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29화 (129/284)

#129

막간 (1)

“그러니까, 투레일 상단에서 역청탄의 대금 지급을 미뤄달라고 했다?”

“예, 예···.”

“그리고 넌 그걸 고대로 받아들였단 말이고?”

“하, 하지만 그냥 허락한 건 아닙니다! 제대로 연체 기한에 따라 이자도 지급받기로 했고, 이후 거래부터는 이쪽의 비율을 좀 더 높일 수···.”

“쓰읍,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이자? 이후 거래?”

휴버트 상회의 상회주 집무실.

작달막한 키의 드워프가 한 상인의 앞에서 노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업무 보고를 위해 들어온 몇몇 상인들이 그 추상같은 기세에 눈치만 살피는 와중, 한창 씩씩거리던 하워드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후우, 역청탄이 제련에 필요한 물건이라는 건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지금 위쪽 상황이 어떤지도 잘 알 테고.”

“···네.”

“그걸 아는 인간이! 이 전시에 군수 물자나 다름없는 물건을 넘기면서, 뭐? 이자? 이자아~?”

하지만 그의 차분한 태도는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고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철은 무기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고, 역청탄은 양질의 철을 생산하는 데 꼭 필요한 연료였다.

무기의 생산량이 급증한 전시인 지금 판로야 찾으려면 얼마든 찾을 수 있다는 소리.

그런데 대금을 지급받지 못해 자금이 동결되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가져온 것이, ‘통상적인 이자’와 ‘이후의 기약 없는 양보’라는 말이었으니···.

그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인이라는 놈이 그런 기본적인 걸 몰랐을 리는 없고.”

붉어진 얼굴로 분노를 토해내던 하워드가 다시 조용히 읊조리며, 고개만 조아리고 있는 상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저 평범한 드워프 장인에 불과할 터인 하워드의 기세가 조용히 공간을 집어삼키며, 숨쉬기도 힘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거, 아무래도 휴버트가 자리를 비운 틈에 딴 주머니를 차려고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아, 아닙니다! 그건 오해십니···!”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겠지.”

“자··· 잠시만요! 하워드 님! 잠깐만 제 얘기를···!”

결국 그의 신호를 받고 들어온 경비들이 그 상인을 연행해 가는 것을 끝으로, 집무실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뭣들 해? 시간 없으니 빨리 다음 사람 보고해!”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 불편한 자리는 마침내 모든 상인의 보고를 들은 하워드가 업무 지시를 내리고서야 마무리되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정말 중요한 일 아니면 재량껏 처리하고 추후에 보고하도록!”

그렇게 휴버트 상회 소속의 상인들은 일을 마친 하워드가 사라지고 나서야 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아— 꼭 상회주님과 같이 일하는 기분이 드는군.”

“자네도 그렇게 느꼈나? 처음엔 웬 처음 보는 드워프를 상회주 대리랍시고 앉혀 놓았나 싶었는데···.”

저마다 수군거리며 자리를 옮기는 휴버트 상회의 상인들.

갑작스러운 사태로 휴버트가 자리를 비우고 하워드가 상회주 대리를 맡게 되었다고 했을 때, 당연히 그들은 반발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생소한 드워프가 난데없이 머리 꼭대기에 앉게 된 상황이었다.

능력이 증명되지 않은 이가 운영에 사사건건 개입한다는데, 지금까지 상회를 일궈왔던 상인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따를 수 있겠는가.

물론, 갑자기 들이닥친 할리의 근육 앞에서 그런 기색을 내비치는 멍청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음··· 그래도 확실히 상회주님과 연락이 되고 있긴 한가 보더군. 업무 지시도 그분이 직접 내렸을 법한 내용들이었고.”

“사실 나도 걱정하던 부분이긴 했네. 상회주님이 모습을 감춘 것부터, 전부 무슨 음모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일단 지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아.”

공동 대표나 다름없는 할리가 직접 대리로 임명한 만큼 일단 하워드를 따르기는 했으나, 상인들은 그의 행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혹시 이 모든 게 상회를 가로채려는 누군가의 수작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그는 상회를 평소처럼 유지하기 위한 노력만 할 뿐, 이권이나 자산을 빼돌리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신의 개인 공방에 이런저런 물자들을 공급하는 정도가 다라고 할까.

