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막간 (4)
고요하게 침잠한 마음속에서, 세상의 고동이 느껴진다.
두근두근—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선선하게 부는 바람, 포근하게 감싸 안는 대지,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는 식물 등.
모든 자연물에서 맥동이 느껴지고, 그것은 자신과 동화되어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수줍게 피어오른 한 떨기 꽃송이도, 그것을 장난스레 간질거리고 지나가는 잔잔한 순풍도, 그 옆에서 그저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도.
내 안에서 그것은 다른 객체가 아니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
바람이 분다. 지금은 내가 바람이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지금은 내가 나무였다.
강물에 떨어진 나뭇잎이 아래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강이었다.
나는 대자연 그 자체였으며—.
-내가 곧 세상이었다.
“으허엇—? 쓰읍!”
나무 그늘에 누워 꿀잠을 자던 해리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입가의 침을 빨아들였다.
‘아··· 잠깐 누워 쉰다는 게 그사이 잠들어 버렸구나. 그런데 이게 무슨 개꿈이야?’
전신에서 느껴지는 나른한 탈력감에 그는 맹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잠은 계속해서 자 왔고 꿈도 가끔 꾸기는 했지만, 이런 이상한 느낌의 꿈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게 단순한 개꿈만은 아닌 듯했는데···.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자연 친화」가 특수스킬「자연 동화」로 진화합니다.》
잠에서 깬 그의 눈앞에 난데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음?”
당황한 해리스는 그 자리에서 눈만 끔벅거렸다.
물론 그간 꾸준히 수련은 해 왔다지만, 설마 낮잠을 자다가 스킬이 진화하다니.
타이밍이 공교롭기 그지없었다.
‘하긴, 드라샤에 온 직후 줄곧 세계수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니 슬슬 성장할 때도 됐지.’
다만 이렇게 스킬이 진화한 것에도 소소한 부작용은 있었는데.
‘···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귀찮아. 안 그래도 귀찮은데 더욱더 격렬하게 귀찮아···!’
자연으로의 몰입이 전보다 훨씬 더 심해지면서 나태함도 그만큼 증가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이상으로 친화력과 자연력이 급증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평범한 이는 일상생활조차 이어갈 수 없을 수준이었다.
만약 해리스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자기가 강해진 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대로 자연의 품에 안겨 하나가 되는 것을 선택했을 정도로.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자연사(自然死)인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끄응—.”
해리스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드러누워 대지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몸뚱이의 욕구를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정신력이 소폭 증가하긴 했지만, 아직 이 정도는 다른 아바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사왕의 심장과 심연의 죽음을 품고 있는 한스.
온갖 차원의 흡혈귀 피를 빨아들인 하인즈 2세.
주신과의 통로를 상시 유지 중인 하인리히.
괴물의 유전자와 심연의 광기를 받아들인 할리.
소모량만 따지면 이 다른 개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압도적이었으니까.
그저 신경 써야 할 점이 약간 늘었을 뿐이었다.
‘어디 보자, 아직 집합 시간까진 제법 여유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이번에 얻은 걸 시험해 볼까?’
해리스는 슬쩍 시간을 가늠하며 왼손에 쥐고 있던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 ‘테미스’를 추켜올렸다.
이 숲은 드라샤 아카데미에 포함된 수련 부지로, 조금 전까지 그가 계속 사용하던 곳이었으니 훈련을 이어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잠깐 쉰다고 누웠다가 깜빡 잠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스킬이 성장했으니 절대 농땡이를 피운 건 아니었다.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성과로 증명하리라!
“후우—.”
해리스의 심호흡과 함께 휘몰아친 바람이 그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광룡의 심장」을 통해 할리가 강제로 일으켰던 폭풍과는 달리, 이 바람은 조금의 강제성도 없이 발생한 자연 현상이었다.
자연 현상이라 해도 과학 이론과는 한참 동떨어졌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었다.
그리고 그 법칙에 속해 자연 그 자체인 존재들이 있었으니.
파지직! 화르륵—!
휘이잉! 우우웅—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이 바로 그들이었다.
