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영웅의 발자취 (3)
헤스페론의 입에서 탈출에 관한 주제가 나온 순간, 라일리 황녀는 저도 모르게 사방을 살피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녀가 이곳 불사성에 감금당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가까워지는 시점.
방심하는 순간 하루 만에 적과 아군이 뒤바뀌기도 하는 정치판에서 두 달은 치명적일 정도로 긴 시간이었고, 자연스레 파벌의 수장인 그녀의 마음도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 이세아가 빨리 자신을 구하려고 무리하다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탈출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주변에 간단한 방음 결계가 쳐져 있긴 했지만, 이곳은 불사왕의 본거지인 만큼 이런 저급한 보안 수준이 얼마나 통용될지···.
‘잠깐?’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도 잠시.
곧 그 말을 꺼낸 이가 이제 막 이 세계로 넘어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심지어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마법을 배우던 상황이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갑자기 그런 농담을 할 사람도 아닌데. 혹시 정말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국 그녀는 정말로 믿는다기보다는,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은 미묘한 기색만 내비칠 뿐이었다.
“···어떻게요?”
“어라? 못 믿으시나 보네?”
“후우, 저도 믿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고작 두 달 있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자칫하다간 몇 년이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처음엔 자신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휴양을 온 셈 치고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했다.
그러나 처한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녀의 자기 최면에 가까운 마인드 컨트롤도 이젠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마 헤스페론이 없었으면 이 두 달에 가까운 기간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마법을 가르치며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도 상황을 외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기어코 경지까지 추월당한 지금은 앞으로가 막막할 뿐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그가 익살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 고유스킬이 뭔지, 아직 말하지 않았었죠?”
그 말에 라일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호기심에 넌지시 물어본 적도 있었으나, 그때는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뭔데요?”
원래 상대의 능력을 캐묻는 것 자체가 실례였던지라 그 후론 그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말해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기대 어린 반응에 헤스페론은 가타부타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자신의 고유스킬···이라고 주장하는 무언가의 능력을.
가볍게 손을 허공으로 뻗은 그의 손에는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고기들이 꿰인 꼬치가 하나 쥐여 있었다.
“···꼬치? ···아니, 아공간?”
그에 라일리가 저도 모르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그것에 집중하며 저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렸다.
이곳 성에서 제공되는 식사도 그리 나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황족이었던 그녀를 만족시킬 정도로 썩 좋지도 않았거늘.
저 먹음직스러운 자태의 고기는 갓 조리된 듯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따끈따끈한 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자극적인 냄새가 그녀의 침샘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보관 상태를 보니 확실히 단순한 아공간은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저런 능력으로 어떻게 탈출하겠다는 건지···.’
“자, 여기.”
그런 부정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헤스페론이 건네주는 대로 홀린 듯이 꼬치를 받아 들었다가 순간 아차 했다.
하지만 이미 손에 들어온 음식을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이제 와서 내숭 떨 상대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그냥 욕망이 시키는 대로 고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콧속을 파고드는 불향과 입안을 채우는 탱글탱글한 식감, 이빨 사이로 으깨지는 고기 사이로 폭발적인 육즙이 터져 나오며 달짝지근한 소스와 한데 어우러졌다.
온갖 산해진미를 맛봐왔던 그녀의 기준에선 그리 고급스러운 요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 이곳에서 먹어왔던 음식들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뛰어난 맛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어지간한 고급 요리보다 이쪽이 훨씬 더 취향이었다.
“···이거, 설마 지구에서 가져온 건가요?”
“아니, 아공간에서 꺼낸 게 아닙니다.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음식이죠. 난 그것을 일정 대가를 지불하고 이곳에 불러냈을 뿐이고.”
정확히는 문어발식 확장을 꾀하고 있는 휴버트 상회가 출자해 세운 후, 타라크의 명물로 거듭난 식당 ‘오크와 함께 춤을’에서 공수한 꼬치였다.
거기에 들어간 조미료나 소스 등이 지구산이기는 했으나, 음식 자체는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이 맞았다.
“소환계 능력? 그래서 소환 마법에 관심이 많았던 거군요?”
“조금 다르지만···. 뭐,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으려나?”
모호한 대답에 라일리의 미간에 살포시 주름이 접혔다.
