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규슈 크라이시스 (3)
일본의 하회탈 추적대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꾸린 팀이어서인지 과연 그리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수십의 인원들 모두가 정예인 듯 한스의 위압감에도 크게 위축되지 않은 것은 기본에, 기술명을 외쳤던 사내를 포함한 다섯 정도는 야만 전사 할리를 상대로도 제법 버틸 수 있을 실력자들이었다.
심지어 정부 측 요원들의 대표로 보이는 사내와 가디언들을 이끄는 여성의 전투력은 제국의 근위 기사단장 콘웰과도 맞먹는 수준이었고.
‘뭔가 매번 그 할아버지가 전투력의 기준이 되는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고 저 각성자들의 경지가 그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가 가진 ‘고유스킬’이라는 특출난 이능으로 자신의 전투력을 뻥튀기시키는 게 가능했으니까.
굳이 그 격을 따지자면 할리와 비슷한 극의의 최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리고 그 말은 곧···.
“커헉!”
“이 무슨 괴물 같은···.”
그들만으로는 하회탈, 한스의 앞길을 막아설 수 없다는 뜻이었다.
[크흐흐— 과연, 제법 괜찮은 여흥이었다. 이 몸에게 대적하기엔 한참은 부족하지만 말이지!]
빠른 속도로 공간을 넘나들며 온갖 기상천외한 공격을 쏟아붓던 닌자 차림의 여성은 거미줄처럼 허공에 빼곡하게 깔린 심연의 실에 휘감겼으며.
모든 공격을 무시하는 것처럼 꿋꿋하게 덤벼들던 근육질의 남성은 쉴 새 없이 몸을 두들기는 흑마법의 압도적인 화력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며 사방에 널브러진 이들 틈에 그렇게 우두머리 두 명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카앙—!
그때, 공격 직전까지 느껴지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기습이 한스의 심연에 가로막혀 불발로 돌아갔다.
“큭! 젠장!”
처음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이십 대의 젊은 검사.
실망스럽게도 그는 결국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초기 몇 번의 공격 이후로는 기술명을 외치는 걸 그만둔 상태였다.
그건 마치 현실과 타협해 꿈을 포기한 요즘 세대의 청년을 보는 듯해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죽음의 손아귀.]
콰앙!
“껙!”
물론 그게 살살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또 여기 있는 이들 중 자신의 나이가 제일 어려 보인다는 것 또한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드디어 이 귀찮은 양반들을 모두 쓰러뜨렸다는 게 중요하지.’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다 보니 생각보다 제법 오래 걸렸다.
저들도 명령에 따라 충실히 책무를 다하는 것에 불과한데 거슬린다고 막 죽일 수도 없지 않은가?
괜히 하회탈의 명분에 먹칠만 할 뿐이기도 하니 말이다.
‘오늘 내로 모든 일을 끝내고 규슈를 뜰 생각이었는데,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했군.’
그래도 목표는 고작 하나가 남았을 뿐이니 아직 그리 늦은 것은 아니었다.
이윽고 전장의 외곽으로 이동한 그는 사방을 둘러싼 결계와 접촉했다.
싸움의 여파를 우려했는지 저들이 습격과 동시에 발동시킨 결계는 용케 지금까지 부서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것을 부수고 나가기 전, 한스가 슬쩍 뒤쪽을 바라보았다.
끙끙 앓으며 처참하게 널브러진 각성자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그는···.
[흐— 나름 재밌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이번엔 내가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줬지만, 앞으로는 너희끼리 잘해 보라고? 크큭큭!]
그들에게 진솔한 격려의 말을 남긴 채, 그대로 결계를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스의 말투 탓에 다소 조롱하듯 들렸을까 봐 조금 걱정되기는 했으나, 진심은 반드시 전해지는 법이라지 않는가.
그의 마음 또한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그렇게 각성자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은 그는 빠르게 목표지로 이동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풀리지는 않았는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놈들의 아지트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아무리 결계가 있었다고 해도 바로 지근거리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아직도 남아있을 리가 없지.’
최근 범죄자를 사냥하고 다니며 암흑가의 특급 경계 대상이 된 정체불명의 사신과, 놈들의 천적인 각성자들이 앞마당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상황이다.
그 기회를 틈타서 재빨리 몸을 피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숨어 다니는 게 기본인 지하 조직이기도 했으니.
‘곤란하군. 이래서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놈들을 일일이 찾아서 족치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이놈들은 그냥 넘어가야 하나?’
어차피 일본은 규모가 큰 놈들만 가볍게 훑을 생각으로 넘어온 곳이다.
