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74화 (174/284)

#174

영웅의 발자취 (1)

“와··· 요즘 인터넷이 하회탈로 떠들썩하네요. 하긴, 뉴스에까지 나올 정도면 말 다 했죠. 영상의 영향력 때문인지 살짝 모자이크 처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 이상으로 과하게 반응하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신기할 수밖에 없죠. 본 드래곤 같은 존재가 지구에 나타난 건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거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걸 좋아하다 보니 계속해서 불씨를 지피는 것도 있고요.”

“그런 거?”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인즈를 본 진소란이 씨익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왜, 앞에 K 붙이는 거요. 요즘은 K-하회탈이라고 하더라고요. 두유노 클럽 후보로도 올랐다고 하던가? 푸훗.”

“···흐음, 거참 쓸데없군. 어쨌든 중요한 건 대충 다 끝났으니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남은 일은 진소란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아, 네! 알겠습니다, 로드. 들어가세요.”

그렇게 적당히 잡담을 마무리하고 헤테로시스의 사무실을 나선 그는 곧바로 「존재부정」으로 모습을 감추며 자신의 거처로 몸을 날렸다.

물론 진짜 하인즈 2세는 여전히 탈리아 왕국에 있었고, 지금의 그는 「개체 투영」을 사용한 상태였다.

‘일본에서의 일이 끝나기 전까진 한스로 투영하는 건 자제해야겠지. 그나저나, 번천회라···.’

얼마 전에 있었던 한스와 번천회의 충돌은 그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겨 주었다.

이번엔 헤라토스 덕분에 오히려 함정을 부수고 역으로 털어버리긴 했으나, 그것이 놈들을 우습게 볼 이유는 되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반대지. 자칫했으면 정말 소환 해제밖에 답이 없을 뻔했으니. 그만한 수준의 적을 상대론 언데드들은 별다른 쓸모도 없었고.’

사실 그도 처음부터 언데드를 꺼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놈들과의 싸움에서 어설픈 전력은 오히려 방해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중간에 포기했을 뿐.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흑마법을 폭격처럼 쏟아내야 했던 격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특별한 재료와 공정 없이 지구에서 흑마법만을 이용해 찍어내듯 만들어낸 언데드는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불사의 군대 소속 상위 언데드들을 꺼내놓았다면 충분히 도움이 되었겠지만···.

‘종속 아공간을 만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제 마음대로 이계의 언데드를 불러와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긴, 그때는 나도 법칙에 대해 잘 몰랐을 때였지.’

세계의 법칙에서 비껴간 각성자들과는 달리, 각자의 체계로 움직이는 이계의 언데드들은 지구에서 꺼내는 족족 무너져 내려 정상적인 운용이 불가능했다.

본 드래곤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한스가 그 심장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던 헤라토스만 빼고.

거기다 아우테리카에서처럼 필요할 때 전송진을 통해 지원군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현재로선 위험하다 싶으면 소환 해제를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 양질의 소재를 제법 많이 입수했으니 앞으로는 사정이 좀 더 나아지겠지? 슬슬 살마의 언데드화 준비도 끝나 가고.’

그런 만큼 현재 공들여 제작 중인 지구인이자 각성자 언데드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생전보다는 수준이 좀 떨어지긴 할 테지만, 초월에 준하면서도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언데드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도움이 될 터.

‘혹시 모르니 마무리 작업은 지구에서 해야겠지만. 많은 시간과 재료가 필요한 공정은 이세계에서 하면서 그 혜택은 지구에서 누릴 수 있다니, 모든 네크로맨서가 부러워할 만한 환경이군.’

이번에 추가로 확보한 시체들도 지구 시간으로 고작 며칠이면 최상급 언데드로 재탄생한다는 뜻이었으니, 번천회 입장에선 상상치도 못할 속도로 전력 증강이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자 지금으로선 아직 한참 부족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만한 수준의 전력이 고작 일본 지부··· 추가로 중국에서 지원하러 온 소수를 포함한 정도에 불과했단 말이지?’

이번에 처리한 놈들은 산 채로 생포할 여유가 없어 그 머릿속을 제대로 뒤져보진 못했으나, 그간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번천회는 고작 아시아에 국한된 조직이 아니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전력만 그 정도였다면, 전 세계에 퍼진 놈들의 세력이 얼마나 될지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놈들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당장이라도 나라 몇 개는 집어삼키고도 남겠군.’

