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27화 (127/284)

#127

성혈 (2)

“······.”

“에이, 별 영양가도 없네.”

할리가 괜히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세상에 꼭 뱀파이어들만 피를 빨라는 법은 없었다.

「폭식」을 가지고 있는 그도 먹는 데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몸.

그래서 진혈을 상대하며 그들의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피도 다량 강탈할 수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영 별로였다.

‘하긴, 생각해보니 할리는 이미 뱀파이어의 유전자를 충분히 얻은 상태였지.’

그중에서도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하인즈 2세의 진화한 피를 다량 섭취해, 탄생 초반부터 어느 정도의 강함을 지닌 채로 마수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평범한 뱀파이어의 피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소리.

‘진혈이면 평범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어쨌든 이 몸하고는 별로 궁합이 좋지 않네. 역시 할리에겐 몬스터 마석이 최고야.’

흡혈인자와 혈마력은 오로지 뱀파이어에게 특화된 힘이다.

그들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육체 대부분을 그와 비슷하게 변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생체력과 「생체 오러」의 효율이 떨어진단 말이지.’

필요한 유전자만 짜깁기해서 성장하는 할리에게, 일정한 틀을 유지해야 하는 뱀파이어의 힘은 제약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더 수월하게 강해질 수 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흠, 제법 만족스럽군. 확실히 진혈 정도 되니 뭔가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하인즈는 상당히 만족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진혈을 흡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 이상의 진전이 있었으니.

‘지구에서 진혈급 흡혈귀들을 포식한 적은 있지만, 뿌리가 같은 차원 출신의 피라 그런지 뭔가 다르긴 하군.’

이 정도면 에피타이저로써 별 다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았다.

곧 이어질 메인 디쉬가 기대될 정도.

물론 그 와중에 상당수의 뱀파이어들이 하인즈의 동족 포식 행위를 눈치채긴 했지만···.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감히 누가 하인즈에게 따지고 들 수 있을까.

오히려 불문율이 된 원인인 정신 오염을 이겨냈다는 뜻이니, 그에 대한 경외심과 공포만 더해질 뿐이었다.

또 그런 감정은 오히려 통치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였고.

“······.”

“흐음—? 새 로드가 어떤 아이일까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구나? 뭐라고 할까, 여러모로 대단하네!”

“칭찬 고맙군. 그쪽은 성혈인 브로코슬락이겠지?”

“브리키라고 불러주겠니? 난 이 이름이 더 마음에 들거든.”

“그래, 브리키. 난 하인즈라고 부르면 된다.”

“하인즈! 뭔가 맛있을 것 같은 이름이네. 물론 칭찬이란다.”

그리고 뜻밖의 반응을 보인 브리키 덕에, 하인즈는 그녀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 교분을 다질 수 있었다.

‘클랜을 통째로 빼앗겼으니 하인즈를 보면 적대할 거라 생각했는데.’

적대는커녕 호의적인 태도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금 처한 상황 탓에 거짓으로 가장한다고 보기엔, 예민한 두 아바타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래도 상대는 수천 년을 산 성혈이니, 일단 경계는 해 둬야겠지.’

물론 당장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파지직—!

하인즈가 슬쩍 시선을 돌려 그녀와 마주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

아까부터 썩은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 중인 백발 백안의 뱀파이어, 비스크 유페르쉬를.

“크하하핫—! 거기 형씨, 안 잡아먹으니까 표정 풀라고? 아, 물론 나만 그렇다는 거야. 옆의 이 친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구만!”

“어머, 아까도 생각했지만 참 듬직한 아이네. 하인즈, 네 친구니?”

“사업상 알게 된 관계지. 일단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아, 난 할리다! 지금은 툴크 왕국 타라크에서 활동하고 있지.”

“브리키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네.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뭘 그런 걸 가지고!”

다시 왁자지껄 시작된 수다.

연신 스파크를 튀기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브리키와 할리, 하인즈 2세가 한 사람을 둘러싼 채 정겹게 대화를 나누었다.

거기에 소외된 한 사람, 비스크 유페르쉬만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어, 이거 뭔가 한 명을 왕따하고 괴롭히는 포지션 같은데···.’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실상 먼저 공격받은 쪽은 이쪽이고 침략자는 저쪽인데도!