괜히 조직 하나 때문에 이곳에 묶여있느니, 차라리 옆의 섬인 시코쿠나 혼슈로 넘어가서 활동을 이어가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번 같은 일이 또 있을 수 있으니, 앞으론 조금 번거롭더라도 영역을 넓게 잡고 움직여야겠어. 「심연의 눈」이 있으니 방심한 목표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지.’
지하 조직들은 그 특성상 수뇌부를 일망타진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 상황에서 부정한 힘과 악업을 감지할 수 있는 「심연의 눈」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조직을 쓸어버리며 얻은 정보와 이 스킬을 조합하니 거의 완벽한 색출이 가능하게 된 것.
한국에서처럼 광범위한 감시망을 설치하기엔 여건이 부족한 지금에선 최고의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흐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한 번 더 확인해 보자.’
다시 눈구멍 가득 심연이 들어찬 한스가 천천히 아지트 주변을 훑어보았다.
거기에 「마도의 길」과 「마력 지배」 등의 능력도 연계되어 주변에 남은 흔적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사를 하면서도 그는 내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한스에 비해 부족하다지만 놈들도 나름 각 세계에서 살아남은 생존의 스페셜리스트인 데다가, 지구에 돌아와서도 제법 큰 세력을 꾸린 수완까지 있었으니까.
흔적을 지우는 특별한 수단 정도는 몇 개씩 준비되어 있을 터였고, 그것엔 워낙 다양한 세계의 여러 능력이 있어 수준 차이로도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되네?’
지금은 텅 빈 놈들의 아지트에서 이어지는 모종의 흔적에 멈칫한 그가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름대로 흔적을 지우려 시도하기는 한 듯, 그가 아니었다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흐릿한 흔적이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놈들도 많지만, 그 대부분은 잡졸들이로군. 악업이 짙은 놈들은 저들끼리 뭉쳐서 따로 이동했어. 이놈들이 간부인가?’
「심연의 눈」이 사방의 빛을 빨아들이며 파편화된 흔적에서 쓸만한 정보를 추려냈고, 그가 가진 온갖 능력이 순식간에 그것을 분석했다.
역시 아무리 확인해 봐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일단 가 볼까?’
그냥 포기하려 했던 찰나에 튀어나온 단서에 한스는 곧바로 그것을 따라 이동했다.
그냥 떠났다면 아무래도 찝찝함이 남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간부들을 깔끔하게 처리할 기회가 왔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곳이 놈들의 안가(安家)인가. 전형적이군.’
그렇게 흔적을 따라 이동하자 나타난 곳은 아지트가 있던 도시 인근 야산의 작은 건물이었다.
사유지라도 되는지 그가 따라왔던 이들의 기척만이 산장 내부에서 느껴질 뿐, 근방에서 다른 인간의 기운은 일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더 기다릴 것도 없지. 빨리 끝내고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자. 다음은 히로시마부터 시작해서···.’
하지만, 한스가 앞으로의 계획과 함께 놈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돌입한 순간.
‘음?’
그의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본능을 사정없이 자극하기 시작했다.
빠지직—
이어서 미세한 파열음이 들려온 것과, 이상을 감지한 그가 반응한 것은 동시였다.
고오오오—!
한스의 전신에서 흑마력이 불꽃처럼 피어오르고, 그와 반대로 주변 공기는 삽시간에 영하로 떨어져 내렸다.
줄기줄기 흘러나온 심연이 그의 주변을 휘감아 사방에 이빨을 들이밀었으며, 일대의 풍경이 필터라도 씌운 듯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극히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변화.
그리고 마침내···.
빠직— 쨍그랑!
무언가 균열이 이는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을 비롯한 모든 주변 공간이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또한, 그 공간 너머에서는.
완벽한 전투 태세를 갖춘 서른에 가까운 무리가 날카로운 기세를 피워 올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면 공간이로군. 함정이었나?]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던 이변에 슬쩍 마력을 흘려 공간을 확인한 한스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여전히 곳곳이 깨져나간 이 이질적인 환경은 단순한 결계가 아니었다.
외부로의 모든 연결이 차단된 닫힌 세계.
이곳은 그의 마왕성 ‘영겁의 미궁’처럼 작은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즉, 술자를 처리하거나 차원에 간섭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라는 뜻이었으니.
그가 감각을 끌어올려 흔적을 따라왔던 산장 안에 있는 놈들을 다시 탐지했다.
역시 그들은 이 난리 통에도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지금 나타난 놈들이 저것들을 미끼로 쓰려고 가져다 놓은 것 같은데. 내가 산장에 도착한 걸 신호로 주변 일대를 통째로 끌어들인 건가? 이 정도 수준의 공간 조작 능력이라니.’
