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하회탈 라이즈 (2)
현경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할 수 있는 경지로, 그만큼 지닌 격이 높아 타인의 뜻대로 다루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스스로를 완성하고 틀을 탈피한 정신은 모든 외부 간섭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고, 고고하며 오롯한 영혼은 인위적인 변화를 용납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미 사망한 시신마저도 잔류 사념의 영향을 받아 항상성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 육체를 재활용하기 위해선 실력은 기본이고 온갖 사전 준비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끄으아아악—!]
물론 드래곤마저 타락시켜 언데드로 만드는 불사왕에게는 조금 손이 많이 가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호오— 이 녀석, 번천회의 끄나풀이었구나.]
한스가 자신의 손에 머리가 잡힌, 꿈틀거리는 인간의 형상을 한 심연 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새삼스럽다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
우우웅—!
전투가 벌어졌던 결계 내부에 빼곡히 들어찬 마법진과, 제물로 사용된 수많은 언데드들.
그것들을 이용해 천살마제의 영육(靈肉)에 심연을 한계까지 들이부은 결과였다.
‘이세계로 가기 전부터 놈들과 연이 있던 놈이군.’
그것도 전송되기 전에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흔적을 지운 후,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각성 테러를 저지르고 튀었던 놈이었다.
무려 약 2년 전에.
‘다른 차원에서만 20년 가까이 살아 온 놈이란 말이지···.’
당연히 놈은 돌아오자마자 번천회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한스 때문에 한국에서 완전히 잠적한 그들과 연락이 닿을 턱이 없었다.
그 이후 자기 실력만 믿고 날뛰다 지금 이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상하군. 지금처럼 경지에 오른 후라면 모를까, 그때는 이자도 평범한 일반인이었을 텐데 뭘 보고 끌어들인 거지? 단순히 우연인가?’
각성 후의 유예 시간은 고작 24시간.
그 짧은 시간 만에 설득했다고 보기는 힘드니 훨씬 전부터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뜻일 텐데···.
‘이만큼 조심스러운 놈들이 한 놈만 걸리란 식으로 무작정 수작을 부리진 않았을 거야. 그랬다면 이미 한참 전에 그 존재가 알려졌겠지.’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기억이었던 데다, 방사능 이상의 극독인 심연으로 억지로 영육을 뒤흔든 탓인지 천살마제에게선 더 이상 추가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휘하에 조사를 지시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문득 드는 아쉬움에 내심 한탄했다.
‘···여기선 아우테리카와 달리 정보 습득 경로가 한정되어 있어서 답답하단 말이야.’
정보화시대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지구에서 지금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창구는 헤테로시스를 위시한 혈맹뿐.
이제는 제법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한 그들이었으나,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음지의 조직이라는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으음, 이거 혈맹과는 별개로 양지쪽의 정보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우테리카에서 하인리히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류 세력의 움직임과 정보를 알 수 있으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터.
그러나 철저한 시스템과 인프라가 갖춰진 지구에서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신분을 증명하는 것도 일인 데다가, 그 후에 신뢰를 쌓는 건 더 힘든 일이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할 테고.’
이미 이능관리국에 입사한 강태산의 도움을 받으면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녀석은 아직 말단에 불과한 데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기도 꺼려졌다.
‘주류 세력과 연이 있으면서 신뢰를 쌓을 정도로 오래 함께했고, 그러면서도 양질의 정보를 접할 자격을 만족시키기가 어디 쉬운··· 음?’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이능관리국과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하고, 수사에 도움을 줄 정도면 제법 신뢰도 있다는 뜻이겠지.’
한스가 대신전에서 세 번째 불사왕의 파편을 탈취하고 지구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범죄자들에게 남겼던 저주를 통해 눈이 마주친, 제법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하나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제법 윗선과 선이 닿아 있을 거야. 어쩌면 가디언 쪽과도 안면이 있을지 모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심지어 흑마법사라 한스가 다루기 쉽기까지 하다니, 이건 인연을 넘어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크흐흣, 아주 훌륭한 인재로군. 자— 그럼, 지금은 어디 있는지 한 번 볼까?]
