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39화 (139/284)

#139

불사왕의 준동 (3)

폭음과 함께 불사왕의 고개가 격하게 뒤로 젖혀졌다.

빠지지직—

불벼락이 그의 머리를 뒤덮으며 폭연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일시적으로 멈춘 불사왕과 용사의 혈투.

“···성자님?”

어째선지 뒤로 물러선 하인리히가 진지한 표정으로 슬쩍 한 손을 들어, 추가 공격을 가하려던 다른 이들을 제지했다.

마치 뭐라도 감지한 것처럼.

그리고 그와 때를 맞춰, 거칠게 인간들과 치고받던 언데드들이 일제히 멈칫하더니 동시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과 싸우던 이들은 갑자기 상대가 사라져 숨을 고르면서도 상황 파악을 위해 긴장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그렇게 아주 잠깐, 전장이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지만.

[큿— 크흐하핫! 아아— 이거 참, 제법이구나!]

잠시 후, 그 침묵을 깨는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지닌 격과 마력의 밀도 차이가 있는 만큼, 해리스의 공격은 그에게 그리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의미한 공격이었다고 볼 수도 없었는데.

그것을 증명하듯···.

후두둑—

당대 불사왕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기괴한 가면이 박살 나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오직 일부만이 남아 아직도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나무 가면.

“으음.”

“저것이···.”

그리고 「커스터마이징」으로 공들여 만든,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잘생긴 해골이 공개되었다.

완벽한 조형을 자랑하는 매끈한 두개골과 예리한 턱선, 가지런하고 뾰족한 건치,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구멍에서 타오르는 안광.

“···과연, 살벌하군.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야.”

“후우— 젠장, 시선을 못 마주치겠어···.”

그러나 아쉽게도 대중의 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외형상의 문제라기보단 존재 자체의 공포 효과 때문이 더 크겠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저런 반응은 좀 아니지 않은가.

만약 한스가 마음이 굳건한 이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상처받았을 것이다.

“끄끅끅··· 저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인간의 두개골이 아닌데, 무슨 종족이지? 설마 마족 태생이었나? 아니, 뿔이 없는 걸 보니 혼혈?”

개중엔 대주술사처럼 예리한 눈썰미로 한스의 성형을 눈치챈 이도 있었으나, 지금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을 오시하듯 거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던 불사왕이 입을 열기 시작했으니까.

[별거 아니라 여겨 무시했던 피라미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아주 흥미롭군.]

그의 눈길이 구석의 결계 앞에 서 있는 엘프들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태연한 기색의 해리스와 한껏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당당하게 선 세실리, 거의 기절 직전인 샤피론까지.

그에 주변 다른 이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특히 범상치 않은 활을 든 채 가장 앞에 서서 정면으로 불사왕과 마주한 해리스에게로 집중되었다.

아직도 활에서 피어오르는 묵직한 기운은 그가 좀 전에 행한 공격의 당사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불사왕 휘하의 언데드들은 왕에게 무례를 범한 저 건방진 엘프를 찢어 죽일 듯 기세를 돋웠으나···.

[흐음— 마음이 바뀌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한스의 한 마디에 곧바로 기운을 갈무리하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발끈해 나선 이가 있었으니.

“누구 마음대로! 여기가 그렇게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인 줄···!”

“성녀님.”

한껏 흥분해 앞으로 나섰던 리에스타가 하인리히의 부름에 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저희는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쌓인 피해가 너무 크기도 하고요.”

“···하지만!”

불사왕이 쳐들어오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신성 결계의 도움까지 받은 강자들이 벌써 열이 넘게 사망했다.

또 부상자는 수십에 달했는데, 부족한 실력임에도 사명감으로 전투를 보조하기 위해 끼어든 성기사들이 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에 반해 불사의 군대가 얻은 피해는 언데드의 파손뿐.

물론 완전히 파괴되어 영구적 손실로 이어진 전력도 제법 되었지만, 그게 어디 사람의 생명에 비할 수 있겠는가?

또 잔해들로 수복까지 할 수 있는 언데드들과는 다른 만큼, 이쪽이 좀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건으로 주신교단의 입지도 상당히 흔들리겠지.’

단순히 침입을 허용한 것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어도, 교단이 주최한 행사에서 사망자까지 나온 건 도저히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터.

심지어 이곳은 그들의 홈그라운드가 아닌가?

어찌 보면 하인리히가 전의 일을 수습하자마자 한스가 곧바로 거하게 사고 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 벌인 일은 결코 의미 없는 난장판이 아니었다.

‘한스의 위험성과 그에 맞설 존재인 하인리히를 세계에 어필할 기회, 덤으로 해리스의 데뷔까지. 거기다 불사왕과 용사가 존재하는 한, 교단의 발언권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어.’

오히려 이참에 과하게 강한 교단의 영향력을 살짝 조절했다 생각하면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탈리아 왕국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하인즈가 활동하기 더 편하기도 할 테고.

“···후우.”

하인리히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리에스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수긍한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뒤로 물러서고, 그는 다시 앞으로 나서 정면으로 불사왕과 마주했다.

격렬한 전투로 곳곳에 상처가 생기고 지저분한 모습이 된 채 숙적과 마주한 용사.

