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57화 (157/284)

#157

수도 침공 그 후 (1)

그 거리가 거리인 만큼, 엘븐 킹덤을 포함한 에나멜 대륙의 사절단들은 정상 회의가 끝났을 때 가장 먼저 로셀리아 대신전을 떠났다.

이후 각 신전들의 협조를 받아 빠르게 동부로 이동한 그들은 하루 만에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숲에 도착했고, 지금은 라포리와 세실리가 운용하는 ‘숲의 길’을 통해 에나멜 대륙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결국 이온 대륙에선 동부 숲과 신전을 오갈 때 빼곤 내내 신전 안에만 있었네요. 놀러 온 게 아니니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좀···.”

해리스와 함께 숲길을 걷던 샤피론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복장은 올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가벼워져 있었는데, 그 많던 짐들은 지금 그녀의 손목에 걸린 아공간 마도구에 얌전히 담겨 있었다.

뭔가 현실을 깨달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지만···.

원래 다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어 가는 거겠지.

“그래도 세계 각국의 여러 사람을 만날 기회가 흔한 건 아니지요. 거기다 그들 모두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위치에 있는 이들이기도 하고요.”

부스럭 부스럭—

해리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며 그 손에 팝콘 봉지를 쥐여 주었다.

“아니,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자꾸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이렇게 먹을 걸 주는 거예요? 나도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건 알고 있다고요?”

그러자 이번엔 그 대우에 불만이 생겼는지 그녀가 재차 불평을 토하긴 했지만, 당연히 손에 쥐어진 팝콘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숲길을 걸으며 부지런히 냠냠거리던 샤피론이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거리를 둘러볼 기회가 없는 건 해리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건 어디서 구해 오신 거죠? 치사하게 혼자만 나갔던 건가요!”

“아! 선물 받은 겁니다, 선물. 그 왜 얼마 전에 만났던 친구 있지 않습니까, 덩치 큰. 헤어지기 전에 아공간 마도구에 이것저것 챙겨서 주더군요.”

“아··· 그, 신기하던 분 말이죠? 전 처음에 수인족의 친척뻘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어? 용인이라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가?”

곤란한 화제를 피하고자 가볍게 주의를 돌렸더니, 또 거기에 홀랑 넘어간 그녀가 이번에도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때 그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 끼어드는 이가 있었으니.

“아니, 아니! 수인이랑 용인은 한참 다르다고, 아가씨?”

그들의 대화를 들은 듯, 한 수인이 넉살 좋게 다가왔다.

사자와 같은 치렁치렁한 갈기와 할리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거대한 덩치.

불사왕의 습격에 맞서 한 자리 차지했었던 와일드 랜드의 대표, 사자 수인 라이오넬이었다.

“수인은 그냥 날 때부터 그런 종족이고, 용인은 드래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지.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용인은 번식을 통해 피를 후대에 계승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그 뿌리는 엄연히 달라.”

그는 회의 내내 별다른 말도 없다가 싸울 때만 사납게 날뛰었던 장본인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그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가씨 손에 들린 그건 뭔가? 왠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아마 먹을 거에 홀려서 접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조금 사심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아, 이거요?”

그리고 그 노골적인 질문에 샤피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연신 부스럭거리던 팝콘 봉지를 그대로 라이오넬에게 내밀었다.

그간 그녀가 식탐이 많다고 생각했던 건 해리스의 오해였던지, 남에게 주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듯 거리낌 없는 행동이었다.

“이미 다 먹었는데, 냄새라도 맡아 보실래요?”

“···아니, 괜찮아 아가씨.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난 코가 좋거든.”

아무래도 그냥 빈 봉지라 미련이 없을 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뻔뻔함이 상당히 당황스러웠는지 잠시 멈칫하던 그는 이내 헛기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그나저나 엘븐 킹덤에는 여러모로 신세를 지는구만. 거기 형씨 덕에 불사왕을 물리치기도 했고, 이렇게 대륙 간 이동에도 도움을 받고 말이야.”