오늘은 「개체 투영」의 지속시간이 다해서 바로 찾아갈 순 없겠지만, 일단 위치만이라도 파악해 두기 위해 곧바로 「심연의 눈」을 발동했다.
사아아—
한스의 눈구멍에 어둠이 들어차며 사방의 빛을 빨아들였다.
인구에 비해 좁은 땅을 가진 한국, 거기다 영혼까지 관측당한 흑마법사라면 무언가 특별한 고유스킬이라도 가진 게 아닌 한···.
[거기 있었군.]
절대로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
곳곳에 가로등이 켜지고, 밖에 나왔던 사람들도 하나둘 귀가하기 시작한 늦은 시간.
이능관리국 소속의 흑마법사, 안성진은 주차한 차에서 내리며 한창 뒷정리 중인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영업 끝났···. 어머~ 성진이 왔니! 얘는 일도 바쁠 텐데 뭐 하러 또 왔어?”
“에이, 괜찮아요. 나는 내 전공과 관련된 사건만 조사하면 돼서 그렇게 바쁜 편도 아냐. 특히 요즘은 치안이 좋아져서 사건도 별로 없는 편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청소를 도우며 넉살 좋게 대답했다.
물론 사건이 줄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바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크건 작건 범죄를 일으키는 이들 중엔 흑마력 사용자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고, 반대로 그처럼 협조적이면서 능력 있는 흑마법사는 희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 일상을 희생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지. 어떻게 되찾은 평화고, 어떻게 다시 만난 가족인데.’
대륙 인구의 절반이 흑마력 추종자인 미친 세상에서 아등바등 발버둥 치다가 겨우 돌아온 그였다.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강화하느라 귀환이 늦어진 만큼, 힘들게 마주한 이 일상이 더없이 소중했다.
“그래, 요즘 말이 많더라. 하회탈인가 하는 사람이 나쁜 놈들을 죄다 때려잡고 있다고."
“아, 아하하···. 그, 그렇지. 하회탈··· 대단하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가족에게도 자신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리지 않았던 안성진의 입가가 경련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그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크흠— 성진이 왔냐?”
“네, 아버지!”
“이왕 왔으니까 이거나 좀 먹어봐라. 품질 관리를 위해서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확인을 해줘야 하는 법이야.”
그때 주방에 계시던 그의 아버지가 먹을거리를 한가득 테이블에 차리며 청소하던 그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전부 그가 오자마자 곧바로 조리한 음식인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또 뭘 이렇게까지···.”
“어허! 이것도 다 가게를 위해서다. 순순히 협조해라!”
물론 그 말이 핑계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부모로서 자식에게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을 뿐이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후르륵—
“역시 아버지 요리는 언제나 최고네요.”
“그럼,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어휴~ 이 양반도 오늘따라 참 주책이야!”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모두의 얼굴에서는 미소만이 가득하다.
그가 바라왔던 평화로운 일상, 화목한 가정.
안성진은 따뜻한 미소로 가족들을 바라보며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자신이 살아서 이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순간.
‘······!’
신은.
그의 자그마한 소원을 외면했다.
오싹—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한,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척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의 육감을 자극했다.
“음? 갑자기 왜 그러냐?”
“성진아?”
“···간이 잘못됐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어, 설마 이물질이···!”
호흡이 가빠진다.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멀리서 윙윙거리듯 아득하게 울려 퍼진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하지만 혼란에 빠지던 그의 정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산떠는 부모님을 마주하자, 찬물을 맞은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냉정을 되찾자 뒤늦게 발동한 고유스킬 「극기」와 「명경지수」 등의 스킬이 추가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 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결재 서류를 올리지 않았단 게 생각나서···! 으아, 그거 오늘 퇴근 전에 올리고 왔어야 하는데!”
