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40화 (140/284)

#140

불사왕의 준동 (4)

회의장을 습격했던 불사왕이 떠난 직후.

‘부자연스럽다.’

아제리온 제국 정보부의 고위 간부이자, 이번 정상 회의에 황태자의 보좌관으로 참여한 오드레 자작이 느낀 감상이었다.

‘어떻게 대신전에 침투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굳이 그런 수고를 감수해 놓고, 이렇게 변덕 부리듯 갑자기 떠난다고?’

그는 세상 모든 이들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고 믿는 부류였다.

‘차라리 놈에게 뭔가 노림수가 있었고, 그걸 달성한 후 유유히 빠져나갔다고 보는 게 맞겠지.’

아기가 우는 것에도 타당한 이유가 있듯, 그것이 설령 미친놈의 사고라 하더라도 그들 나름의 논리와 근거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인 불사왕의 모습은 광인의 행동이라 생각하기에도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물론 용사를 비롯한 이들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으니, 싸움이 더 진행되었다면 어떻게든 몰아낼 수 있었겠지. 희생이야 커졌겠지만 어쨌든 대신전이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고작 열 몇 명이 죽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뒤쪽에 따로 마련되었던 결계까지 파괴되어, 그 안에 있던 자신을 포함한 사절단이 떼죽음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봐야 할 일.

하지만···.

사락— 사락—

오드레는 여러 사람의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를 다시 꺼내 살펴보았다.

그곳엔 회의 참여자 명단을 확보한 직후 제국 정보부에서 조사했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제국 출신의 카이엔 투르칸 백작, 황태자 전하의 수족. 용병 길드의 칸블과 페이튼, 용병왕과 그 오른팔. 샤로티 왕국의···.’

그리고 사망자에 대한 내용을 다시 훑어보던 그는 결국 그들의 공통점을 엮어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뒤가 구린 구석이 있던 이들이군.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도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는 있지만, 적어도 죽은 이들 중에 선량한 이는 없다.’

우연일까?

···아니, 그는 우연 따윈 믿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건 이 사건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쁜 놈들만 골라 죽이는 불사왕이라니,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악인의 영혼에 담긴 부정적인 힘을 수집하기 위해? 그러면 굳이 다른 이들을 죽이지 않는 것보다, 모조리 죽이고 그중에서 선별하는 게 더 편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떤 흑마법 의식에 필요한 과정이었나? 그도 아니면···.’

온갖 가설과 추론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지만, 뚜렷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오드레는 며칠간 골머리를 싸매며 혼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들의 공통점 외에도 불사왕이 순순히 물러난 이유 또한 의문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너무 고정관념에 얽매인 걸까? 하긴, 불사왕이 보통의 미친놈들과 같을 리는 없겠지.’

그는 지금껏 흑마법사를 비롯한 수많은 광인의 행동 원리를 분석한 베테랑 수사관이기도 했으나, 그래봤자 그들도 고작 인간에 불과했다.

애당초 불사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노릇.

그렇게 내심 이번 일을 분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던 찰나, 마침내 그에게 로한 공국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당연히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상황에,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그 이름을 뇌까렸다.

‘···불사왕, 한스.’

그 만악의 근원인 이름을.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립니까?! 로한 공국이 무너져요?”

“위태롭긴 하지만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일이 커지다니···.”

“뭔가 전조 증상이라도 있었을 게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든 미리 연락받을 수···.”

대륙 정상 회의가 열린 회의장 내부가 시끌벅적해졌다.

모두 예고 없이 전해진 소식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온 대륙에 대해 잘 모르는 이종족들도 나라 하나가 결국 무너졌다는 소식에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덜컹—

그렇게 한창 혼란스럽던 와중.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로한 공국과 마탑, 교단의 대표들이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떠들썩하던 공간이 한순간에 조용해지며 일제히 그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데니스를 비롯한 이들은 딱딱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에 앉을 뿐, 앞으로 나선 것은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의 코델리아 추기경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공국이 완전히 멸망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로한 공국은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북부 산맥과 접하고 있어, 광기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부턴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국경을 사수하는 중이었다.