물론 그건 처음부터 휴버트가 허락했던 사항인 만큼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카올 그 친구, 정말 투레일 상단에게 뒷돈을 받은 건가?”

“끄응— 아직 속단할 단계는 아니지만, 확실히 미심쩍긴 했지.”

“참, 겁도 없군.”

“그러게나 말일세.”

상인들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배의 선장이 사라진 상황이었으니 욕심이 나는 건 이해한다만, 그것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말 그대로 겁도 없는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그 ‘할리’가 직접 경고까지 한 마당이지 않은가.

최근 타라크 상계의 우선 목표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강철의 성채로의 보급이었다.

당연히 그쪽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고, 근래 최고의 화제는 단연 그의 괴물 같은 활약이었다.

‘거기다 타라크 치안대가 대놓고 상회 주변을 수시로 순찰하며 신경 쓰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여기서 경거망동하는 건 멍청한 짓이지.’

물론 그 카올도 어느 정도 눈치를 보긴 했는지, 직접 자금을 횡령하진 않고 나름의 변명을 준비한 것 같기도 했으나···.

그건 하워드의 말마따나 그를 무시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앵무새처럼 상회주님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단 말이지. 거기다 그 숨 막히는 카리스마까지···. 이거, 나도 뭔가 놓친 게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해 봐야겠어.’

결국 진심으로 승복하게 된 상인이 다시 자신의 업무를 확인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휴버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하워드의 노력과 할리의 영향력으로 상회는 순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

“에잉, 이거 빨리 휴버트가 와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아까워. 하지만 그렇다고 상회에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워드는 연신 투덜거리며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상회의 일을 끝마치고 곧장 향한 곳은 인근에 마련한 개인 공방이었다.

피치 못할 상황으로 일단 상회의 업무도 병행하고 있긴 하나, 그의 원래 목표는 시차를 활용해 지구의 지식을 최대한 빨리 몸에 때려 박는 것이었다.

물론 지구와의 시차를 생각하면 업무 처리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고,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공방에서 보내고 있긴 하지만···.

기초부터 다져나가는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또 아무리 시간 배율이 열 배나 차이 난다고 해도, 단순히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체득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같을 리 없으니까.’

그것 때문에 처음 예정했던 매일의 할당량이 상당히 밀린 상태였다.

그걸 메우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

“엣흠! 그럼 오늘의 작업을 시작해 볼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온 하워드가 가볍게 몸을 풀며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화로로 다가갔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변함없이 열기를 유지하고, 화재 위험에 대한 안전 설비도 되어있는 마법 화로.

돈을 아낌없이 퍼부은 덕에 이 공방 곳곳에는 이런 편의를 위한 마법이 상당히 많이 적용되어있었다.

오직 그가 기술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흠, 온도를 더 올려야겠는데.’

화로를 향해 슬쩍 손을 뻗는 것으로 온도를 체크한 하워드가 능숙한 동작으로 석탄 한 무더기를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높아져 가던 열기는 그가 원하는 최적의 온도에 다다르고서야 서서히 안정되었다.

‘딱 적당하군.’

본격적인 실습에 돌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에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인간이랑 감각이 다르긴 하단 말이지. 이렇게 차이가 심하니 장인의 종족이라고 불릴 수밖에.’

인간이었다면 무수한 세월을 통해 경험으로 습득해야 했을 일을, 드워프는 그저 본능으로 행할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불의 온도를 소수점 단위로 맞출 수 있었고.

석탄을 손에 쥐고 무게와 입자를 가늠하면, 이것이 불에 들어갔을 때 온도가 얼마나 올라갈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망치를 쥐었을 때 자연스레 느껴지는 최적의 무게 중심과, 손끝에서 생생하게 전해지는 재료의 특성 또한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태생적으로 섬세한 손재주와 강인한 신체까지 갖췄으니, 인간 장인과는 출발선부터가 아득히 차이 날 수밖에 없었다.

