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대륙 정상 회의 (2)
“로셀리아 대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포리 님, 세실리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좋지 않은 일로 마주하게 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성녀님.”
“안녕하세요, 성녀님?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 세실리 그랜우드입니다.”
이곳을 떠날 때는 조금 특별할 뿐이었던 엘프 소녀가, 이제는 어엿한 하이 엘프가 되어 정식으로 성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 왠지 모를 뿌듯한 감상에 젖은 리에스타가 반갑게 세실리를 맞이하며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사실 외양과는 반대로 나이는 엘프인 세실리가 더 많았지만, 그건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하하. 저도 저번 일이 마지막 대외 업무가 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라포리가 멋쩍은 듯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이 일이 워낙 중요한 사안이었던지라 라포리가 직접 나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드라샤에서 한창 교육에 매진하고 있어야 할 세실리까지 사절단에 참가한 건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는데, 이는 다시 이온 대륙으로 가고 싶다는 본인의 강한 의사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렇게 대륙을 건널 기회가 자주 오진 않을 테니까. 이참에 할리 님께 제대로 보답 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겠지.’
그리고 엘븐 킹덤의 지도부도 그녀의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
사절단 자체는 그리 위험하지도 않고, 이 또한 교육의 일부로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었으니.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인리히 님께서 성자가 되셨다죠? 그때도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 느꼈는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역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후후후··· 성자님께서도 여러분을 보시면 반가워하실 겁니다. 지금은 대신전의 방비 상황을 다시 살펴보시느라 바쁘시지만요.”
그렇게 오랜만에 성사된 만남은 한창 다른 이들을 맞이하느라 바쁜 성녀의 일정으로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머물 숙소로 안내되는 엘븐 킹덤의 사절단.
순탄하게 이어진 일정에 모두가 만족했지만, 그 중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한 이가 하나 있었는데···.
“뭐··· 뭐죠? 전 실망 따윈 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해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몸에 두른 벨트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다, 당연히? 이만한 대규모 사절단인데 도중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죠? 이건 말 그대로 만약을 대비한 거니···.”
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지만, 샤피론은 작은 목소리로 열심히 설득력 없는 변명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도 여기선 모른 척해 주는 게 어른의 도량이겠지.’
해리스는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봐 주었고, 그건 귀엽다는 눈빛으로 연신 이쪽을 흘깃거리는 라포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만, 옆에서 말리지 않은 그 또한 공범이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속속 대신전에 도착하기 시작한 여러 세력의 사절단들.
물론 불참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사실 이렇게 큰 판에서 빠진다는 건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당연하겠지만.’
괜히 대륙 ‘정상’ 회의가 아니었다.
일이 성사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드는 상황에서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거기다 게이트라는 편리한 이동 수단도 있으니 촉박한 시간이라는 점은 아무런 방해 요소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큰 문제 없이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대륙 정상 회의’의 날이 밝았다.
똑똑—
곳곳에 배치된 성기사들로 철통같이 지켜지는 로셀리아 대신전의 심처.
평소 이상으로 번쩍거리는 갑옷을 차려입은 하인리히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리에스타 성녀님? 하인리히입니다. 이제 회의장으로 가셔야 하는데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네! 곧 나갈게요!”
대답이 들려온 직후, 문이 열리며 격식 있는 예복을 갖춰 입은 그녀가 수행하는 여사제들과 함께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무래도 공적인 자리다 보니 여러모로 신경 쓸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 긴장한 것 같군. 하긴, 이렇게 큰 자리는 처음이겠지.’
굳은 얼굴로 뻣뻣하게 그의 앞으로 다가온 리에스타.
사실 그간 주신교단의 얼굴로서 대외 활동을 해왔다고는 해도 그녀는 이제 고작 19세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만한 규모의 행사 또한 처음이었고,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녀처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정 조절의 달인, 하인리히는 단 한 점의 마음의 동요도 없었지만.
그는 그녀의 긴장을 모른 척하며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
“이번에 상당히 여러 곳에서 왔더군요. 전 이렇게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성녀님께선 이미 이런 경험이 많으시겠군요?”
“그··· 크흠, 그렇죠. 제가 성녀가 된 것도 7년이 넘었으니까요.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익숙한 편이긴 한데···.”
“또 이게 전부 그동안 성녀님께서 백방으로 노력하신 덕분 아닙니까? 각지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고생하신 끝에 마련된 자리니,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그건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성자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요즘 줄곧 성지 보안 상황을 점검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수행원들과 함께 회의장으로 이동하는 와중,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자 서서히 성녀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평정을 유지하게 해 주는 성법도 있는 만큼, 그녀가 긴장했던 이유는 오로지 심적인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간 이런 상황에서 성녀란 교단의 얼굴이며 대표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하인리히라는 성자도 함께 있으니, 혼자 그 부담을 짊어질 필요는 없단 말이지.’
성녀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태평한 태도의 그와 대화를 나누며 점점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듯했고, 회의장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이 이미 몇 번이고 살펴보셨을 텐데, 성자님까지 나서서 여러 번 보안을 점검하실 필요가 있었나요? 거기다 예복이 아니라 갑옷까지 차려입으시고.”
“저는 성기사이자 불사왕과 직접 맞서 싸울 용사이기도 하니까요. 이 모습이 더 믿음을 주지 않겠습니까? 또 이곳의 방비는 저희 주신교단의 위신이 걸린 일이니 철저히 확인해야지요.”
