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제국의 난 (5)
[호오, 내기라? 크크큭— 그것참 흥미롭군. 일단 말이나 들어 보지.]
이후 이어진 말의 요지는···.
로한 공국 방면을 통해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 성자인 그도 온전히 불사왕에게만 집중할 수는 없으니, 일단 전쟁은 제쳐두고 다른 방식으로 승부를 가리자는 것이었다.
[아아— 따분한 이야기로구나. 설마 그런 단순한 제안을 내가 받아들이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불사왕의 그 냉담한 대답은 전투 와중에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이들 모두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이 제안의 전제 조건은 그의 흥미를 끌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더 이상 대화는 진전될 수 없었다.
그에 하인리히가 재차 입을 열려던 순간···.
[···아니지, 잠깐의 여흥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크흣, 마침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꺼내든 재미있는 생각이란 바로.
전 대륙을 말판으로 삼은— 일종의 보드게임이었다.
불사왕이 특정한 곳을 공격하면 용사는 그곳을 막는다.
막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인류의 손실로 직결되고, 성공할 경우엔 공격에 나섰던 불사왕 측의 병력을 각개격파 할 수 있다.
용사 측의 승리 조건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불사왕의 공세를 막아내고 마왕성으로 향해 그를 쓰러뜨리는 것.
패배는 당연히 말판이 되었던 대륙의 멸망이었다.
[물론 이쪽이 제안을 받아주는 만큼, 그쪽에 페널티도 있어야겠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뭔가 건수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음흉한 웃음을 흘린 한스가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첫 번째, 시간과 장소에 대한 통보는 없다. 그저 이 몸이 내킬 때, 내키는 장소를 파괴할 생각이니까. 명색이 성자라면 그 정도는 알아서 대처해야 하지 않겠느냐?]
“으음···!”
또한 이 ‘놀이’의 시간제한에 대해서도.
[두 번째, 네 재롱에 어울려주는 것은 삼 년까지다. 지루한 내기를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크흐흣, 과연 그 안에 내 목을 치러 올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그 기다림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 되겠지!]
새로운 관심거리에 흥미가 동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한스.
그렇게 대규모 전쟁을 막고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려는 용사와, 오로지 자기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악한 불사왕 간의 내기가 성사되었다.
어차피 인류 측으로선 더 이상 나쁠 것도 없는 조건으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방심한 순간.
[그리고 세 번째···.]
그의 뒷말이 이어지며—.
심연을 담은 듯한 시선이 전장의 한구석으로 돌아갔다.
***
5황녀와 황태자가 합류했을 당시.
“오랜만이군, 라일리. 나 없는 동안 제법 편하게 지냈나 보구나. 여러모로 살이 아주 많이 쪘어.”
“오라버니야말로 회의는 잘 갔다 오셨나요? 교단 분들에게는 죄송하기 그지없네요. 이번에도 그렇고, 오라버니가 가는 곳마다 환란이 생기는 걸 보니 주신께 저주라도 받으신 것 같은데.”
그들은 만나자마자 웃는 얼굴로 서로를 매도했다.
황태자는 서서히 성장하며 시시각각 자신의 자리를 위협해 오는 라일리 황녀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작을 서슴지 않았고, 그녀는 그에 대항하기 위해 더 독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으니···.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장 그들이 마주한 상황이 상황인데다, 중립에 속하는 수도 방위군의 인사들도 함께 있다 보니 그 이상 대놓고 반목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조차 정치적인 면을 생각해야 하는 게 황족의 업이었으니까.
그렇게 꺼림칙한 동행을 하며 대신전으로 향하던 것도 잠시.
결국 그들은 노린 듯이 쫓아오는 불사의 군대에게 발이 묶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며.
···그건 곧 불사왕과 조우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 라일리만이라도 데리고 빠져나갔어야 했나?’
우우웅—!
이세아의 몸에서 마력이 끓어 넘치듯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잠시도 멈추는 일 없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쩌저적—!
특정 법칙에 따라 엮인 그 거대한 에너지는, 마침내 극빙(極氷)의 이적이 되어 공간을 휩쓸었다.
[크악! 이 인간 꼬맹이가 감히!]
콰지직!
그리고 그 공격을 간신히 막아낸 아크리치 드웰이 온몸에 서리가 낀 채로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간 어찌어찌 직격만은 막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마법에 결국 수많은 언데드를 영구 손실했을 정도였다.
하나같이 상급에 속하는 쓸 만한 부하들이었는데!
‘카람 님과 함께할 때는 아등바등 시간만 끌면서 눈치만 보던 녀석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상대하려니 죽을 맛이군!’
그 카람은 지금 웬 늙은 기사를 막기에도 바빠 딴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른 간부들도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기는 마찬가지.
이 전장에서 한가한 것은,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불사왕과 용사가 전부였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마법사로서의 역량은 저 꼬마가 나보다 위다.’
그 어려 보이는 외모를 생각하면 자존심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래도 그건 그녀가 세기의 천재라 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드웰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인간 주제에 무슨 마력이! 지금까지 고위 마법을 몇 번이나 퍼부었는데 아직도 처음처럼 쌩쌩하다니!’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를 압도하는 그녀의 마력량이었다.