“서로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좋지요. 그런데 라이오넬 님도 그때 상당히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응? 아아! 당연하지. 그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골골거리겠나? 거기다 대신전의 집중 치료까지 받고서 후딱 털고 일어나지 못하면 수인이라고 할 수 없지!”

과연 선천적으로 강한 육체를 타고나는 수인다운 자부심이었다.

“쓰읍, 이거 에나멜에도 빨리 주신교단의 신전을 하나 세우든가 해야지. 그 소식은 들었지? 지금 제국의 수도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는 거.”

“···예, 불사왕이 제론에 쳐들어왔다고.”

하지만 이미 그들은 숲의 길을 통해 한창 이동 중이었던지라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전투 지원이 아니라 사절단의 역할로 왔으니 뭘 하기도 힘들었겠지만.

“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이동할 수 있었으면 좀 더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삼백 년 전에도 한 번 논의되기는 했는데, 불사왕이 쓰러지고 나서 흐지부지됐다고 하더라고.”

물론 에나멜 대륙의 이종족들 중에서도 각자의 종교보다 주신을 우선하는 성직자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의 종교 시설은 커다란 사원까지가 한계였다.

당연히 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인 신전은 단 하나도 없었고.

신전을 건설하기 위해선 온갖 자재뿐만 아니라 고위 성직자들도 많이 필요했는데, 에나멜 대륙에서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선 종족 차원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주신을 존중한다지만, 엄연히 국교가 따로 있는 이들이 돕기는 애매하지.’

굳이 방해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신전을 세운다는 걸 직접 돕기도 뭐하다.

삼백 년 전에 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지만, 바꿔 말하자면 이후 삼백 년간은 딱히 필요할 일이 없었다는 뜻이니.

‘그래도 이번 정상 회의에서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까. 이번에 돌아가면 이종족 수뇌부들끼리 따로 협의한 후에 확실히 결정되겠지.’

그리되면 대륙 차원의 지원으로 빠르게 신전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필요한 고위 성직자들을 이온 대륙에서 데려오는 것은 하이 엘프들이 맡게 될 터.

‘···뭔가 운송 수단으로서의 필요성만 더욱 대두되는 것 같은데.’

하이 엘프 후보 해리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그것도 남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온 대륙에서 한창 큰일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각.

해리스가 포함된 이종족 사절단은 그렇게 사건 사고 없이 평화로운 숲길을 거닐고 있었다.

***

로셀리아 대신전의 제3 중앙 식당.

“크하핫—! 이제 좀 허기가 가시는군! 간만에 격렬한 운동을 했더니 속이 영 허했는데. 살짝 부족하지만 과식은 좋지 않으니 여기까지만 할까?”

흐뭇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으며 그 문을 위풍당당하게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거참, 대충 양념 치고 구워만 줘도 된다고 했는데. 역시 대신전의 요리사들이라 그런지 실력만큼 사명감도 투철하구만! 나야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다지만.”

바로 제론으로 지원을 나갔다가 다시 성지로 돌아온 야만 전사 할리였다.

그리고 그가 나선 식당의 안쪽 주방은 이미 한바탕 전쟁이 치러진 듯, 요리사들이 저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축 늘어져 있었다.

“···역시 강적이로군. 오늘은 전보다 더해.”

“밖에서 격렬한 싸움을 하고 돌아온 직후라고 하니 아무래도 그 영향이 있겠지요.”

“후후후, 하지만 우리에겐 안 되지. 우리 제3 중앙 주방이야말로 대신전의 최정예···.”

“그, 저기··· 주방장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그의 말을 수석 조리장이 조심스럽게 끊었다.

물론 주방장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공들여 만든 음식이 불과 몇 초 만에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사라졌을 땐 하마터면 그조차 마음이 꺾여버릴 뻔했으니.

하지만 이곳은 대신전의 식사를 책임지는 곳 중 하나.

하루에도 수백 명의 성전사와 성기사들을 겪는 만큼 대식가에게는 상당한 내성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곧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그, 이미 조금 지체되어서 지금부터 바로 준비를 하지 않으면···.”