사실 처음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하기 시작했을 때도 혹시나 했던 가정이었으나, 어차피 어떤 함정을 파건 소용없으리라는 자신감에 무시했던 상황이었다.
설마 그게 이렇게 본격적일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과연··· 마왕급이라고 하기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생각했는데. 영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네.”
“미친,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을 때야? 단순히 존재감을 드러낸 것만으로 현상을 강제했다고!”
“···저기,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죠? 저거 진짜 마왕 출신 같은데요···? 이만한 죽음의 기운이라니, 단순히 언데드 형태로 변신한 수준이 아니잖아요···!”
“@#$%#! %$#!”
“호들갑 떨지 마라. 이미 예상했던 바다.”
아마 이 이면 세계는 저들 중 누군가의 고유스킬일 터.
한스의 시선이 다시 자기들끼리 떠드는 무리에게로 향했다.
‘과연,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놈들이군.’
가진 고유스킬이 모두 다르고 세계마다 기준이 되는 경지가 달라 확실한 구분은 힘들었지만, 한스 정도 되면 상대가 내뿜는 기세만으로도 그 전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전원 극의 이상. 거기다 선두의 다섯은 초월에 이른 것 같은데.’
좀 전에 마주했던 추적대의 두 각성자처럼 단순히 전투력만 끌어올린 수준이 아니라, 그 경지와 격 자체가 한계를 넘어선 이들이었다.
심지어 이것도 고유스킬로 인한 시너지는 감안하지 않은 것이었으니,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저들의 전력이 얼마나 더 증폭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정말 마왕이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은··· 아우테리카에서도 본 적 없는 최정예 전투 부대였다.
순간적으로 일본 정부 측에서 파견한 특수부대가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역시 아무리 봐도 그쪽은 아닌 것 같았다.
‘천살마제를 봤을 때부터 혹시나 했건만.’
전신에서 흉악한 기운과 악업을 풀풀 풍기는 마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데다, 심지어 그 비율이 멀쩡한 놈들보다 훨씬 높았으니까.
‘생각했던 것 이상이군. 확실히 번천회가 한국에 손쓰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긴 했나 보네. 다른 지역 놈들과의 수준 차이가 이 정도일 줄이야.’
대부분이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중국어를 사용하는 이도 제법 되는 것을 보니, 미리 지원군까지 파견하며 단단히 준비한 것 같았다.
거기다 따로 무슨 수를 썼는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들끼리는 대화가 통하는 모습이었다.
[오호— 너희는 번천회에서 온 놈들이겠지? 그래, 대화는 다 끝났나?]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한스가 그들을 향해 오만하게 말을 던졌다.
이쪽을 경계하면서도 저들끼리 의견을 나누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가, 이윽고 다시 기세를 끌어올리며 나직이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데도 기다려주고. 진짜 마왕으로서의 덕목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잖아?”
“헛소리하지 마. 저쪽도 상황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겠지.”
“쯧, 원래 이곳에 끌어들이자마자 기습하려고 했건만. 놈의 대응이 너무 빨라서 타이밍을 놓쳤군.”
그들 중에서도 리더격으로 보이는 차가운 인상의 양복 사내가 한스를 휘감은 심연을 보며 혀를 찼다.
마치 자아라도 가진 양 꿈틀대는 저것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메슥거려지는 치명적인 기운을 풍기고 있어, 그들이 감히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하회탈의 정체가 무엇이건 상관없다.”
하지만 이렇게 판까지 벌여놓고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그리고 단순히 꺼려진다는 이유만으로 빼기엔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한 번천회의 전력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각자의 지역에서 밤의 황제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이들이 뭉친 데다, 중국에서까지 추가로 지원군이 넘어온 상황이 아닌가?
이만한 전력을 데리고 겁을 먹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놈을 죽인 다음 시체를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니까.”
“으음, 뭐.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거였으니.”
“으··· 전 역시 조금 불안한데요···.”
“@#%$$%#!”
그렇기에 양복 사내는 당당히 선언할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들 조직의 계획을 방해한 하회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흐음··· 종합 선물 세트치고는 확실히 좀 과하게 많은 것 같긴 한데. 추가로 어떤 능력들을 가지고 있을지 감이 안 오니 잘 모르겠군. 정확한 건 일단 싸워봐야 알겠는데.’
물론 한스에게는 그저 개가 짖는 소리일 뿐이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위협적이라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공간 단절이고 뭐고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지 않은가?
[흐흐흐— 위세는 좋구나. 감히 이 몸을 상대로 그 태도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한 번 볼까?]
그리고 원래 한스는 약한 소리 따윈 할 줄 모르는 캐릭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