“으잉? 깜짝 놀랐잖냐!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야?”
“아유,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어. 그런데 그렇게 사색이 될 정도라니, 중요한 일이니?”
일단 당장의 상황을 수습하는 것부터.
“죄송해요. 일단 당직 서는 분한테 전화 먼저 하고 올게요. 아! 음식은 포장했다가 집에 가져가서···.”
그는 그렇게 아직도 걱정스레 바라보는 두 분을 안심시키고 식당을 나섰다.
‘후우, 그럼 가 볼까.’
아직도 한자리에 멈춰선 채 은근히 그에게 신호를 보내는 서늘한 기척.
그에 안성진도 전과는 달리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괜찮아. 이렇게 조용히 부르는 걸 보니 적의는 없을 거야. ···아마 뭔가 내게 바라는 게 있겠지.’
아까는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져버렸으나, 지금은 기절까지 했던 저번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방어력이 취약한 영체 상태로 그 존재감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바람에 일시에 충격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일찍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극기」까지 발동시킬 수 있었다.
사용자의 굳건한 의지만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게 해 주는 그 스킬은, 그가 흑마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일등 공신이었다.
‘후우, 이곳인가.’
그는 마침내 신호가 이어지는 식당 인근의 골목길 앞에 도착했다.
빛 한 점 없어 마치 지옥문처럼 보이는 그곳에, 그는 깊게 심호흡하며 성큼 발을 디뎠다.
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주변 풍경이 한순간에 변화했다.
바닥과 벽면은 물론 하늘까지 뒤덮은 채 꿈틀거리는 짙은 어둠.
‘···정말로 지옥에라도 들어온 것 같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 공간의 중심에서 자신을 부른 이와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죽음을 뭉쳐 인간의 형상으로 빚은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는 그 존재를.
‘까마득하군. 내 수준으로는 경지를 가늠할 수도 없어. 대체 얼마나 화후가 깊으면 죽음과 일체화까지 이룬 거지? 일단 귀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진짜 언데드는 아니라는 건데. 뭔가 특별한 스킬이라도 있···.’
그렇게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찰나, 마력을 공명시킨 음산한 웃음소리가 그의 상념을 끊고 들려왔다.
[크크큭— 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도 도망가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그걸 바라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감히 당신에게서 도망칠 자신도 없고요. ···하회탈.”
안성진은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며 깊게 심호흡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 공간의 공기는 절대 건강에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았다.
‘젠장, 상대에게 적의가 없는데도 이 지경이라니. 하위 흑마력을 지배하는 능력인가?’
그 시선을 마주하자 체내의 흑마력이 절로 위축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공포의 아우라는 사정없이 그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정말 「극기」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 엎드린 채 자비만 구걸했을지도 몰랐다.
[현명한 판단이다. 과연, 나름대로 배려해 준 보람이 있군.]
곧바로 그 식당에 들이닥치지 않고 이렇게 조용히 신호만 보낸 걸 말하는 것이겠지.
그 점에 대해서는 안성진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부모님이 이 존재를 마주했다간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심장마비가 올지도 몰랐으니.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극악한 범죄자들만 상대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다 아차 한 안성진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저는 흑마법사지만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제 고유스킬이 흑마력의 영향으로부터···.”
[아아,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니 안심해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하회탈의 확답에 그제야 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어느새 등은 식은땀에 축축이 젖어있었으나, 일단 자신에게 위해가 올 것 같지 않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럼··· 어째서 저를?”
[내가 이 나라의 치안에 상당히 기여하고 있는데 말이지. 일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귀찮은 면이 상당히 많아.]
조금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대답.
하회탈이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그를 가리켰다.
[너, 상당히 쓸 만해 보이더구나.]
“아? 감사···.”
[크흐흣— 그러니 내 노예가 되어 주어야겠다.]
그 말에, 조금 이르게 안도했던 안성진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