이제 막 꾸려나가고 있는 정보 조직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니 그 중요성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크흣— 이제 시작인가.]
그것이 지금, 마도의 극의에 이른 불사왕께서 몸소 나서서 기척을 감추고 대기하는 이유였다.
위성으로 지상을 감시하듯, 「심연의 눈」으로 아래의 모든 상황을 낱낱이 살펴보면서.
‘사실 한스는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는 게 좋긴 하지.’
원래라면 이번 일은 순리대로 하인즈 2세만 개입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한스와 휘하의 언데드들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하인리히는 성지에서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다.
할리는 한창 강철의 성채에서 몬스터들과 드잡이 중이었으며, 해리스는 머나먼 에나멜 대륙에 있으니···.
‘아직 초보 장인에 불과한 하워드와 한창 요양 중인 휴버트야 말할 것도 없지.’
거기다 괜히 다른 아바타를 끌어들여 서로 연관성이 생기면 이후 운신의 폭이 줄어들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래, 그런 문제를 다 떠나서···.
당장 하인즈가 자리를 비운 틈에 집이 털리려 하는데, 가만히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도 이번에 할리에게 동업자의 피습이라는 인과관계가 생겼으니, 큰 의심을 받지는 않을 거야.’
물론 그런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의아해할 이들은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그런데···.'
한스의 시선이 탈라리아 방향으로 돌아가고, 그 눈에 할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언제 어디서나 위풍당당한 우리의 야만 전사께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수도 경비대에게 붙들려 검문을 받는 중이었다.
그 개성적인 모습에 과하게 반응하는 건 이해한다만, 이걸로 대체 몇 번째인지···.
‘교단의 소개장이 없었으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뻔했네.’
그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타라크에서도 할리를 볼 때마다 위축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하물며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말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모두를 위압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에 경계와 검문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을 시작하는 데에만 지장이 없으면 상관없겠지.’
한스는 그쪽을 가볍게 일별하고는, 다시 브라이트 공작가 쪽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저택에 뱀파이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성혈이 뭔가 눈치챘나?’
처음 이쪽의 기척을 감지한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 그 이름값대로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땐 공간을 이동한 직후라 기운을 감추는 게 완벽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의 존재를 알아챈 능력을 얕잡아 볼 수는 없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도 평소 이상으로 자신을 꽁꽁 감추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승산이 더 올라갔군. 이참에 「정제혈정」으로 강화된 녀석들의 능력을 확인해 볼 수도 있겠어. 다행히 성혈이 있어 어느 정도 균형도 맞춰진 상태니.’
성혈 ‘브로코슬락’이 언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비스크 유페르쉬에게 대항할 인선이 갖춰졌다.
안 그래도 전력이 열세인 상황인데 이쪽에 성혈마저 없었으면, 「정제혈정」으로 강화되었건 할리가 개입하건 상관없이 무의미하게 썰려 나갔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한스가 끼어들 수밖에 없었을 테고.’
어지간하면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만큼, 이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전개라 할 수 있었다.
이어서 한스의 시선이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한 무리의 박쥐 떼에게로 향했다.
성혈 하나에 진혈 넷, 그리고 마흔이 넘는 순혈이라는 무시무시한 전력이었으나.
그의 시선은 오직 그중 하나에게만 못 박혀 있을 뿐이었다.
‘···저놈인가.’
그 상대는 성혈도 진혈도 아닌 순혈이었지만, 그에겐 누구보다 특별한 상대라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놈이 바로 휴버트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어 죽음 직전에 이르게 만든—.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암살자 뱀파이어였으니까.
지금은 박쥐 상태였지만, 라펠라 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놈은 이미 한스의 눈에 제대로 각인된 상태였다.
이후에 녀석이 어디로 도망치든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서.
[크흐흣··· 복수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과실이지. 드디어 뼈에 새긴 원한을 갚아줄 때다. 너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으리라.]
한스의 집요한 시선에 그 박쥐의 날갯짓이 잠시 버벅댄 것 같았지만···.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기척을 감추고 있었으니, 아마 기분 탓일 것이다.
***
“아— 거 양반들 참 집요하기도 하지. 나처럼 선량한 시민이 어디 있다고 자꾸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수도 경비대에게 풀려난 할리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탈라리아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물론 그의 머리에는 드래곤과의 싸움으로 너덜너덜해진 것 대신 신상으로 맞춘 마수 머리가 얹혀 있었으므로, 그의 손은 질긴 가죽만 긁적일 뿐이었다.
‘어이쿠, 힘 조심해야지. 기껏 맞춘 신상인데 하마터면 가죽 찢어먹을 뻔했네.’
할리는 근육이 꿈틀거리는 굵은 팔뚝을 슬그머니 내리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뱀파이어들이 지배하는 도시답게 딱히 통금 시간도 없어서,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밤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아무래도 밤에 마음대로 활동하기엔 통금이 없는 쪽이 더 편하긴 하지.’
그는 느긋하게 새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당연히 그 지나는 사람들 또한, 할리를 구경한 건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야만인인가? 아니, 남부인?”
“와, 나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 처음 봤어.”
“무슨 근육이··· 쉿, 이쪽 본다! 눈 마주치지 마!”
이제는 그의 근거지인 타라크에서 볼 수 없던 과거의 풍경이, 이곳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부터 눈살을 찌푸리거나 혀를 차는 사람들까지.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들이 정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간만에 겪어보니 신선하군. 내 진심 어린 미소 덕에 이제 타라크에선 어지간하면 이런 일이 없는데 말이지.’
하지만 그런 시선을 거북해했다면 애초에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으흠흠!”
관심종자 할리는 은근슬쩍 벌거벗은 상체 근육과 문신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맨발로 대로를 거닐어 목적지로 향했다.
야심한 밤에 접어들어 서서히 인적이 뜸해지기 시작한 시각.
거리의 파락호들조차 슬그머니 몸을 피하는 와중,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평소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꺼림칙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브라이트 공작가의 저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