다만 그렇게 하면 번천회 측도 불필요한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으니 지금의 노선을 선택한 것일 터였다.

어쩌면 아직 밝혀지지만 않았을 뿐, 이미 놈들의 수중에 떨어진 나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한스 하나만으론 부족해. 더,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한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놈들의 야욕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선 이쪽도 수를 늘릴 필요가 있었는데···.

‘귀환자 협회나 각국의 각성자 관리 기관에 무언가를 기대하기엔 그들의 덩치가 너무 커. 여러 사람이 협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지 말란 법이 없으니.’

아니면 아예 그 요직에 스파이가 있을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번천회와 적대하는 자들’을 마냥 믿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그냥 내가 다 해버리는 게 속이 편하지. 뭐, 정말로 그들을 마주하게 되면 간접적인 지원 정도는 얼마든 해줄 수 있겠지만.’

역시 처음 세웠던 계획대로 다수의 아바타를 강하게 육성하는 게 최선이었다.

아마 번천회 놈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회탈의 방해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곧 하회탈뿐만 아니라, 다른 방해꾼들도 속속 등장해 그들을 방해하게 될 거라는 것까지도.

***

[끼히히힉!]

덜그럭! 달그락—!

이온 대륙 북부 산맥 중심부, 높은 산세에 둘러싸여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지형에 덩그러니 솟아오른 칠흑의 성 하나가 있었다.

여러 환경적인 문제로 사시사철 서늘함이 감도는 것은 물론, 주변에 빼곡하게 깔린 수많은 언데드에 의해 죽음의 기운이 넘쳐나는 마경.

불사왕 한스가 불러낸 영겁의 미궁이자 마왕성, 가칭 ‘불사성’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과연, 훌륭하군. 심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더니 숙성 기간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축될 것 같고. 수고했다, 드웰.]

[과찬이십니다, 불사왕이시여!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성안의 깊숙한 장소에서, 그렇지 않아도 음산한 내부를 더욱 섬뜩하게 만드는 배경을 뒤로한 두 해골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사방에 새겨진 온갖 마법진과 여기저기 널린 기괴한 외양의 주술 도구들.

샘플로 보이는 무언가의 생체 조직들은 연신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고, 가지런히 놓인 다양한 실험 기구들이 서늘한 빛을 반사했다.

거기에 피가 눌어붙은 시술대에는 묶인 이의 반항을 원천 봉쇄하는 살벌한 구속 장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데다, 심지어 심연이 가득 담겨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인큐베이터 같은 무언가까지 있는—.

그야말로 ‘광기에 빠진 마법사의 실험실’ 그 자체였다.

‘사실 리치들을 위한 연구실이니까 틀린 말도 아니지. 지금은 특별한 언데드를 제작하기 위한 공방도 겸하고 있지만.’

주변의 리치들을 훑어본 한스가 이 실험실의 책임자인 드웰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덕에 지금처럼 큰 부담 없이 지구에서 돌아올 수 있긴 했으나, 그래봐야 10일에 한 번에 불과한지라 대부분의 일은 부하들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웰의 전투력이 다른 간부들에 비해 낮은 편이라고는 해도, 그 또한 한스보다 아득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베테랑 아크리치였다.

그런 그에게 언데드화 공정을 관리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당연히 완벽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불사왕의 믿음을 살 수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다음은 이것들이다.]

와르르—

그리고, 그 믿음에 힘입어.

한스는 지구에서 엄선해서 가져온 각성자들의 시신을 실험실 바닥에 쏟아냈다.

살마와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 번천회의 양복 사내 하나와, 그보단 조금 떨어지지만 공들여 가공한다면 쓸만한 전력이 될 열댓 구의 시신까지.

[···엇, 그, 이것들도 전부 저 친구와 같은 공정으로··· 합니까?]

[크흐흐— 그래. 이것들 전부 따로 쓸 일이 있으니 특별히 신경 써서 작업해라.]

[아,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맡겨만 주십시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심연을 다루는 과정까지 포함된 공정이 정말 쉬울 리가 없었다.

당연히 신경 쓸 것도 많고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거늘, 갑자기 이렇게 많은 것들을 맡게 되었으니···.

[그럼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예.]

하지만 다수의 유능한 부하를 휘하에 거두며, 이제 이런 가혹한 업무 환경에 익숙해져 버린 한스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일 뿐이었다.