“···그랬었지, 참.”

교단의 일을 도와준 손님인 할리에게 제공한 식사는 사전에 예정되어 있던 업무가 아니었다.

즉, 그들이 원래 맡은 일과인··· 거친 훈련으로 한껏 굶주린 수많은 아귀들을 만족시키는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후, 그래. 겨우 이 정도로 약한 소리 할 순 없지.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놈들!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거냐? 우린 로셀리아 최고의 정예인 제3 중앙 주방이다!”

“네! 주방장님!”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새로운 전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쉬어야 할 시간에 만만찮은 상대와 사투를 벌인지라, 어쩌면 모든 일이 끝난 후엔 몇 명쯤 쓰러질지도 몰랐지만···.

설령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아무런 문제 없었다.

그야 이곳은, 대륙 최고의 의료시설을 자랑하는 로셀리아 대신전이었으니까!

“어— 역시 조금만 더 먹을 걸 그랬나? 벌써 살짝 출출한데···.”

그렇게 결의가 휘몰아치는 주방을 뒤로한 할리는 요리사들이 들었으면 뒷목 잡았을 말을 중얼거리며 대신전의 복도를 거닐었다.

사실 아공간에 잔뜩 쟁여둔 온갖 고기를 먹으면 되긴 하나 그래도 요리사가 직접 만들어준 음식이 더 맛있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목구멍에 들이붓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의 초월적인 미각은 그 짧은 순간에도 미세한 맛조차 놓치지 않았다.

‘아니, 됐다. 이 정도면 평소보다 많이 먹은 편이기도 하고. 아무리 공짜라도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양심 없는 짓이지.’

한스와 불사의 군대를 상대하며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한 뒤였긴 했으나, 스스로를 이 시대 최후의 양심이라 자부하는 만큼 이 정도 배려는 기본 소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하인리히는 아직 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군.’

손님의 신분으로 지원 갔을 뿐인 할리는 제론에서의 일이 끝나고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뒷정리를 위해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교단 측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그가 곧바로 자리를 피하기엔 무리였던 것이다.

‘거기다 제론 대신전은 로한 공국에 대한 파병 문제에다가 이번 일까지 겹쳐서 한창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기도 하고.’

그래도 제론과 성지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할리를 이곳으로 돌려보내 줄 정도의 여력은 있었다.

이후 로셀리아 대신전의 실무자들이 그쪽으로 떠났으니, 하인리히도 조만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번 일은 어떻게든 일단락됐군.’

불사왕의 수도 침공 이후.

황실을 시작으로 한 제국 지도층부터 뒷골목 조직을 비롯한 사회의 밑바닥까지, 그야말로 수도 전역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몸살을 앓았다.

결국 황궁의 결계는 마지막까지 파괴되지 않았던지라 그곳에서 추가 피해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불사왕과 직접 맞서야 했던 기사단의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친 것은 물론, 마스터 급 기사인 황실 수호대장도 상당한 부상을 입어 당분간 요양에 들어가야 했다.

동시에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던 귀족가와 여타 조직들 또한 그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스에게 종속되며 그 마력의 일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불사의 군대에게 「심연의 눈」의 일부 능력, 일명 악업(惡業) 판별기를 부여해 상당히 가차 없이 청소를 진행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올리비아 혼자서 그 모두를 일일이 통제하기는 한계가 있으니. 물론 그만큼 평소보다 기준이 가혹해진 면은 있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게 불만이면 평소에 나쁜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어차피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악인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물론.

그 자신도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세아는 생각 이상으로 황녀와 유대감이 강해 보였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단 말이야. 또 이제 포로들도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할 테니, 이건···.’

“아, 할리 님? 여기 계셨군요. 잠깐 대화 가능하십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긴 할리가 식후 운동을 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그에게 다가와 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결사대에 그를 추천함으로써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이들 중 한 명.

간판인 ‘용병왕’을 대신해 용병 길드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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