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대륙 정상 회의 (4)
여러 안건이 오가며 활발한 토의가 이어지는 대회의장.
한 번 분위기가 환기된 덕인지 이후의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첫 번째로 결정된 것은 대륙 연합군의 창설이었다.
각 나라의 군대와는 별개로 일종의 UN군과 비슷한 조직을 꾸려 만약의 사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한 것.
이미 전대 불사왕 사태 때부터 그 쓸모를 증명해왔던 역사가 오래된 조직이다 보니, 별다른 이견은 나오지 않았다.
또 자연스럽게 연합군의 사령관은 여러 세력의 정치적 이해에서 자유로운 주신교단의 팔라딘이 맡게 되었다.
“지금 상황이 가장 심각한 건 로한 공국입니다! 제국과 접한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전쟁터예요. 이대로 도움이 없다면 언제 나라가 무너질지 모릅니다!”
연합군의 창설이 결정된 다음, 그 운용과 지원 방안에 관해 논의할 때 나온 열변이었다.
당연히 그 당사자는 로한 공국의 대공자, 데니스 로한.
“흐음— 확실히 몬스터의 광기 사태는 불사왕의 공격이나 다름없는 만큼, 이에 대응하는 것도 연합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겠지요.”
그리고 그의 주장엔 아제리온 제국의 사이먼 황태자도 동조하고 나섰다.
제국도 사정이 급한 만큼 직접 군대를 파병하는 데에는 난색을 표했었지만, 어차피 만들어야 할 연합군으로 속국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었으니.
잠깐 제피아 공화국 쪽의 사절단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이 자리에서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결국 여러 이야기가 오간 끝에 로한 공국에 대한 지원이 최종 결정되었고.
데니스 대공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쳤다.
‘됐다. 이제 이걸로 좀 더 숨통이 트이겠지. 연합군이 꾸려지고 파병되기까지 시간이 좀 소요되겠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이후의 토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안건을 지나 마침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대(對) 불사왕 대응 특수 기동 타격대’, 일명 용사 파티의 결성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불사왕을 직접 상대하는 것.
당연히 그들을 이끄는 건 현 성자인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였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이 긴 부대라고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의 시초가 바로 전대 불사왕들을 물리쳤던 결사대였기 때문이었다.
대륙 연합군이 목숨을 걸고 열어준 길을 통과해, 마침내 불사왕을 물리치고 대륙에 두 차례의 평화를 가져왔던 영웅들.
막중한 책임과 영광이 함께 하는 만큼 그 인원의 선별에도 각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대륙 최고의 인재를 선발하는 자리나 다름없었으나,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의 표정은 미묘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흐음, 결사대라···.”
“···크흠.”
그들의 그런 반응은 이전 세대 결사대들의 생환률 때문이었다.
길게 따질 것도 없이, 불사왕을 토벌한 직후 멀쩡하게 생을 마감한 이는 정말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들 대부분이 전투 도중 전사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들도 영구적인 장애와 저주 등의 극심한 부작용에 시달리다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하고 말았다.
그것은 성자이자 용사였던 이들도 마찬가지.
그들도 몇 년 정도를 더 버텼다는 것만 다를 뿐, 결국 오래지 않아 주신의 품으로 떠나지 않았나.
온갖 신의 가호로 보호받는 그들이 그럴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세상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한 세력을 대표하며 든든하게 그들을 지켜줄 최고의 인재들을 그런 식으로 소모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눈치를 보는 상황에, 또다시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여는 이가 있었으니···.
“그거라면 우리 제국에서 추천하고 싶은 인재가 있습니다만.”
아제리온 제국의 황태자 사이먼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이라고,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대마법사까지 오른 천재 마법사지요. 우리 제국이 자랑하는 보물이라고나 할까.”
“오— 프리스틴 자작이라면 확실히 자격이 있지요. 작년에 그녀가 발표한 ‘얼음의 결정 구조를 이용한 빙계 마법의 다원적 분석’은 빙계 마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그의 말에 호응해 마탑 연맹 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간부 하나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 설레발은 바로 옆에 앉아있던 맹주가 지그시 노려보자 금방 사그라들긴 했지만.
‘이세아 프리스틴이라···. 들어본 것 같은데. 다른 세력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면 정말 뛰어난 인재라는 소리겠지.’
성자라는 위치가 위치다 보니 각국의 강자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이름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국의 신흥 귀족으로, 오로지 본신의 능력만으로 작위를 얻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이였다.
마법사로서는 이온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거라고 했던가.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알려지기론 30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니, 그 발전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봐야 했다.
황태자의 말대로 제국의 보물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런데 그런 자국의 인재를 사지라 알려진 자리에 흔쾌히 추천했단 말이지?’
당황한 듯한 기색의 제국 측 수행인들을 보니 사전에 합의된 내용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그 이유는 뻔한 노릇.
‘정적이라도 되나 보군. 하여튼 정치인들이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서로의 눈치만 보던 이들도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저희도 빠질 순 없죠. 마침 아국에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그러고 보니 레스크 왕국의 세링턴 후작이 그리 무위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어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분은 이제 연세도 있으셔서···.”
자국의 정적부터 타국의 인재까지.