심지어 그는 불사왕과의 종속을 통해 어느 정도의 흑마력까지 간접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지 않은가?
이것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후우.”
드웰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건 말건, 이세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사실 그녀의 끊임없는 마력에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그저 그녀의 고유스킬인 「무한동력」의 효능일 뿐이었으니.
본인이 다룰 수 있는 에너지를 폭증시켜주는 그 스킬 덕분에 그녀가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은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웠다.
본인이 대마법사라 출력 또한 문제 될 것이 없어,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야말로 고위 마법을 쉬지 않고 쏘아낼 수도 있을 지경.
‘마법을 배운다고 대부분의 카르마를 그쪽 스테이터스에 투자하느라, 정작 고유스킬의 강화 레벨은 그리 높지 않지만.’
하지만 이 정도 수준만 해도 일반적인 마법사는 넘볼 수도 없는 전투 지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불사왕 정도 된다면 그런 장점도 별로 의미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녀는 다시 새로운 마법을 준비하면서도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쿠오오오——!]
[캬아아아——!]
쿠우웅!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저 멀리서 황궁의 결계를 두들기는 두 마리의 본 드래곤과 그들을 요격하려는 마법진이었다.
어느 순간 로렌스 후작의 마법 지원이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결계의 광채가 흐릿해진 걸 보니 더는 이쪽에 추가 지원을 해 줄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해 버린 것 같았다.
[나를 무시하는···!]
그녀는 앞에 있던 아크리치가 뭐라 떠드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엔 주변 전장을 살펴보았다.
물론 준비한 마법을 그에게 쏟아붓는 것은 잊지 않고서.
스카칵—!
채앵!
[크어어!]
“크윽! 구울 따위가!”
전장의 한쪽에선 근위 기사단장 콘웰이 그녀를 애먹였던 데스나이트 로드를 밀어붙이고 있었으며, 다른 쪽에선 황실 수호대장이 아귀처럼 커다래진 입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구울 로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크하하핫! 부서져라!”
거기다 양손에 언데드들을 하나씩 잡고 팽이처럼 돌며 적진을 온통 헤집고 있는, 검붉은 비늘에 뒤덮인 거대한 덩치와···.
화르르륵— 콰앙!
[슬슬 한계인가—? 너의 공포가 느껴지는구나—!]
“개소리!”
거대한 드레드 팬텀을 상대로 저항하는 가필드 백작까지 확인한 이세아는 안도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국 기사단과 불사의 군대 간의 싸움도 대체로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크게 걱정할 만한 부분은 없어 보였다.
‘불사왕이 끼지 않아서인지 크게 밀리는 곳은 없네. 저쪽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다시 가필드 백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에겐 스킬과 스테이터스의 보정이 없는 만큼, 연달아 벌어진 전투에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마어마한 강자인 데스나이트 로드를 상대로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와 함께 그야말로 전력을 쥐어짜 가며 마력을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런 전장이 아니었다.
이세아가 이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불사왕 한스와 성자 하인리히가 있는 곳.
아까부터 이어지던 그들의 대화는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올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그 기다림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 되겠지!]
그녀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의외의 전개로.
‘···뭐야 그게. 정말 미친 거 아냐? ···아니, 미친 게 맞겠구나.’
그저 놀이를 위해 대륙을 장기판으로 삼겠다는 불사왕과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인 성자.
‘아니, 성자가 먼저 제안한 거였던가? 어쨌든 다행이네. 미친놈인 덕분에 어떻게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으니. ···설마 저런 대화까지 나눠 놓고 여기서 끝장을 보려 하지는 않겠지?’
그러자 역시 무리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만약 조금 상황이 힘들어졌다고 그녀가 라일리만 데리고 전장을 빠져나갔다면, 이후 5황녀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줄었을 터.
‘사실 호위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언데드 간부들에게 따라잡히면 더 위험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거지만. 그래도 상황이 좋게 끝났으니 다행··· 어?’
그렇게 그녀가 아주 살짝 마음을 놓던 찰나.
[그리고 세 번째···.]
불사왕 한스가 나직한 말과 함께.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마치 심연을 담은 듯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시선.
거기다 아무리 봐도 그 해골에 붙은 가면 조각이 하회탈의 일부가 맞는 것 같단 생각은,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쩌저저저정—!
콰가가각!
방심한 탓에 인지하는 것이 아주 조금 늦었을 뿐인데.
그 순간에 수십 줄기의 심연이 사방에서 뻗어 오고, 같은 수만큼의 검광이 그 모든 것을 쳐냈으며, 역으로 거대한 빛의 검이 불사왕의 방벽을 베어내는 일까지 동시에 일어났으니까.
“한니발!”
[아아— 진정해라. 잠깐 필요한 절차일 뿐이다.]
갑작스러운 불사왕과 용사의 충돌에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자, 사람들이 저마다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만약을 대비했다.
하지만, 이미 무언가에 대응하기엔 한참 늦은 이도 있었는데···.
