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인재 영입 (1)
“호오, 기어코 로한을 무너뜨린 건가? 말만 요란한 빈 수레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작열하는 사막, 끓어오르는 대기.
그 극한의 환경 탓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남부 사막의 한 돌산 위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직이 뇌까렸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워낙 무능한 놈들뿐이라 실망할 뻔하지 않았나.”
그의 혼잣말에 마찬가지로 로브를 뒤집어쓴 채 뒤에 서 있던 이들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허락 없이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머리가 터져나갈 수 있으니, 그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쪽도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군. 당분간 대륙 놈들의 시선은 북쪽에 집중될 테니, 한결 편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
지평선을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렇게 돌산 한편에 나 있는 동굴로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 갑자기 몰아닥친 돌풍이 그의 주변에 휘몰아쳤다.
펄럭펄럭—
거칠게 펄럭이는 로브 자락들.
그리고 선두에 선 덩치의 후드 사이가 한순간 벌어지며.
목까지 올라온 화려한 불꽃 문양의 문신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쯧, 참 지랄맞은 환경이야.”
가볍게 혀를 찬 그는 대충 로브 자락을 여미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동굴로 모습을 감췄다.
이 대륙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광기의 씨앗’이 숨겨진 그 동굴로.
***
시간이 흐를수록 로한 공국의 사정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이제는 수도 인근만 간신히 지키고 있을 뿐, 국가로서의 기능은 이미 한참 전에 상실했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라면 아제리온 제국이 북상을 위해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
그간은 공국이 버티고 있었기에 다른 곳에 힘을 집중하느라 비교적 허술했던 북부 국경에 빠르게 군사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넓은 제국 본토에서도 계속해서 광기 사태가 벌어지는 중인 만큼, 이건 그들로서도 상당히 무리한 파병이었지만···.
그렇다고 로한 공국이 완전히 사라지게 방치하면 더 곤란해지는지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추기경이 이끄는 주신교단의 정예들은 이미 출발했다고 하던가. 최대한 피난민들을 수도로 모으고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거라고 했지.’
제국 측에서도 최대한 서두르고 있다지만, 군대가 움직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시간만큼 희생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일.
희생되는 이들의 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주신교단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하인리히는··· 당분간은 나서지 못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한창 대륙 연합군이다 용사 파티다 바쁜 와중에, 불사왕의 유일한 대적자인 용사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소수의 강력한 개체가 침입한 것이라면 모를까, 다수의 몬스터로 뒤덮인 국토 수복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아마 그가 나서게 되더라도, 그건 로한 신전의 게이트를 수복하고 이동이 원활해진 이후에나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대륙이 한창 혼란과 격변에 휩싸인 와중.
마침내.
[흐흠—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늘. 그놈들은 아무리 잡아들여도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귀찮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구나.]
불사왕 한스가 다시 아우테리카 차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요즘 자리를 비울 때마다 뭔가 일이 터지는 것 같은데.’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유페르쉬 클랜의 침략도 그렇고 지금 일도 워낙 사안이 크다 보니 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되도록 아바타들을 지구로 불러들이지 말아야겠군. 이제 「개체 투영」도 한 시간은 유지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
한창 대륙이 혼란스러운 지금, 갑자기 무슨 일이 어떤 식으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특히 그 바퀴벌레 같은 역천의 서약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으니, 원활한 ‘안방 극장’의 진행을 위해선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열 받네? 내가 왜 그놈들 때문에 이렇게 골머리를 썩여야 하지?’
자신은 그저 평화롭게 ‘대륙 정복을 꾀하는 마왕과 그에 맞서는 용사’를 연출하고 싶을 뿐인데, 놈들 때문에 자꾸 사건이 커지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진 어찌어찌 잘 엮어나가고 있었지만,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일만 마치고 나면 좀 더 본격적으로 놈들을 털어봐야겠어. 이번엔 한스도 직접 나서야겠군.’