또 주신교단도 그곳에 소재한 신전 병력은 물론, 본단의 팔라딘을 포함한 증원까지 파견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었는데—.

“···한창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이던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삼면의 방어선이 일시에 붕괴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와 비슷한 시기에 공국의 중요 시설에 일제히 자폭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공국의 수도에 위치한 기사단의 본부, 주신교단의 신전, 마탑 연맹의 마탑 등···.

심지어 공왕이 거주하던 왕성까지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공격받았다.

그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국경 수비를 지원 중이던 신전은 큰 피해를 보았으며, 교단 기동력의 핵심이던 게이트까지 파괴되고 말았다.

물론 같이 공격받았던 곳들의 사정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병력이 빠진 상태였다지만, 주신교단의 신전까지 파괴할 정도라고?”

“그뿐만이 아니라지 않습니까? 대체 동시에 몇 곳을 공격한 건지.”

“타이밍을 보면 국경 쪽에 수작을 부린 것도 그들이겠지요. 심지어 그곳엔 교단은 물론 제국의 지원군까지 있었을 텐데.”

추가로 밝혀진 정보에 다시 삼삼오오 떠들기 시작한 사절단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고는 이내 한 곳으로 귀결되었다.

“이것 또한 불사왕 한스의 소행이겠지요?”

“설마···! 이곳을 습격했던 것도 일을 벌이기 전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려고?”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행보가 좀 이상했···.”

“결국 일이 이렇게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역시 그건 우릴 조롱하려 했던 것뿐입니다!”

그들이 사건의 흉수로 불사왕을 지목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가 그간 쌓은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처음엔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이들도 나중엔 그 주류 의견에 자연스럽게 편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들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중에는.

주신교단의 성자이자 불사왕에 대적할 용사, 하인리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겉과는 상당히 달랐는데···.

‘아니, 이건 대체 뭔 상황이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한 마디가 업보가 되어 돌아온 현실에 당황한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뜻밖의 사태에 미간을 찌푸리며 지금까지 전해진 정보를 차근히 되새겼다.

‘어떻게든 로한을 멸망시키겠다는 악의가 느껴지는데. 밀려온 몬스터와 싸우는 도중에 일거에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추가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교단과 마탑까지 공격했어.’

어지간한 조직의 역량으로는 어림도 없을뿐더러, 짧은 시간 준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최소한 연 단위의 시간을 갈아 넣어야 가능할 터.

그리고 하인리히는 이만한 일이 가능한 일당 하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역천의 서약···. 놈들이 움직인 건가.’

사실 그동안 워낙 많이 그에게 얻어터진 놈들이라 별것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그들은 절대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심연을 열어 그 ‘광기’를 꺼낸 범인이라는 걸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가.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 하나 뒤엎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올드만에게서는 이번 일에 대한 내용은 듣지 못했는데. 역시 점조직이라는 게 문제인가.’

밴시 퀸 올리비아가 얻은 정보를 토대로 간부들이 총출동해 잡아 온 툴크 왕국 지부장 올드만.

그녀는 놈을 잡아놓고도 그 심장부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금제 때문에 정보를 캐내는데 난색을 표했으나, 그것이 마도의 극의에 오른 한스에게까지 통용될 리가 없었다.

‘물론 자폭 코드에 가까운 술식이라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대상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영혼을 제한하는 금제였다.

「금단의 지식」에 따르면 인간은 어림도 없고 악마족 정도는 되어야 쓸 수 있는 고위 흑마법이라는데···.

‘그래도 혹시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다시 한번 놈을 족쳐봐야겠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엔 지금의 사안이 너무 컸다.

무너진 방어선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광기에 찬 몬스터들이 쉬지 않고 들이닥칠 텐데, 신전의 게이트는 물론 마탑까지 무너져 빠르게 지원할 방법도 사라졌다.