“커헉!”
지친 상황에서도 드레드 팬텀을 견제하며 무리하고 있던 가필드 백작이 검은 피를 토했다.
어느새 바닥에서 솟구친 몇 줄기의 심연의 뱀이 그의 몸을 꿰뚫은 채, 전신을 칭칭 감아 아가리를 목덜미에 처박고 있었다.
“가필드 백작!”
“이게 무슨!”
경악한 황태자와 제국 기사들이 노성을 내지르고, 하인리히 또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성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때.
푸화아악—!
불사왕 한스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뿜어져 사방을 뒤덮었다.
마치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끔찍한 존재감.
일반적인 흑마력이 아닌 죽음이 내포된 짙은 심연의 기운이··· 수도를 뒤덮은 결계의 영향력을 잠식해 들어가며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파지지직—!
그 반발력에 기운끼리의 경계면에서 연신 스파크가 튀었다.
심지어 그 범위에 든 언데드들도 결계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점 더 그 존재감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신성한 아우라를 퍼뜨려 사람들을 보호한 하인리히 덕에, 그 저주스러운 기운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불사왕의 기세에 잠깐 정신이 팔려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응당 내기에는 상품이 걸려 있어야 하는 법.]
“커— 커컥!”
모두가 갑작스러운 변화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절명한 가필드 백작이 지키고 있던 황태자가 이미 불사왕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황태자 전하!”
“네놈, 불사왕!”
분노한 제국 기사들과 그 앞을 막아서는 언데드들로 순식간에 장내가 혼란스러워졌으나···.
이세아는 그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평소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초점을 알 수 없는 불사왕 한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그 심연의 눈구멍과 정면으로 마주하자.
소름 끼치는 오한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치달았다.
‘···라일리!’
위기를 감지한 직후, 순간적으로 이세아의 정신력이 고양되며 사고가 가속하기 시작했다.
느린 시간 속에서 황녀가 있을 옆쪽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와 반대로, 몸 안을 가득 채운 마력은 노도와 같이 움직여 순식간에 그녀가 원하는 마법을 구성했다.
‘괜찮아. 전투 전에 라일리 주변에 미리 결계를 설치하기도 했고, 상시 소지하고 있는 마도구도 있으니 잠시만이라도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다면···.’
빠른 상황 판단과 대처 방안 모색, 그리고 완성을 목전에 둔 마법.
그녀는 찰나 만에 모든 방침을 결정하고 마음을 굳혔다.
설령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라일리를 이 자리에서 빼내기로.
하지만.
그녀의 고개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갔을 때.
[우후후··· 굉장히 아름다운 아가씨 아니옵니까···. 제 소싯적이 떠오르옵니다···.]
“흡?”
이미 그곳에는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밴시 퀸, 올리비아가 뒤에서부터 라일리 황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안 돼!”
마력이 폭주한다.
체내에서 거의 완성되었던 마법의 구조를 무리하게 비틀고, 억지로 용도를 변경한다.
“크흡—!”
이세아의 코와 입에서 피가 역류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당장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게 그녀의 주변에, 저 유령에게서 라일리를 구해내기 위한 마법진이 순식간에 전개되고—.
[끄으—! 언제까지 날 무시할 셈이냐, 어린 인간아—!]
파지직!
갑작스럽게 뻗어 나온 흑마력의 방해에.
순간적으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
“아?”
그녀가 마력의 통제를 잃은 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순간은 올리비아가 황녀를 데리고 불사왕의 곁으로 이동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으읏!”
[왕이시여··· 여기 대령했나이다···.]
[흐음— 그래, 역시 하나 보단 둘이 낫겠지.]
올리비아가 황녀를 데리고 오는 동안, 또 다시 하인리히와 충돌했던 한스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불사왕의 포로가 되어 버린 황태자 사이먼과 5황녀 라일리.
황망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이세아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드웰에게로 향했다.
“너, 너···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분노에 떨리는 그녀의 몸에서 「무한동력」이 쉴 새 없이 가동하며 막대한 마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드웰을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황녀를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은 얼핏 보면 언데드로 착각할 정도로 창백했다.
거기다 무리한 마력 운용의 여파로 코와 입에서는 핏물까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으니···.
그런데도 그녀가 지금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대마법사에 이를 정도로 단련된 단단한 이성 때문이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직면했더라도, 그녀의 머리 한 켠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육체를 통제하고 있었다.
지금 무작정 달려들어봤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안 돼! 코, 콘웰 공! 콘웰! 당장 나를 구해라! 안 된다! 나, 나는 이 제국의 황제가 될 몸··· 우읍!”
“후우, 후우—.”
발버둥 치다가 입이 틀어 막힌 사이먼과, 침착하게 심호흡을 반복하며 냉정을 유지하려는 라일리.
[일단 아쉬운 대로 이 녀석들로 만족해 주마. 어디 열심히 해 보거라. 일단 살려 두긴 할 테지만, 인간의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니. 크크큭—.]
그렇게 제국의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후보 둘이—.
불사왕 한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