딱히 그가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본 것은 없고 오히려 이쪽이 놈들을 쥐 잡듯 잡은 기억밖에 없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
자신이 일을 벌이려는데 놈들이 방해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후우··· 그래도 일단, 지금은 북부 산맥에 거점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한스가 간부들을 소집해 그와 관련한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대신전 습격 때도 부르지 않아, 계속해서 업무에 매진 중이던 밴시 퀸 올리비아가 귀가 솔깃해지는 정보를 가져왔다.
[왕께서 이전에 넘겨주신 이들과··· 최근에 잡아들인 간부에게 얻은 정보를 대조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위주로 조사를 진행했나이다···.]
유페르쉬 클랜을 움직인 이의 명을 받아 탈라리아에 잠입하려 했던 정예부대와 역천의 서약 툴크 왕국 지부장 올드만.
그리고 기존에 꾸준히 진행하던 그들에 대한 조사 결과까지.
그녀는 새로 얻은 정보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등, 모을 수 있는 정보는 죄다 끌어모아 유력 범위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이어진 것은 언제나 그랬듯, 유령들을 이용한 전수조사였다.
[그렇게 진행하는 와중···, 소녀가 이미 주시하고 있던 이들 중에··· 관련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나이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아제리온 제국, 수도 인근의 토베아 시···.]
그곳은 대륙 중심부에 자리한 제국의 수도, 제론을 둘러싼 황실 직할령 중 하나였다.
교통의 요지로써 나름 대도시에 근접한 규모를 보이는 곳.
[그곳에 유페르쉬 클랜을 움직인··· 역천의 서약의 고위 간부가 있나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그녀의 집착에 가까운 집념에, 마침내 용의자들이 그녀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호오— 수고했다, 올리비아. 때마침 놈들이 제국에 숨어 있었단 말이지?]
[그러하옵나이다···. 왕이시여···.]
그렇지 않아도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북부 산맥으로 가기 전에 잠깐 그곳을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제국과 공국은 지근거리에 붙어있는 만큼, 이번에 일을 벌인 놈들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어쩌면 그 당사자일지도 모르고.
[감히 건방지게 뒤에 숨어서 손가락만 까딱거리려 들다니. 이번엔 내가 직접 놈들을 끄집어내 줘야겠구나.]
그렇게, 한껏 벼르고 있던 불사왕 한스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
“뭔가 이상한데. 확실히 이상해.”
탁한 금발의 청년이 화려한 방 내부를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듯 자기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고는,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게 심호흡했다.
“후우— 아니, 너무 과민반응 하는 거겠지.”
세상의 전복을 꿈꾸는 악의 조직 ‘역천의 서약’.
그곳에 소속된 지구 출신의 각성자, 앤드류 위버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고위 간부인 시아나의 명에 따라 여러 곳의 동향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최근 고유스킬인 「궤적 관측」에 감지된 여러 꺼림칙한 조짐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지?’
첫 번째로, 탈라리아로 향한 직후 갑자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유페르쉬 클랜.
성혈을 관측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만큼, 그들과 브로코슬락 클랜의 싸움을 직접 보진 못했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아나가 보냈을 지원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심지어 그들도 자신이 관측할 수 없는 격이 높은 존재와 엮여 버렸는지 끝내 그 이유에 대한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탈라리아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행적이 끊겼어. ···혹시, 브로코슬락의 성혈이 그 자리에 있었나?’
눈앞에 검은 장막이 드리운 것처럼 무엇도 확실히 파악할 수 없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의문투성이였다.
두 클랜 간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 지금도 탈라리아에서 자신의 시선을 가로막는 존재는 대체 누구인지, 시아나가 보낸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무력감이 느껴진 건 오랜만인데. 아니, 이건 전보다 더하군.’
과거 고유스킬의 수준이 낮았을 때도 이렇게 막막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애초에 그때는 그만한 격의 존재들과 엮일 일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설령 볼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금방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카르마를 투자해 스킬을 상당히 강화한 지금, 한껏 자신감이 차오르고 야망에 불타오른 순간에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니···.
