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수도 침공 그 후 (2)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한적한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번에 제론까지 가셔서 큰 활약을 하셨다고요.”
격식을 갖춘 단정한 복장과 오일을 발라 올백으로 뒤로 넘긴 머리.
자신을 패트릭이라 소개한 그 서른 후반의 사내는 용병보단 공무원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에 용병왕이던 칸블 님이 전사하시면서 저희 길드도 상당히 혼란스러워진 상황입니다.”
일개 용병들의 우두머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으나, 이 대륙에서 용병왕이란 자리는 그만큼 가벼운 자리가 아니었다.
몬스터와 도적이 일상인 이 세상에서 용병이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집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렇게 각지에 수많은 군소 길드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난립한 길드들을 통합하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 지금의 체계를 세웠던 게, 삼백 년 전의 초대 용병왕.
그는 초월에 이른 무력과 길드를 통한 대륙적인 영향력을 기반으로, 다른 세력들에게 ‘왕’의 칭호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용병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위인인 것이다.
‘또 2대 불사왕을 쓰러뜨린 결사대의 일원이기도 했지.’
하지만 익히 알려진 대로 결사대의 최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용병왕 또한 어찌어찌 최후의 일전까지는 살아남았으나, 결국 그도 성검이 봉인되었던 지금의 피카올 대신전이 세워진 그 장소에서 전사해버리고 말았으니.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해 용병 길드는 ‘용병왕’이란 칭호를 계승하기 시작했고, 다른 세력들도 그것을 용인하면서 지금처럼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용병왕은 불사왕과의 싸움에서 뺄 수 없어. 아마 칸블도 그때 한스에게 죽지 않았으면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용사 파티에 자원했겠지. 아니면 아예 은퇴해 버리거나.’
하인리히가 그것을 받아주고 말고와는 별개로 말이다.
“이후 용병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나서 상황이 굉장히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길드 내 가장 큰 파벌은 칸블 님과 페이튼 님이 돌아가시면서 사실상 대부분의 영향력을 잃었고, 그 힘을 흡수한 다른 파벌에서 차기 용병왕을 내세우···는 게 정상이겠습니다만···.”
차분히 말을 잇던 패트릭이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용병왕이 되면 어떻게든 결사대에 참여해야 하니 말이지요. 만약 성자님이 거부하셔서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그 또한 자격 논란으로 이어질 테니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 서로 눈치만 보는 중이란 소리였다.
“킁! 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갑자기 그런 소리를 나한테 늘어놓는 이유가 뭐야?”
할리는 이 눈앞의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도 사절단에 포함된 사람이었으니 조사가 이미 다 끝난 상황이었던 것이다.
용병 길드의 사무총장은 용병왕이 직접 임명하는 직위였고, 그는 은퇴한 전 총장의 뒤를 이어 얼마 전에야 그 자리에 오른 인사였다.
즉, 칸블의 측근이면서 동시에 길드 내 최대 파벌이었다는 곳에 속한 일원이라는 소리.
그가 직접 말했듯이,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그 파벌 말이다.
‘사실 이 인간도 상당히 아슬아슬하단 말이지. 한스가 대신전을 습격했을 때 결계 밖에 있었으면 그냥 같이 처리했을 텐데.’
여러 조사 내용을 대조한 결과, 그는 먼저 나서서 악행을 벌이기보단 위에서 내려온 명에 따라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쪽이었다.
전형적인 예스맨이라고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나쁜 놈에게 신임받을 정도로 일을 잘했다는 소리였으니 완전히 무고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할리 님은 이번에 불사왕 한스와의 싸움에 자발적으로 나서셨지요.”
“아, 그 용사님보다 더 강하다고 하니 영 근질근질해서 말이지! 뭐··· 확실히 강하긴 하더구만. 그래도 한 방은 먹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뇨, 그 성과와는 별개로 할리 님은 이미 충분한 용맹과 무력을 증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자님께서도 이미 인정하셨을 정도지요.”
그때, 시종일관 차분하게 말을 잇던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할리 님, 혹시 용병왕 자리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호오?”