각 대륙에 자리한 나라에서 전권을 위임받아 온 고위층은 물론, 바다의 신이나 대지의 신 등을 모시는 소수 교단, 그리고 마탑 연맹과 용병 길드를 비롯한 주요 세력의 대표들까지 참석했다.
대표자 외에도 그 수행원과 호위들까지 포함하면 어마어마한 수의 외부인이 한 번에 이곳으로 유입되어 온 것.
당연히 대신전의 경계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해질 수밖에 없었다.
팔라딘과 대주교까지 동원된 건 물론, 성자인 하인리히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이끄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또 만약을 위해 이단심문관이 참석자들을 은밀히 감시하고 있기도 하고.’
혹여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숨어든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들어온 이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 두 분 모두 오셨군요. 그럼, 들어가 볼까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던 끝에, 그들은 대회의장의 문 앞에서 실무를 도와줄 코델리아 추기경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미 다른 이들은 모두 입실했다고 들었으니, 그들만 들어서면 이제 곧바로 시작될 것이다.
이 세상의 앞날을 결정할, ‘대륙 정상 회의’가.
***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에 마련된 대회의장.
중앙부에는 각 세력의 대표와 수행원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바깥쪽에는 그들을 따라온 사절단 인원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상 회의가 개최되기 직전인 지금 대부분의 좌석은 빈자리 없이 채워진 상태였지만, 그들 사이의 공기는 각 세력 간의 관계에 따라 미묘한 온도 차를 보이고 있었다.
‘후우, 힘들군. 제발 이번 회의에서는 뭐라도 건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분주히 움직이며 여러 사절단과 접촉을 거듭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로한 공국의 후계자인 데니스 로한 대공자였다.
그는 가장 먼저 최우방국인 제국에 지원을 부탁하러 접근했으나, 그 대표로 참가한 황태자는 그저 번거롭다는 듯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당장 군대의 파견은 어렵고 지금까지처럼 군수물자는 충분히 지원해 줄 테니 조금만 더 버텨 보라고.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부탁하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그간 정식 루트로 몇 번이고 주고받은 내용과 별다른 것도 없었다.
‘물론 물자 지원도 고맙긴 한데, 지금 당장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나가고 있다고···! 그걸 쓸 사람이 없단 말이다.’
몬스터 때문에 정신없기는 제국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실망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잘 버티고 있는 아제리온 제국에 비해 로한 공국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으니까.
데니스는 천천히 넓은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대륙을 지배하는 세력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이 많은 이들 중 그의 조국을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다는 건 상당히 안타까운 사실이었지만.
‘···이종족들에겐, 말도 붙이지 못했지. 하긴 잘 풀렸다 해도 거리 때문에 군대를 보내줄 수도 없었을 테니.’
그의 시선이 저들끼리 한곳에 뭉쳐있는 에나멜 대륙의 사절단으로 향했다.
엘프의 왕국이자 세계수를 신봉하는 ‘엘븐 킹덤’,
‘불과 금속의 신’의 신도인 드워프들이 세운 ‘타이타니아’.
그 외에도 각자의 토착 종교를 믿는, 수인들의 연합 ‘와일드 랜드’와 리자드맨 공동체 ‘중앙 늪지대’ 등···.
애초에 주신교단을 제외하면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이종족들이었으니, 그들에게는 말을 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교단의 요청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을 이들이 대다수일 터.
‘난장판이 된 이온 대륙과 달리 에나멜 대륙은 비교적 멀쩡하다고 하니까.’
물론 전대 불사왕 사태와 마찬가지로 불이 번지기 전에 진화하려는 목적으로 대륙 차원에서 지원이야 하겠지만, 당장 나라가 위태로운 로한 공국이 원하는 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좀 더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무력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제피아 공화국은 아예 이쪽의 말을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우리 공국이 친제국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발품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데드의 출몰이 적어 비교적 피해가 덜한 서부의 탈리아, 샤로티, 툴크, 레스크 4개 왕국 연합은 물론이고.
마탑 연맹의 본부가 위치한 동남부의 섬나라 위제트 마도국과 남부 칼코스 부족 연맹까지 전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보니 이 시기에 자국의 전력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 꺼려지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소수 교단은 딱히 전투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그나마 용병 길드가 대형 용병단들을 소개해 주기로 했는데, 그들과의 협상에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어.’
그래서 이번 정상 회의의 결과가 중요했다.
주신교단에서는 이미 로한 공국에 성기사단은 물론 팔라딘까지 파견하며 지원하는 상태.
그들이라면 공국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마 상당히 중요도가 높은 안건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겠지.
만약 대륙 연합군이 창설되어 공국을 도와준다면 충분히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데니스 로한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열심히 고민하던 찰나.
덜컹—
대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마침내 신전의 대표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곳으로 집중되며, 떠들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진행을 도와줄 이들까지 제법 많은 수가 한꺼번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지금 눈에 띄는 존재는 오로지 선두에 선 두 남녀뿐이었다.
“허— 과연 신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라는 건가. 마치 저들이 있는 공간만 다른 세상 같군.”
“저분이 새로 탄생한 성자···.”
“으음··· 저번에 얼핏 보긴 했다만, 역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야.”
잠시의 정적 후,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한 사절단들.
그간 여러 번의 대외 활동을 통해 알고 있던 리에스타 성녀와 다르게, 이번이 첫 공식 활동인 하인리히 성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니,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와 주변에 감도는 경건한 분위기와 달리,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뜨겁고 강렬한 기세를 자연스럽게 흘리는 사내.
그가 바로 불사왕에 대적해 지금의 혼란을 종식할 주역인, 이 시대의 용사이자 희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