애초에 불사의 군대는 태생부터 블랙 기업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드웰에게 한 무더기의 일감을 던져준 그는 이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던 일들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새로운 명령을 하달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좋군, 그럼 앞으로의 진행은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겠다.]

[소녀···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한스는 올리비아와의 일까지 전부 마무리하고서 다시 조용히 불사성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지구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러나 그렇게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함을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쩌저적—!

“···와,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오오! 이거 재밌네요. 이것보다 더 어려운 건 없습니까, 라일리?”

바로 불사성 내의 거주 구역에 구금된 채 마법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던 라일리 황녀와 헤스페론이었다.

라일리는 정원 바닥에서 화려하게 피어오른 얼음 꽃 한 무더기를 바라보며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가 이곳에 포로로 잡혀 온 지도 두 달이 가까워져 가고, 헤스페론이 새로운 입주자가 된 지는 한 달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방금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바로, 근 한 달 동안 그녀의 입버릇이 되어버린 문장이었다.

어찌나 입에 달라붙었는지, 이젠 그냥 습관적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헤론, 방금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나요?”

“엇?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니, 딱히 잘못이랄 건 없죠. 그저 제가 십 년 넘게 걸려서 이룩한 경지를 당신이 막 넘어섰을 뿐이니까요. 그것도 고작 한 달 조금 넘어서.”

“어라?”

라일리는 얼빵한 얼굴로 눈만 껌벅거리는 그를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11살 때 한 달도 되지 않아 이세아에게 추월당했을 때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그때 이후로 무려 8년인데···. 그런데 세아 때보다 고작 며칠을 더 버는 게 한계였단 말이지?’

심지어 그것마저, 마법에 대한 재능이 부족했던 그녀가 이론으로만 파고들었던 지식까지 모두 전수하는 데 들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수련에 도움이 되는 마법서나 마도구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건도 아닌데도!

‘아··· 마법, 열심히 안 해서 다행이다.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 연달아 추월당했다면 분명 마음이 꺾였을 거야.’

그렇게 황녀가 애써 자신을 합리화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헤스페론은 멍한 눈으로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마법학개론」을 획득합니다.》

‘과연, 생각 이상으로 이론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도 생기네.’

라일리 황녀는 재능의 한계로 마법사로서의 경지가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제국의 황녀인 그녀가 접한 가르침이 낮은 수준일 리 없었다.

거기다 머리가 좋은 만큼 기억력도 좋아 지식에 왜곡이 생길 일도 없었으니, 이런 스킬이 생긴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후우, 뭐 좋아. 어차피 난 진짜 마법사도 아닌데···. 이건 그냥 교양 수준으로 배운 것일 뿐이고···? 누가 뭐래도 난 황제가 될 몸이니까···.”

“아— 물론이지, 라일리. 그러니 이만 진정해.”

“존칭!”

인상을 찌푸리며 꿍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슬쩍 끼어들었더니 그건 또 귀신같이 반응해 온다.

그걸로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

하지만 이것도 전부, 눈치 없고 순진한 이세계 청년 헤스페론이 아직 신분제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그녀가 지구인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리미리 약을 쳐두지 않으면 나중에 다른 지구인··· 이세아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도 됐지. ···황녀 탈출 시나리오로.’

당초 목적대로 어느 정도 친해졌는지 라일리도 그를 편하게 부르기 시작했고, 덤으로 본격적인 마법사로서의 첫발까지 내디뎠으니 당장 얻을만한 건 다 얻은 셈이었다.

그녀가 소환 마법에 관심이 없어 이번에 자세히 배우지 못한 건 아쉽긴 해도, 그건 황녀님의 곁에 있다 보면 나중에 얼마든 기회가 있을 터.

사실 한스를 이용한다면 당장이라도 배울 수는 있겠으나, 헤스페론이 지구의 각성자로서 황녀와 접촉한 이상 강해지기 위해선 당위성이 필요한 법이었다.

‘자··· 그럼 어떻··· 응?’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던 와중.

그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다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잠시 멈칫했다.

《업적 달성!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救世)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살아 있는 지성체 절반 이상이 악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당신을 인지했습니다. 보상으로 특전 「영웅의 발자취」를 부여합니다.》

《업적을 달성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르마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메시지는 초보 마법사 헤스페론이 아닌, 용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의 앞에 떠오른 문장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