“굉장히··· 짜증 나는군.”
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툴크 왕국 북부 강철의 성채에서 한창 활약 중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만인.
처음 앤드류가 북부 산맥에 갔다 온 파티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그들이 뭔가 비밀스러운 임무를 받고 산맥 내에 숨어있던 강자를 데리고 온 것인가 의심했었다.
그 대상이 표면적인 목표인 드워프였든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였든, 그래야 「궤적 관측」에 감지된 이상이 설명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들은 드워프 구출 의뢰를 받고 산맥으로 향한 게 맞아. 이상한 건 그 야만인 놈이다.’
시련을 겪고 성장했다고 하기엔 갈 때와 올 때가 너무 다르다.
아예 같은 인물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지금도 그의 격이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아 여전히 흐릿한 상태이지 않은가.
‘중간에 잠깐 자리를 비웠던 건지 강철의 성채에서 모습을 감췄던 적이 있긴 한데···.’
그 또한 신전을 통해 어디론가 이동했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 정확한 행적은 추적할 수 없었다.
‘그 야만인, 확실히 뭔가 있어. 북부 산맥에서 관측된 마력의 충돌은 아마 불사왕과 드래곤의 것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산맥을 다녀온 이가 갑자기 그렇게 강해졌다고? 그것도 용의 힘을 사용하면서?’
그 ‘할리’라는 야만인을 직접 살펴보는 것은 힘들었지만, 주변에 퍼진 소문을 통해 정보 수집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사실 그가 매우 희귀한 종족인 ‘용인’이었다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었는데···.
‘아냐, 뭔가 냄새가 난다. 산맥에 들어설 때와 나올 때의 차이, 그 사이의 간극. 대체 원인이 뭐지?’
근거도 논리도 부족한 비약적인 사고였으나, 극도로 발달한 그의 직감이 계속해서 위화감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가정을 세워도 그것을 뒷받침할 정보가 없는 한은 무의미한 추측이 될 뿐이었다.
하긴··· 그 야만인이 대륙의 재앙인 불사왕과 힘을 합쳐, 광룡을 사냥해 잡아먹었으리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미친놈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끄응, 일단 이것도 넘기자.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조직에서 내려왔던 명령과 엮여있어 신경 쓰고는 있었으나, 그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만큼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이대로 넘기긴 찝찝하긴 했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확실하다. 이놈들, 우연이 아니야. 정확히 역천의 서약을··· 우리를 추적해 오고 있어.”
불사의 군대가 보이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전에 이상을 감지한 앤드류가 그에 대한 내용을 시아나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거기다 자신과 직접 연관된 사안이다 보니, 그 후로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놈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놈들이 서부를 지나 중앙으로 활동 영역을 옮기고 있다.’
평소 날카롭다 자부했던 직관이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리고, 치미는 불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앤드류는 애써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했다.
‘놈들이 중앙 지역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그래도 변방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어. 난 지금 제국의 한가운데에 있으니 여기까지 오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거야.’
심상치 않은 조짐이 감지된 것은 맞으나, 그게 지금 당장 급하게 움직일 사안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있는 곳은 다른 지부처럼 지하 조직도 아니고, 어엿한 제국의 귀족 저택이지 않은가.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순 없겠지. 시아나 누님에게 말해서 뭔가 대책을 세우든지 해야겠군.’
본능이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경고했지만, 그는 이성적인 사고를 우선하며 차분하게 앞으로의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그저 과민반응일 거라고만 치부하면서.
‘쯧,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말고 좀 사려야겠군. 한동안 따분해지겠어.’
그렇게 억지로 자신을 타이른 앤드류는 탁자에 놓인 위스키를 까서 그대로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태울 것 같은 독한 술이 들어가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고 서서히 위기감이 사그라졌다.
이미 조심하기엔 한참 늦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가 숨어 있는 저택 주변으로.
하나둘 유령들이 몰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