하인리히도 남들처럼 지쳤을 것이 분명할 텐데도, 그 존재감은 전혀 쇠하는 일 없이 마주한 불사왕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대적자라는 것을 세상에 다시 한번 강조하듯이.

[크흐흣— 여흥이 조금 길어졌구나. 처음엔 그저 인사만 하고 갈 생각이었거늘. 뭐, 확실히 인상적이긴 했다.]

뻔뻔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들을 조롱하듯 내려다보는 불사왕.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갑자기 쳐들어왔다가 물러난다는 것인지,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지만···.

애초에 심연의 존재인 불사왕의 사고를 평범한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이제 슬슬 퇴장해 볼까?’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스르륵—

하나둘 바닥의 어둠으로 사라져가는 언데드들.

쳐들어온 적들이 대놓고 후퇴하고 있었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각 세력의 강자들은 그저 당장의 싸움에 끝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 참, 요즘 광기에 빠진 몬스터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지? 공들여 준비해 준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더군.]

“···한니발 스트라우스, 네놈!”

[크크큭,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내가 너무 시간을 뺏었구나. 어디 마음껏 발버둥 쳐 보거라. 이 몸이 즐겁게 감상해 주마.]

“하! 다음엔 결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것도 재밌을지 모르겠군.]

언데드들을 모두 수습한 한스가 허공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뒤쪽의 창가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 밖으로 날아올랐다.

회의가 끝난 직후에 싸움이 벌어졌던 만큼, 이미 바깥은 캄캄한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절망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좀 더 분발해 보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리고 그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한가운데에서.

듣는 이를 공포에 빠뜨리는 음성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너희는,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대회의장을 습격했던 불사왕이 모습을 감췄다.

“······.”

“···크흠.”

불편한 공기가 감도는 대회의장.

난장판이 된 이곳에서, 모두는 불사왕의 예언과도 같은 말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좋아, 좀 많이 오글거리긴 했지만 나름 괜찮은 마무리 대사였다. 이것도 많이 하다 보니 익숙해진 것 같네.’

정작 당사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

“허···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역시 라포리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도 바로 옆에 있으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다른 나라 사절단분들도 해리스 씨를 눈여겨보시더라고요!”

라포리와 세실리가 마치 신기한 것을 마주한 듯 해리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격을 얻는 것을 직접 본 건 그들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으으— 치사하게 또 혼자 앞서 나가고 있어···.”

샤피론이 구석에서 혼자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해리스가 말없이 팝콘 봉지를 쥐여 주니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하아—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세실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숙소 밖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불사왕이 모습을 감춘 후.

로셀리아 대신전은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숙소로 보낸 사절단과 별개로 그들은 사건의 뒷정리를 해야 했으니까.

다행히 엘븐 킹덤을 비롯한 에나멜 대륙 측에선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와일드 랜드의 대표가 상당한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곧바로 이어진 주신교단의 치료로 큰 부작용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글쎄요, 지금 가장 정신없는 건 주신교단일 테니까요.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지요.”

라포리의 말대로, 이후 며칠간 교단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전투의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전장이 되었던 대회의실을 정리했다.

그리고 경비도 한층 강화되어 전시체제 수준의 방비가 이어졌다.

이미 철통같이 대비를 갖춘 회의 장소가 뚫렸는데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또 과거에 한 번 실패한 적 있던 불사왕의 침입 경위 파악도 재차 진행되었다.

이번엔 마탑 맹주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정밀 조사에 들어갔으나, 아쉽게도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뒷수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시급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렇게 불사왕의 습격이 있은 지 고작 사흘이 지난 후.

이전과는 다른 회의실에서 ‘대륙 정상 회의’가 다시 정상적으로 재개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은 모두 인지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2차 회의가 열린 직후, 코델리아 추기경이 낮은 목소리로 꺼낸 말이었다.

전과는 다르게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당대의 불사왕, 한스는 시종일관 예상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 능력 또한 예측불허라 대응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죠.”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이 경험해 봤기에 절실히 체감한 바였다.

대표가 사망해 새로 파견되어 온 몇몇 이들도 상황을 파악한 건 마찬가지.

“부끄럽게도 저희 주신교단은 불사왕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또다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죠.”

그녀의 자책 어린 말에 사이먼 황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요 며칠간 한껏 실랑이를 벌인 탓에 이 자리에서까지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수하를 잃은 것은 그에게도 큰 타격이었기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서문이 맺은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최대한 빨리, 모두의 힘을 합쳐 이 회의를 끝마치고 불사왕에게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견의 여지 하나 없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이후의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두가 위기감을 가진 만큼 첫 회의 때 보였던 삐걱거림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도 좀 사리는 느낌이 있긴 한데.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들은 각자의 조직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니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서로 날을 세우는 일 없이 지금처럼 최대한 합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전했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평소와 같이 회의를 위해 숙소를 나서려던 대표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갑자기···? 어떻게?!”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모두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전조 없이 전해진 소식에 대한 경악과 당황.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격한 반응을 보인 이가 있었는데···.

“무··· 뭐? 아,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별 이상이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로한 공국의 대공자, 데니스 로한이었다.

그는 곧 열릴 정상 회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수하들과 함께 대신전의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한 공국, 모든 국경의 방어선 붕괴.

그간 잘 버티고 있던, 그의 조국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까.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대부분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절망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좀 더 분발해 보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불사왕이 했던 불길한 경고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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