불사왕 타격대의 조건이 워낙 높다 보니 적합한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열정적으로 여러 사람이 거론되자 회의장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하인리히의 속도 점점 뜨거워졌다.
슬슬 배알이 뒤틀리기 시작해서.
그도 그럴게 저들의 수작은 자신이 이끌 파티가 전멸한다는 걸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몸,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님의 파티가 말이다!
‘···반드시 전부 영웅으로 만든 후에 곱게 돌려보내 주지.’
그렇게 굳게 다짐한 그가 그 촌극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당연히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미력하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제가 직접 나서도록···!”
“안 됩니다! 사도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저희 교단은···.”
의욕에 차서 나서려다 옆의 수행원에게 제지당하는 소수 교단의 지도자부터.
“으음, 역시 결사대에 참여하기엔 아직 제 실력이 부족하겠죠?”
“최소로 잡아도 마스터 급은 되어야 할 테니···.”
“어떻게 종자로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자신만은 남과 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일부 대표단 참가자들까지.
그 중엔 한심하다는 듯한 해리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연신 눈을 반짝이는 샤피론도 있었다.
우물우물—
“응? 해리스, 뭘 먹고 있는 거죠?”
“아, 이거요? 팝콘이라는 건데··· 한 번 드셔보시겠습니까?
“···특이하게 생겼네요. 이온 대륙의 특산품인가 보죠?”
다행히 그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는지, 이내 그가 들고 있는 먹거리에 눈길이 쏠리긴 했지만.
그렇게 해리스는 나란히 앉은 그녀와 함께 「아바타 클라우드」로 지구에서 공수해 온 팝콘을 씹으며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슬슬 진정되는 것 같군. 하긴 이 자리에서 추천해 봤자 바로 결정되는 일도 아니니.’
하지만 태평한 것은 겉모습일 뿐,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심정으로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해리스, 해리스. 이거 더 없나요? 부드럽고 짭조름해서 맛있네요!”
열심히 냠냠거리더니 어느새 한 봉지를 전부 먹어 치운 샤피론에게 따끈따끈한 팝콘을 리필해주며, 그는 한층 차분해진 중앙 대표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 파장 분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정해진 안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긴, 이곳의 결과에 따라 국제정세가 달라질 텐데 하루 만에 모든 일이 결정될 수는 없겠지. 정상 회의가 열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도 많고.’
이 와중에도 협력이 잘 되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도 위기감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럼, 금일의 회의는 여기서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2차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오니, 모쪼록 착오 없이 참석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웅성웅성—
마침내 이어진 코델리아 대주교의 폐회 선언 직후, 각 세력의 대표들을 삼삼오오 모여 저들끼리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온 안건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
하지만 시종일관 조용히 지켜만 보던 에나멜 대륙의 이종족들은 이번에도 별다른 교류 없이 자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되지. 이제 서로 친해질 때도 됐잖아?’
그래, 그러니까···.
이건 그저 가벼운 레크리에이션일 뿐이었다.
우우웅—
파지지직—!
그 순간.
“음?”
“갑자기 무슨?”
찬란한 광휘를 내뿜는 신성 결계가 대회의장 내부에서 강렬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스파크 소리와 함께.
[이런, 내가 조금 늦었나 보군.]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영혼까지 얼어붙는 듯한 존재감에 모두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이··· 이건···?”
갑자기 발생한 이변에 혼란에 빠진 이들.
그리고 그 끔찍한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사악한 기운이 그들의 심상에 파고들려 할 때···.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반응한 성자 하인리히의 신성한 아우라가 회의장의 모든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전투 준비! 모든 팔라딘과 성기사단은 즉시 집결하라!”]
직후 울려 퍼진 그의 쩌렁쩌렁한 외침은 진득한 신성력을 품은 채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
촤차창—!
철그럭! 철그럭!
주변을 경비 중이던 교단 병력이 순식간에 모든 태세를 갖추고 회의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상이 발생하고 대응이 이루어진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
그들은 하인리히가 사전에 내려둔 지침에 따라 사절단들을 뒤쪽으로 물리며, ‘만약’을 대비해 성물까지 사용해 구축한 안전 지역으로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주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명당이었지만, 정황 파악은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으음··· 과연, 이번엔 상당히 준비를 많이 했나 보구나. 이만한 신성 결계라니. 크흐흣— 어지간히 이 몸이 두려웠나 보군. 용사, 하인리히여!]
파지지직—!
연신 불똥이 튀는 하얀 스파크 속에서, 전신을 짙은 어둠의 기운으로 감싼 존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심연 그 자체를 뭉쳐놓은 듯 일렁거리는 검은 로브와 후드 아래로 살짝 비치는 기괴하게 웃는 가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이 대륙에 사는 이라면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그를 직접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이라 하더라도, 그 앞에 서면 누구나 깨닫게 되리라.
그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은 바로···.
“한니발 스트라우스! 그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어지간히 우리가 우습게 보였나 보구나!”
대륙 정상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에 난입해온 불사왕 한스··· 아니, 한니발 스트라우스.
그리고 손바닥에서 성검을 뽑으며 그에 당당히 맞서는 고결한 용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마침내 그 두 숙적이 다시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대륙 정상 회의가 개최된 이곳.
이 대륙을 이끌어가는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