“흠,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 같군. 슬슬 끝낼까?”

“아— 좋지! 나도 빨리 돌아가 봐야 하니까!”

하인즈가 말하고, 할리가 받았다.

놈의 힘을 좀 빼놓기 위해 압박만 가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냥 빨리 끝내버리는 게 나아 보였다.

그렇게··· 부하들이 전부 죽거나 제압되어 외톨이가 된 비스크의 외로운 분투기가 시작되었다.

***

촤아앙—!

피로 만들어진 하인즈의 칼과 비스크의 채찍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흡!”

동시에 하인즈의 전신에 거미줄 같은 자상이 번지며 자욱한 피안개가 일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초재생」이 있음에도 극도로 저하된 재생력은 그의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고, 손실된 혈액도 평소처럼 곧바로 회수할 수 없었다.

파지짓— 촤아악—!

그리고 스파크와 함께 비스크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가, 시간을 돌린 듯 다시 날아와 붙었다.

그의 팔이 잘리며 뿜어졌던 핏물이 허공에서 날카로운 톱니바퀴 모양으로 뭉쳐, 뒤쪽에서 달려들던 할리에게 날아들었다.

맹렬히 회전하는 그것은 벼락 같이 내리꽂혔고.

콰드드득!

도중에 잡아챈 비늘로 뒤덮인 양손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하지만 갈려 나가는 손바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할리는 그것을 힘껏 움켜쥐고는—.

“크하핫!”

그대로 쥐어뜯듯이 양쪽으로 찢어버렸다.

재생력이 저하되어 손이 피투성이인 채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파지직— 푸확!

그리고 또다시 비스크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가 회복되었다.

그때, 유령처럼 접근한 하인즈가 「가속」까지 사용한 쾌속의 일검(一劍)을 날렸다.

그 일격은 갑자기 나타난 피의 장막에 가로막혔으나, 그것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곧바로 따라붙은 할리의 일권(一拳)이 그 중심을 강타해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부서진 장막의 구멍으로 쏘아져 들어가는 하인즈의 피의 칼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 연계는, 그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상대하는 비스크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초월적인 반사 신경으로 겨우 그것을 쳐내긴 했으나, 다시 스파크와 함께 그의 오른쪽 눈이 터져 나갔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그랬듯이.

“크아아! 일대일 싸우면 별것도 아닐 버러지들이! 더럽게도 나오는구나!”

“어머나—?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냐고 했던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그분은 집에 가셨나?”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 브리키가 생글거리며 재차 속을 뒤집었다.

그가 뭔가를 할 때마다 몸이 파괴와 수복을 반복했고, 그것이 이어질수록 간격은 점차 더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앙—!

“커헉!”

“으하핫! 드디어 한 방!”

할리의 주먹이 그 몸에 닿기 시작하고.

촤아악!

“과연, 몸이 베이는 와중에도 혈액을 전부 회수하다니. 성혈이라 할 만한 혈액 통제력이군. 탐나는데.”

하인즈의 칼날이 그의 몸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쯤 되어선 장시간의 싸움에 지친 브리키도 견제 이상은 하지 못했지만, 몇 차례나 타격을 받은 비스크의 상태는 그녀보다 더했으니 상관없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더 지난 후.

끝내 모두가 예상했던 마지막이 다가왔다.

“아, 안돼···. 난 모든 뱀파이어의 왕이 될 몸이다! 여기서 이렇게 스러질 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원통하게 외치는 비스크 유페르쉬와.

“걱정하지 마라. 그 의지, 내가 이어가 주지.”

강제로 의지를 빼앗아··· 아니, 승계하려는 하인즈 2세가 마주했고.

“이제 내가 뱀파이어의 왕이다.”

콰직!

“크읍!”

기어코 한 쌍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스크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크으··· 오만하구나, 브로코슬락의 로드여. 정당하게 절차를 거쳐 성혈을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동족 포식으로 강제로 빼앗겠다고···? 그것도 다른 클랜의 성혈을?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하지만 목을 통해 순식간에 피가 빨려 나가기 시작했음에도, 그는 여유를 가장하며 상대를 조롱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넌 나와 함께 죽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성혈을 이으려 시도했던 무수한 이들처럼!”