그에 할리는 이 사내의 속셈을 확실히 알아챌 수 있었다.
‘썩은 줄을 버리고 라인을 갈아타시겠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직은 직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는 결국 차기 용병왕이 선출됨과 동시에 실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오랜 세월 고생한 끝에 드디어 그 자리까지 오른 그로선 억울할 수밖에 없는 노릇.
그래서 찾은 돌파구가 바로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무력이 증명된 할리였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그가 할리를 추천했던 것도 칸블이 죽은 이후였지. 사무총장 정도면 각 지부의 정보에는 빠삭할 테니···. 킹메이커가 되어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말인가.’
용병 길드는 그 특성상 무력이 최우선 가치였으나, 삼백 년이 넘게 이어져 온 조직이다 보니 당연히 정치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무력은 충분하지만 길드 내에 별다른 기반이 없는 할리에게, 아직 사무총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패트릭의 권한이 더해진다면?
“크하핫! 용병왕이라? 흥미로운 제안이로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볼까?”
굳이 찾아온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
초월에 도달한 흑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주문, ‘영겁의 미궁’.
그 내부는 격리된 하나의 작은 세상과도 같아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한 빠져나갈 수 없었고, 그것을 둘러싼 외부 또한 차원을 가르는 수준의 공격이 아니라면 흠집도 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부분을 술자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있었는데, 보통은 미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침입자를 배제하는 데에 사용하는 기능이었지만···.
‘멋지군.’
한스는 그것을 자신만의 성을 꾸미는 하우징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허업—!”
“······!”
빛조차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벽돌, 곳곳에 새겨진 악마와 해골 등의 살벌한 장식, 가시처럼 높고 뾰족하게 세워진 첨탑.
성의 하늘엔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주변은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음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끼야아악—!]
덜그럭 덜그럭!
거기다 화룡점정으로 귀곡성과 언데드의 군세까지 더해지자, 끝내주는 분위기의 마왕성이 완성되어 버린 것이다.
[크크큭—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겠지만 말이지.]
포로로 잡힌 두 황족에게 나직한 경고를 던진 한스는 그들 반응에 내심 뿌듯함을 느끼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내부 또한 기본적인 인테리어는 외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바깥과는 다르게 생명체도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오, 오셨습니까! 왕이시여!”
“아아—! 부덕한 이 세상의 심판자이시여!”
“으으··· 피와 죽음을···”
바로 이놈들 때문에.
주민들을 납치해 인체 실험을 하던 흑마법사, 흑마력을 과하게 받아들여 살육에 미쳐버린 암흑 전사, 고위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던 악마 추종자, 재림한 불사왕을 신으로 섬기며 세상에 죽음을 퍼뜨리겠다는 광신도 등···.
그동안 한스가 열심히 수집한, 대륙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세상의 암 덩어리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군상에 그간 이런 인종을 볼 일이 없었던 두 황족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흠, 이놈들과 함께 두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겠지. 격리 구역을 따로 만들어 둘까.’
이곳은 오롯이 그의 통제하에 있는 공간이었다.
의지가 일자 현상이 일어난 것은 즉각.
어느새 그들은 이전까지 있던 곳과는 별개의 주거 공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이들을 감시하고 생활을 보조할 책임자는···.
“으으, 어쩌다 이런 삭막한 곳에서···.”
“···시끄러워요, 앤드류. 나야말로 울고 싶으니까.”
결국 마왕성까지 오게 된 지구의 각성자 앤드류 위버와 서큐버스 시아나였다.
‘시아나는 변장 능력도 탁월하니까. 라일리 황녀를 담당하기엔 녀석만 한 인재가 없더란 말이지.’
황태자야 대충 숨만 붙어있어도 된다지만, 얼떨결에 데려온 황녀까지 그런 취급을 하기엔 영 찝찝하지 않은가.
···지금 하인리히 옆에서 시름에 잠긴 채 연신 한숨을 토해내는 이세아를 보기 미안하기도 하고.