동일선상에서 경쟁하라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할 정도로.

‘뭐, 이번엔 내가 드워프인 입장이니 다행이지만.’

이런 메리트도 없이 바닥부터 성장해야 했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다시 한번 곡괭이 엘린느와 그것을 기꺼이 내어준 자오닉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으흠흠! 일단 가볍게 철광석 제련부터 시작해야겠군!”

하워드는 공방 한쪽에 쌓여있는 역청탄과 석회석 등의 재료를 챙기며 오늘도 열심히 수련을 이어갔다.

극한의 집중력 속에서 지구에서 전해지는 지식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뇌리에 각인되었고.

사진과 동영상, 문서 등 온갖 매체로 가공된 정보들이 하워드의 손끝에서 재현되며 그의 피와 살이 되었다.

깡—! 까앙—!

그렇게 아직은 관심을 두는 이도 별로 없는 작은 공방에서, 한 사람의 장인이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었다.

***

따뜻한 빛이 주변을 감싸며 침대에 골골거리며 누워있는 휴버트에게 스며들었다.

치유의 힘이 담긴 「아우테리카 성법」이 육신의 회복을 도우며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생각보다 회복이 빠른데? 며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앞으로 하루면 운신할 수 있겠어. 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군.’

「즉사 면역」으로 치명상으로 경감된 피해의 호전이 생각보다 빨랐다.

하인리히의 회복 성법과 「초회복」의 시너지가 상상 이상이었던 것.

사실 내가 예상 회복 기간을 길게 잡았던 이유에는 이전 하인리히 때의 경험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극한의 단련을 통한 강건한 육체, 신성력과 축복의 보호, 공용 스킬인 「초회복」까지.

이런 극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던 하인리히가 불사왕 한스와의 싸움 직후, 로셀리아 대신전이라는 최고의 환경에서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정양해야 했다.

자연스레 「초회복」만 제외하면 신체 조건도 떨어지고, 받는 치유 성법의 수준도 떨어지는 휴버트의 회복 기간은 그만큼 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인리히의 상대가 무려 불사왕이었다는 점을 간과했던 거지.’

같은 치명상이라도 그 수준이 차원이 달랐다.

극악한 저주에 찌들어 제대로 회복할 수 없었던 하인리히와 달리, 휴버트는 깔끔하게 심장과 내장이 짓뭉개졌던 것뿐이지 않은가?

‘아니, 그것 자체는 더 심각한 게 맞긴 한데···. 그래도 「즉사 면역」 덕에 결과적으론 내장이 많이 상한 정도로 그쳤으니까.’

그리고 그런 부상은 「초회복」과 신성 치유의 연계로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다음 전송진의 쿨타임이 돌아오자마자 휴버트를 아우테리카로 보낼 수도 있을 정도로.

“음, 휴버트가 가고 나면 다시 저 지루한 작업을 내가 해야 할 텐데···.”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누운 채 손가락만 움직여 태블릿을 조작하는 휴버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것은 하워드에게 야금술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일단 읽기만 하면 ‘이해’는 하워드의 머리가 한다지만, 그 과정 자체가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멍하니 앉아서 그 방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작업이 재밌을 턱이 없었다.

‘아바타로는 「마인드 허브」로 그런 감정을 여과할 수 있어 기계적인 반복 작업도 상관없지만, 난 그저 순수한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입장이라.’

물론 여러 번의 강화를 통해 내 정신력도 이미 인간을 초월한 상태긴 했으나, 그 사실을 뚜렷이 체감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동시에 움직이는 몸이 여덟 개란 말이지.’

그것도 휴버트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정신력 소모가 극심한 녀석들뿐이었다.

거기다 차원 시차에 대한 적응은 물론, 「마인드 허브」가 주가 된다고는 하지만 정신 오염을 막는 데에도 약간씩은 소모되니.

정신력이란 자원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처지였다.

‘역시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나에겐 그를 위한 돌파구도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고유스킬을 강화해 새로운 분신을 만드는 것.

역시 「아바타」가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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