이미 반항할 힘도 사라져버린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하인즈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전대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최대한 위험 요소를 없애고 도전한 비스크 자신도, 수많은 목숨의 위기를 겪고서야 운 좋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정신 오염을 버티고 동족 포식을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건 정신 오염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격이 되지 않는 자는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의식이었으니까.

그러니 놈도 얼마 가지 못하고 죽어 나자빠져 버릴 것이다.

쭈우웁—

그래야 했다.

···그랬어야 할 텐데?

‘왜··· 아직도 멀쩡하지?’

그는 벌써 상당량의 피를 흡혈 당해 점점 눈이 무거워지고 있는데, 아직도 상대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무아지경에 빠진 듯 정신없이 그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푸스스—

이윽고, 비스크는 자기 신체의 말단이 서서히 재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정신마저 흐릿해져 사고가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아, 아아— 설마. 이놈이, 이 자가··· 정말로 다른 클랜의 성혈을 계승할 수 있다고···?’

그렇게 그는 몸에서 모든 힘이 빨려 나가고, 몽롱해진 정신 상태에서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 의지, 내가 이어가 주지. 이제 내가 뱀파이어의 왕이다.

그 말엔 한 치의 허세도 없었다는 것을.

사실 그도 왕을 꿈꾸고 그것을 자칭하기는 했으나, 자신에게 그것이 불가능하리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최대로 쳐줘 봐야 억지로 올라선 식민지 총독 정도가 한계겠지.

한데···.

성혈이란 한 혈맥의 시조이자 원형으로, 정당한 절차 없이 찬탈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혈맥의 구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후우— 아, 그리고 유페르쉬 클랜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들도 브로코슬락과 함께, 내 아래에서 계속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흡혈을 마치고 목덜미에서 입을 뗀 하인즈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로선 조롱하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비스크는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다.

‘모든 클랜을 하나로 묶어··· 뱀파이어를 일통할 구심점. 우리를 양지로 이끌어 줄, 유일한 왕···.’

그가 그저 막연히 동경하기만 하던, 뱀파이어의 왕으로서 출사표를 던지는 선언으로!

그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는 와중에도 조용히 전율했다.

왠지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허탈함 때문인지, 기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이젠, 그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조차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 유페르쉬 클랜의 로드, ‘비스크 유페르쉬’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뭐지? 갑자기 기분 나쁘게 왜 웃는 거야? 아직 뭔가 남은 수작이 있는 건가?’

물론 실컷 저주를 퍼붓던 그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죽음을 받아들이는 광경은, 그저 하인즈에게 찝찝함만 안겨줄 뿐이었지만.

‘뭐, 클랜의 명맥을 유지해준다는 게 기뻤나 보지. 아니면 죽음 직전에 인생무상이라도 깨달았던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그의 눈앞에 떠오른 문구와 함께 몸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상격(上格)의 피를 흡혈했습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흡혈인자가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미 유페르쉬 클랜의 인자는 습득한 만큼, 흡혈인자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탈피하듯 내재한 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여파는, 이전까지 느꼈던 그 어떤 진화보다 격렬했다.

‘크으— 이거, 진짜 「혼혈진화」가 없었으면 어이없이 죽어버렸겠는데?’

흡혈한 피를 통해 전해진 ‘유페르쉬’의 막대한 업과 격이 그의 몸을 터트릴 듯 팽창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억지로 끌어와 흡혈인자를 진화시키는 양분으로 쓰고 있는 것이 바로 「혼혈진화」.

비스크가 죽기 전에 했던 생각처럼 그가 왕의 운명을 타고났다거나, 특별한 핏줄이라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여러 스킬의 도움으로 억지로 진화를 이어가고 있을 뿐.

하지만, 결국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피의 일족 (진혈眞血)」이 「피의 일족 (성혈聖血)」로 진화합니다.》

그렇게 마침내 극한으로 진화했던 하인즈 2세의 흡혈인자가 그 한계를 넘어서고.

아우테리카에 새로운 성혈의 뱀파이어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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