번개의 정령 와트, 불의 정령 칼리, 바람의 정령 파스칼, 소리의 정령 데시벨.
그와 계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빠르게 성장해, 기어코 전부 중급에까지 오른 사랑스러운 그의 동반자들이었다.
‘그럼, 최대 출력으로 가 보자.’
힘을 끌어올리자 서서히 자연력이 해리스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령술」로 이끌려 나온 정령들이 「세계수의 아이」로 한껏 증폭된 그의 기운을 머금고 존재감을 부풀려 나갔다.
여기까지는 이전과 같았지만···.
우우웅—
그의 오른손이 빈 활시위를 잡아당기자, 주변의 자연력이 빨려 들어가 뭉치며 한 대의 화살이 빚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전과는 달리 매우 빠르고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주변의 기운을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인가.’
「자연 동화」의 힘을 빌리자 마치 한계는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자연력이 응집하기 시작했지만, 겨우 스킬 하나로 정말 한계가 없어졌을 리 없었다.
“해리—! 스···?”
그때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익숙한 기척이었던 만큼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끌어모으고, 뭉치고, 기존 화살에 합친다.
그 단순한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기운을 응집하는 것이 조금씩 버거워져 슬슬 포기하려던 찰나.
왼손에 들린 테미스에서 퍼져 나온 부드러운 기운이 해리스와 주변의 기운을 한데 어우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오른 손목의 ‘하이 엘프의 팔찌’까지 은은한 빛을 내며 거기에 동조했다.
‘···이 정도면 됐다!’
처음 예상 이상으로 밀집된 자연력의 화살.
그는 그것에 마지막 공정을 추가했다.
파지지직!
화살대에 깃드는 번개의 정령.
화르륵—
화살촉에 깃드는 불의 정령.
휘우우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바람의 정령과 소리의 정령까지.
“~~♪”
거기에 더해, 해리스의 가벼운 콧노래 소리와 함께 「요정 사법」으로 쏘아진 화살이—.
——!
어떤 소음도 없이, 빛살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족히 1킬로미터는 넘는 과녁에 명중한 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푸화아악—!
뒤늦게 휘몰아친 후폭풍이 수풀과 그의 머리칼을 어지럽혔지만, 해리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짝이는 눈으로 먼 곳의 과녁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거 생각 이상인데? 스킬만으론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역시 아이템빨이 좋긴 좋아?’
거기다 바람의 정령을 공격력 증폭에 이용하지 않고 공기의 유동을 억제하는 쪽으로 응용하면, 좀 더 은밀하고 완벽한 저격까지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고수끼리의 싸움에선 기운의 유동을 감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그것도 「자연 동화」를 사용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해리스가 완전히 초토화된 먼 거리의 마법 과녁을 바라보며 새로운 힘의 효율성에 대해 판단하고 있던 차.
“해리스! 방금 그건 뭔가요! 어떻게 한 거죠?”
갑자기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감상을 일깨웠다.
“언제 또 이렇게 강해진 거예요! 웬일로 안 자고 훈련하고 있었다 싶더니!”
아까 기운을 통제하는 데 전념하느라 무시했던 이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조잘거리고 있었다.
슬쩍 활을 내린 해리스가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런데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집합에 늦지 않으려면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한다고요?”
청발에 청안을 한 엘프 여성, 샤피론 실베스티.
그녀가 평소처럼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아니, 그냥 얼굴 빼고 전부 평소와 다르잖아?’
익숙한 상대의 익숙하지 않은 모습.
튼튼하면서 편안해 보이는 여행복과 신발, 활동성을 위해 단단히 올려 묶은 머리칼, 등의 배낭과 몸 곳곳에 달린 장비들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여행자 복장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음, 샤피론 양? 필요한 물자들은 사절단 차원에서 준비할 테니, 개인 소지품 정도만 챙기면 된다고 들었는데. 그건 대체···.”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츠의 앞뒤 굽은 물론 몸 곳곳에 금속이 덧대진 복장은 전투용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고.