‘흐음— 역시 황녀는 이런 환경에 오래 잡아두기도 뭣하니. 빨리 해방 시나리오를 강구해 봐야겠군.’
사실 이미 따로 생각해 둔 게 있긴 했다.
황녀와 대마법사의 호의를 동시에 살 수 있는 이 기회를,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절묘한 방안이.
***
‘개판이군.’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황궁을 방문했던 하인리히는 회의실을 나서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한스의 수도 침공이 가져온 여파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우선 수도에 거주하던 많은 유력자들이 상당한 피해를 보았고, 그중에는 목숨을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피해라 할 수 있는 상황에, 차기 황위에 가장 가까웠던 두 황족까지 한날한시에 생사조차 파악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실에는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 후계자들을 지켜보던 황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선장이 사라진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흔들리며 간을 보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의 우위를 가진 채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가장 큰 세력을 꾸린 황태자의 파벌.
뛰어난 지성과 정치력으로 신흥 귀족들을 주축으로 급격히 규모를 불린 5황녀의 파벌.
그리고 때를 맞춰 기회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이미 주류에서 밀려났던 2황자와 그간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6황자까지.
아마 이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정국은 점점 더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사왕과는 별개로, 오로지 그들의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후우— 죄송합니다, 성자님. 잠시 저희 쪽 사람들을 다독이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그리고 5황녀 파벌의 이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녀, 이세아 프리스틴이었다.
아직까진 딱히 공을 세운 게 없어 경지에 비해선 낮은 작위를 가진 그녀였지만, 5황녀의 최측근인데다 강력한 대마법사이기도 한 만큼 파벌 내에서의 발언권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황녀가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 두는 거겠지. 기껏 구해왔더니 있을 자리가 사라진 상태면 그것도 문제일 테니.’
상당히 조급할 텐데도 이렇게 차근차근 해야 할 일들부터 처리해 나가는 걸 보니, 과연 대마법사다운 냉철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성자님? 불사왕에게는 언제 쳐들어가실 건가요? 아! 일단 저희와 함께 할 이들부터 충원해야 할 것 같은데, 저에게 맡겨 주신다면 제가 직접 각국에서 쓸 만한 이들을 끌고··· 아니,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는 대사는 전혀 냉철하지 못했으나, 이 정도는 사소한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이미 심사숙고해서 몇 분을 골라뒀습니다. 이번 일은 기동력은 물론 서로 간의 합도 상당히 중요한 만큼 아무나 받을 생각이 없거든요. 결국 나중엔 불사왕과 함께 싸워야 할 테니 말이죠.”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입술을 핥는 이세아.
역시 조금 과격해진 것 같긴 했다.
“그런데 성자님?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떤 예고도 전조도 없는 습격에 대응하라니. 사실 이번 일도 성자님께서 미리 경고를 주시긴 하셨지만, 결국 대비가 부족해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고···.”
하인리히와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하필 그날 밖으로 나간 것이 후회되었던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근심 어린 말에, 그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괜히 그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게 아닙니다. 주신께서 길을 밝혀 주시는 이상,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테지요.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한지라, 모든 사태에 확실히 대응할 수 있다고 확신은 드리지 못합니다만.”
신실한 성직자···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광신도 기믹은 어떤 의문도 뭉개버릴 수 있는 만큼 굉장히 편리했다.
주신과 성자의 권위에 상대도 함부로 토를 달지 못하니까.
물론 끝에 가볍게 한 마디 붙여줌으로써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그리고 황녀님께서도 금방 무탈하게 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제 감은 제법 정확한 편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 어린 애가 그런 환경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은근히 가리는 음식도 많은··· 앗! 죄송해요.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언니라기보다는 엄마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움찔하더니 자기 입을 가볍게 두드렸다.
중학생 같은 이세아와 완숙한 성인 여성인 라일리 황녀의 외모를 생각하면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거슬리는 것들을 박살 내 볼까!’
그렇게 납치당한 공주와 대마법사의 파티 합류라는 이벤트 이후.
용사의 속마음이라기엔 흉악한 생각을 시작으로, ‘안방극장’이 순조롭게 다음 챕터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