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46화 (146/284)

#146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3)

아우테리카는 수많은 종족이 함께 살아가는 전형적인 판타지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구에서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점도 있었는데, 이곳은 서양인들이 주류가 된 그런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역에 따라 다수를 차지하는 비율의 차이만 있을 뿐, 종족만큼이나 다양한 인종과 혼혈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채로운 세상.

그리고 그 말인즉슨, 이 세계에는 지구의 동양인도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 할리의 앞에 있는 이 여성처럼.

‘그런데 아무리 동양인이 다른 인종에 비해 더 어려 보인다지만··· 이 여자는 그걸 감안해도 너무 동안인데?’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가슴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150센티를 조금 넘어 보이는 아담한 키에 드레스와 비슷한 원피스 형태의 푸른 로브.

가슴까지 닿는 흑발은 머리 끈으로 묶어 한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렸고,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감정의 동요 없이 그를 고요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 동양인치곤 흰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아무리 봐도 이십 대 후반 같지 않았다.

‘솔직히 많이 쳐 줘도 고등학생이지, 이 정도면 중학생이라 해도 믿겠군. 아, 설마 다른 종족의 혼혈인가?’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엘프 같은 장수종의 피가 약간이나마 섞였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그렇게 할리가 근육이 꿈틀거리는 굵은 팔뚝을 움직여 뒷머리를··· 아니, 뒤통수의 마수 가죽을 벅벅 긁고 있을 때.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혹시 다른 종족의 혼혈이신지요?”

상대의 입에서 먼저 그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녀도 그와 마주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어딜 봐도 건장한 인간 그 자체인 할리의 뭘 보고 혼혈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대마법사다운 뛰어난 통찰력이었다.

“으음—? 아아! 난 용인(龍人)이니까 드래곤 혼혈이라고 볼 수 있지. 몇 대 위에 피가 섞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으하핫!”

“용인···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아제리온 제국에서 온 이세아 프리스틴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그 자그맣고 가녀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할리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약지와 소지를 접은 채로 그 손을 잡고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자칫 잘못 힘을 줬다간 상대의 손뼈가 으스러질 수도 있는 만큼, 매우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하하핫! 난 할리라고 부르면 된다. 지금은 툴크 왕국에 머무르고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남부 전사라고 할 수 있지!”

“···네? 아, 네.”

호탕한 그의 자기소개에 압도당한 듯 어색한 미소로 응대하는 이세아.

“그런데 혹시 아가씨도 혼혈인가?”

“아, 저는···.”

그렇게 대신전의 한 복도 앞에서.

150센티를 조금 넘는 자그마한 소녀와 2.3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의 사내가 우연히 조우했다.

***

“후우—.”

할리와 헤어지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이세아가 침대에 드러누우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졸지에 이 로셀리아 대신전까지 오게 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교단 측의 초청 때문이었다.

대(對) 불사왕 대응 특수 기동 타격대.

간단하게는 ‘결사대’ 혹은 ‘용사 파티’라고도 불리는 그 부대는 위험한 만큼 영광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출신 국가에서는 위인으로 추대하고, 그들이 지나온 생애는 역사서로까지 남으며 음유시인의 노래가 되어 전승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이들도 모두 단명했으니, 그 영광을 오래 누린 이는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어지간한 수준으론 범접할 수도 없는 불사왕을 직접 상대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던 만큼, 그에 지원할 수 있는 이들도 마스터 급 무인과 대마법사 등 극의에 이르는 것이 최소 조건이었다.

당연히 용사 파티는 자연스럽게 대륙 최강자들이 모인 최정예 전투 집단이··· 돼야 했을 터였지만.

세상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대륙 최강자라는 기준도 굉장히 모호하지.’

이 세상이 게임도 아니고 개인의 능력치에 정확한 수치가 매겨져 있을 턱이 없었다.

비교를 위해서는 일정 기준을 넘어선 경지와 세간의 평가, 그간 이뤄온 업적 등을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애초에 비슷한 경지에 오른 이들끼리도 상성과 경험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게 실전이었다.

대륙 최강자를 뽑는 대회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 각자의 능력을 분석해 정확한 순위를 매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심지어 아우테리카는 전대 불사왕 사태와 곳곳에 자리한 몬스터들 때문에 인간끼리의 전쟁이 있은 지도 오래된 상황.

용사가 된 하인리히처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면 모를까, 아쉽게도 현재 알려진 강자 중엔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현실이 그랬으니 일단 자격이 되는 이들의 지원을 받고, 면접과 검증을 통해 적합한 인재를 선발할 수밖에 없었으나···.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지원자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

역사가 말해주는 그 위험성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들이 선뜻 나설 수 없는 데엔 좀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결사대에 들어가게 되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라일리 곁에서 떨어져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시기에 그럴 수는 없어.’

그리고 그런 이유로 부대 합류를 고사하려는 이들 중에는.

아제리온 제국의 대마법사,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자는 필연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경우가 많았으며, 그만한 위치에 선 자는 지켜야 할 것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장 자기 가족이, 도시가, 나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의를 위해 그 모든 걸 제쳐두라고 하면 따를 이가 얼마나 될까.

만약 그렇게 자리를 비웠다가 정말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고?

힘이 없어서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사태가 그 원인이었다면?

그리고 ‘적’이 그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수작을 부려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것이 불사의 군대든··· 혹은 정적(政敵)이든 말이다.

‘사이먼 황태자 때문에 일이 귀찮게 됐어. 교단의 초청을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고. 그래도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결사대에 자원하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꼭 필요한 일인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직접 나서고 싶진 않은···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본 요건이 굉장히 높아 자격이 되는 이들도 얼마 없는 실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결국 교단은 추천받은 이들을 시작으로 강자들을 초청해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에게 가장 먼저 추천받았던 이세아도 거기에 포함된 건 당연한 사실.