물론 후방 저지선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나라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최전선이 뚫린 마당에 그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단순히 치안이 악화되는 정도가 아닌, 말 그대로 국가 존립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번 일에 제국의 제론 대신전에 계신 피레이 추기경께서 직접 나서주기로 하셨습니다. 제국 내의 교단 정예를 모아 최대한 로한 공국과 가까운 신전으로 이동한 후, 되도록 많은 이들을 구해 볼 예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코델리아 추기경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 침착한 목소리의 내면에 담긴 끓어오르는 분노를 눈치채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대륙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으나, 나라 하나가 패망하고 발생할 난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의 회의는 로한 공국에 대한 대응이 중심이 되었다.

일차적으로 빠른 지원이 가능한 주신교단과 아제리온 제국이 나서고는 있지만, 대륙 연합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사안이었으니.

그렇게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와중.

하인리히는 그 상황을 지켜보며 조용히 상념에 젖어 있었다.

***

“뮬로, 로한 공국에 대해 새로 들어온 소식은 있나?”

“예, 로드. 지금은 국경이 완전히 무너져 2차 저지선에서 몬스터들을 막고는 있지만, 몬스터들을 제대로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정보조직을 만들기 위한 하인즈의 노력은 그간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로한 공국 쪽에도 클랜의 뱀파이어가 파견 나가 있었고, 뮬로는 그를 통해 현지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확실히 인재라니까. 이것도 혈마력에 통달한 뮬로가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지.’

「정제혈정」으로 더 강해진 그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휘하의 뱀파이어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륙적 규모의 정보 조직 수장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능력.

그렇게 하인즈가 내심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보고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급조된 2차 저지선은 구멍이 뻥뻥 뚫려 흘려보내는 몬스터들이 많아, 그나마 없는 것보단 나은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은 그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2차 저지선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한의 수도 앞쪽에 3차 저지선을 마련 중이라고 하지만···.”

말을 잇던 뮬로가 입을 닫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뒤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흐음···.”

하인즈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물론 로한 공국이 위험하다고 뱀파이어 클랜을 이끌고 가서 도울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고, 여건도 되지 못한다.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유페르쉬 클랜의 혈문(血門)도 상당한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는 술법인데다, 아직 그들이 전면에 나서기엔 시기상조였다.

“역시, 그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네? 따로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보다 테오도르의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클랜원들이 워낙 세계 곳곳에 퍼져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 그래도 이곳으로 집결시키는 데에 큰 문제는 없답니다.”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탈리아 왕국.

하인즈 2세는 이곳을 영역으로 삼고, 서서히 뱀파이어 클랜의 영향력을 확대할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후엔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서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슬슬 한스도 본거지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둘 때가 됐지.’

사실 불사의 군대를 지금처럼 계속 한스의 음차원 공간에 넣어두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군대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주둔지가 필요했으며, 또 그들의 특성상 대륙인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인적이 드문 곳이 적합했다.

서부는 이미 하인즈 2세의 영역으로 정했고, 중앙은 제국과 성지가 있으며, 동부는 공화국과 섬나라인 마도국이 있다.

남부 사막은 인적이 드문 편이지만 최남단에 위치한 부족 연맹과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다.

결국, 남은 곳은 오직 하나뿐.

‘역시 마왕성은 그런 곳에 있어야 제맛이지.’

가혹한 환경과 거친 지형으로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며, 온갖 사나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대륙 최대의 마경.

초보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고레벨 필드 그 자체.

북부 산맥.

그곳이 가장 적임지였다.

‘그렇다고 너무 깊숙한 곳에 숨으면 불사의 군대의 위용을 제대로 선보일 수 없지. 힘들지만 고생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가 적당해.’

때마침 적당한 장소도 하나 있지 않은가.

그래, 예를 들어···.

‘···로한 공국의 북쪽에 있는 산맥 정도면 딱 좋겠군.’

또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도.

그곳의 거주하던 기존 입주자들은, 강제로라도 그 소속을 바꿔야만 할 것이다.

‘광기’에서.

‘죽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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