허리는 물론 어깨와 다리 등 곳곳에 휘감긴 벨트에는 이런저런 물건과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 이곳저곳이 불룩한 걸 보니, 옷에 숨겨진 비밀 주머니도 상당히 많은 모양이었다.
거기에 물건을 가득 채워 넣어 전혀 비밀이 아니게 된 건 차치하더라도.
‘거기다 저 배낭, 아공간 마도구인가? 심지어 제법 대용량인 것 같은데, 그걸 메고도 짐이 저렇게 많다고?’
그 가냘픈 체구를 완전히 덮고도 남을 커다란 배낭이 그녀의 등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치 오지 탐사라도 가는 것처럼 완전 무장한 모습.
해리스는 자신의 옆에 놓인 단출한 배낭 하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간단한 옷가지와 몇몇 여행 물품이 들어있는 것이 전부인 가벼운 짐이었다.
“후후후, 무슨 소릴 하시는 거죠?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항상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했던 건 해리스잖아요.”
샤피론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코밑을 슥 훔쳤다.
함께 사절단에 포함된 후, 그녀가 이온 대륙에 대한 조언을 구해 온 적이 있었다.
대가로 세계수의 이파리로 만든 최고급 찻잎을 제시하면서.
그래서 다른 대륙에 간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한 그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좀 과하게 먹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용병이라는 입장에서 사건을 풀다 보니, 조금 과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거 보세요! 힘들게 구한 건데, 이것만 있으면 갑자기 지반이 무너져 지하에 매몰되더라도 장시간 견딜 수 있을···.”
그녀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연신 콧바람을 내쉬며 자신의 준비성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흥분한 얼굴로도 눈 밑의 다크서클은 숨길 수 없었는데, 아무리 봐도 충분히 수면을 취한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소풍 전날 잠이라도 설친 아이처럼.
“그리고 여기 있는 것들은 비상식량이에요. 보존기간을 극도로 끌어올려 몇 년이고 버틸 수 있게 만든···. ···아, 혹시 무게가 걱정인가요? 걱정 마세요! 배낭은 물론, 모든 장비에 경량화 주문이 걸려있어서···.”
해리스는 쉬지 않고 조잘거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샤피론은 수도 드라샤를 벗어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첫 외유가 단순히 수도를 벗어나는 것도, 엘븐 킹덤을 벗어나는 것도 아닌 대륙을 벗어나는 원정인 것이다.
‘많이 기대했나 보네.’
그렇게 멍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그의 시선을 눈치챈 듯 말을 멈추고 씨익 미소 지었다.
“훗, 과연 해리스.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얕볼 수 없다니까?”
“···?”
“이 옷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예요! 엄마···, ···어머님을 졸라서 받은 드라이어드 실크를 기반으로 해서 드워프에게 의뢰한 희귀 금속을···.”
곧바로 다시 신난 듯이 입을 여는 샤피론.
최근 함께하며 제법 친해진 덕일까, 까칠하기만 했던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였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자자, 빨리 이리 오세요!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건가요? 이번엔 다른 나라 사절단과 함께 이동하는 만큼, 정말 늦으면 안 된다고요?”
정신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녀가 시간을 보고 화들짝 놀라 해리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재촉했다.
그리고 그가 챙겨 든 단출한 짐가방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해리스, 짐이 너무 간소하지 않나요? 아무리 당신이 베테랑이라지만···. 음, 뭐 제가 만약을 대비해 모든 물건을 이인분씩 챙겼으니 상관없겠죠! 우후후, 그런 상황이 오면 절 의지하도록 하세요!”
그리곤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며 앞장서서 집합 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자, 가도록 하죠.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해리스는 자신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보이면서도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뜬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라포리의 ‘숲의 길’로 이동한 후에 곧바로 신전의 게이트를 이용할 테니, 저렇게 챙겨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을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흠흠~♪”
등에 멘 배낭을 덜렁덜렁 흔들며 콧노래를 부르는 샤피론.
‘뭐, 기분만이라도 내게 해 주자. 그것이 신사이자 어른의 도리니까.’
그것이 그들이 이온 대륙으로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이 로셀리아 대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가 준비한 물건들을 사용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