‘최후의 수단도 있으니 목숨이 위험하진 않겠지만, 라일리 옆을 오래 비워두는 것 자체가 본말전도야. 내가 뭐 때문에 아직도 여기 남아있는 건데!’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음에도 그녀가 로셀리아 대신전에 직접 찾아온 것은 최대한 교단에 성의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 대륙적인 위기 상황에 성자가 희생까지 자처하며 앞으로 나섰는데, 개인적인 이유로 불참 메시지만 달랑 보낸다면 밉보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교단이 온건한 성향이라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황위를 위해선 교단과 척지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해. ···사이먼 그 개 같은 놈 때문에.’

다시 황태자의 뻔뻔한 얼굴이 떠오른 이세아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평소 냉철하다 자부했던 평정심이 깨지고 내면에 짜증이 들끓었다.

물론 그녀가 성공적으로 불사왕을 토벌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된다면 오히려 상황이 뒤집히겠지만, 그게 그리 짧은 시간에 가능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5황녀 라일리는 세력 싸움에서 뒤지는 걸 넘어서, 타의로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을 테고.

‘사이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지. ···그나저나 아까 그 사람, 할리라고 했던가?’

인상을 찡그리며 애써 좋지 않은 생각을 떨쳐내던 이세아는 사고를 전환하고자,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던 거구의 사내를 다시 떠올렸다.

“처음엔 웬 몬스터가 대신전에 침입한 줄 알았는데.”

단순히 덩치가 크다고 그렇게 판단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원소계 마법이 전공이긴 했지만, 5황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만큼 다른 분야에도 상당히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과 그녀의 특별한 재능이 합쳐진 눈에 비친 할리의 모습은—.

‘그 왼쪽 눈도 그렇고, 그건 절대 자연적인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기운이 아니야. ···키메라나 포식계 마물이라면 모를까.’

마치 초대형 몬스터를 인간의 형상으로 압축해 놓은 것 같은,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그 몸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틀림없이 그것은 몬스터들이 가진 힘의 원천인 변질된 마나, 생체력일 터.

심지어 그에겐 보통의 생명체라고 볼 수 없는 이질감까지 있었다.

마치 여러 부품을 모아 조립한 기계처럼 일관성 없는 기운이 정체불명의 힘으로 한 데 엮여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할리의 몸에 잠재된 ‘광기’와 미묘하게 잔류한 음습한 흑마법의 흔적이었다.

그건,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결코 쉽게 넘어가선 안 되는 사안이었다.

‘혹시 불사왕 한스가 보낸 끄나풀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혹시나 해서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대화를 통해 뭔가 정보라도 더 얻기 위해.

“그런데 용인이라면··· 잘 모르겠네. 워낙 희귀한 종족이라 문헌으로 남은 자료도 별로 없으니.”

그녀가 느꼈던 위화감이 용인의 종족 특성이라고 한다면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거기다 직접 악수하며 느꼈던 그의 주변에 머문 마나의 반응 또한, 그가 용의 피를 이었다는 데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마침 이후에 성자와 만날 예정이 있으니 그때 넌지시 일러두는 게 좋겠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판단은 교단 측에 떠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이걸로 점수라도 더 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탈리아 왕국 브라이트 공작가의 지하실.

하인즈는 자신의 앞에서 태평하게 하품하고 있는 여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결정에 후회는 없겠지?”

“하암—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아무리 내가 오래 살았어도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더 좋지 않겠니···?”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말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곧 수명이 다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와···.

‘역시 눈치 하난 빠르군.’

그렇게 자연사하기 전에 그에게 포식당하지 않겠느냐는 의미까지.

그녀는 하인즈가 비스크 유페르쉬를 잡아먹고 성혈에 오르는 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만큼, 그렇게 판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후후후— 사실 다른 것보다 피의 진화 그 자체가 너무 흥미로워서 참을 수가 없구나. 몇 번이나 봤는데도 이해할 수 없던 그 변화를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있다니, 이만큼 매력적인 일이 어디 있겠니!”

조용히 시작된 브리키의 목소리가 저 혼자 흥분한 듯 점점 높아졌다.

반쯤 감겨있던 눈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더니, 말이 끝날 즘엔 초롱초롱 빛날 정도가 되었다.

“물론 하인즈 네가 앞으로 만들어갈 뱀파이어의 미래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단다? 그걸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되겠지.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단 더 멋지지 않겠니?”

“그래, 이쪽도 성혈 급 뱀파이어가 하나 더 있으면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니 구경만 할 생각 하지 말고 그 미래를 위해서 직접 노력해라.”

하인즈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딜 감히 뒷짐 지고 지켜보기만 하려 한단 말인가?

그건 가장 상급자인 자신의 특권이었다!

‘뭐, 그렇다고 정말 놀기만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내가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부하가 빈둥대는 꼴은 용납 못하지.’

그리고 브리키의 뒤로 돌아간 그가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을 때까지,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정제혈정」이 핏속의 흡혈인자를 진화시키는 것을.

자신에게 찾아올 새로운 변화를!

“흐으으— 아아! 그렇구나. 이것이!”

마침내,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끓어오르는 피, 열을 뿜어내는 모공, 뒤틀리는 뼈와 근육.

세포 하나하나가 한계를 뛰어넘으며, 시시각각 죽어가던 그녀의 생명력이 다시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시작의 혈맥’ 뿌리 중 하나, 아우테리카 뱀파이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로코슬락’이—.

이세계에서 온 잡종, 하인즈 2세에 의해 더럽혀··· 아니, 더욱 발전한 모습으로 진화하며 긴 대륙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아우테리카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Hybrid)’가 완전한 성혈 하나를 더 보유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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