또 아까부터 살살 말을 놓으려는 시도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어느새 전부 먹어 치운 꼬치의 막대기를 까딱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환만 가능한 게 아니라, 특정 조건에 따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에 가깝죠. 또 이번에 마법을 배우며 깨달음을 얻은 덕인지, 스킬이 진화해 다른 방식으로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녀의 눈치를 살피듯이 그가 다시 공손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얄밉긴 했으나, 그 정도는 이후 이어진 말의 내용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게 바로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죠.”
그의 말이 끝난 직후, 눈을 부릅뜬 라일리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정말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면 탈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심지어 꼬치를 소환한 것을 보니 이 불사왕의 성 내부에서도 능력을 발동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고.
헤스페론은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완전체 할리라도 소환해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정면으로 뚫고 나가기엔 이 불사성의 수준이 너무 높단 말이야. 역시 몰래 도망가는 쪽이 훨씬 깔끔하고 설득력 있지.’
그래서 「아바타 클라우드」와 「영웅의 발자취」를 대충 뒤섞어서 적당한 공간계 스킬을 하나 창작했다.
급조한 스킬인 만큼 아직 그 이름도 조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상세한 내용은 비밀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심산이니 별로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럼, 당장이라도···!”
“아, 그런데 거기엔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단호한 말투로 그녀의 기대감에 찬물부터 부었다.
아직 자신이 부족한 탓인지 다른 사람과 함께 이동하는 것은 조금 힘들다는 것.
그 말에 다시 라일리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축 늘어졌다.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타듯 다채롭게 변화하는 표정이 재미있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거기서 제가 한 가지 생각한 게 있습니다만···.”
이 극한의 환경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다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은 정도의 유대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언제 어떻게 끊어질지 알 수 없는 얕은 인연.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라일리가 돌아가게 된다면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가 될 텐데, 그 옆에만 붙어있어도 온갖 기회가 쏟아질 거야. 각성자로서 생길 이세아와의 인연도 도움이 될 테고.’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번 기회에 강제로라도 연결 고리를 남기는 것이었다.
“완전한 타인은 아직 좀 힘들지만, 저희가 계약으로 묶이게 된다면 그 가능성이 좀 더 올라가지 않을까요?”
“···계약?”
다행히 계약 마법은 그들 수준에서도 쓸 수 있는 범용 마법이었다.
시전자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성능이 증가하는 만큼, 반대의 경우라면 그리 큰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으나···.
“고작 저희 정도 수준의 마법사끼리의 계약 마법에 그 정도의 구속력이 있을까요?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아, 그건 괜찮습니다.”
헤스페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시전자와 피시전사 사이를 더욱 강하게 묶어주며, 계약 시 추가 보정까지 해주는 「결속의 끈」이라는 스킬이 있었으니까.
‘그걸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예정된 대탈출의 날로부터 고작 며칠 전.
이세계에 전이된 지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은 초보 각성자, 헤스페론이 세계 최강대국의 유력한 후계자에게 튼튼한 빨대를 꽂는 데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
신(新) 탈리아 왕국은 빠른 변화와 함께 여러 종류의 몸살을 앓았다.
아무리 온갖 상황을 상정해 대처 방안을 강구하고 미리 준비까지 했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근간이 바뀌는 일에 진통이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탈리아 왕국의 수도, 탈라리아의 중심부에 자리한 왕성.
주인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화려한 왕의 집무실 안에서 ‘하인즈 하이브리드 2세’가 밑에서 올라온 서류들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쯧, 역시 생각대로 일이 쉽게만 풀리지는 않는군.”
그는 뱀파이어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으나, 원래 세상사라는 게 뜻대로만 흘러가진 않는 법이었다.
변화에 반발하는 인간들과 그의 뜻을 곡해하는 뱀파이어들 간의 갈등이 각지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니, 이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앞으로도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듯싶었다.
‘그래도 관리들 쪽은 철저하게 신경 쓴 만큼 별다른 잡음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쪽마저 문제였으면 상당히 귀찮아질 뻔했는데.’
그 대신 그들에게 쏟아지는 과중한 업무에 공직자들이 갈려 나가고 있었지만, 그럴 때를 대비해 미리 갖춰두었던 안배가 이 순간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피로 회복 포션부터 시작해서 잠을 쫓는 각성 포션, 생명력을 북돋워 주는 활력 포션과 그 외 온갖 건강 포션들까지!
뱀파이어에 비해 나약한 인간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해주다니, 과연 모두를 생각하는 현명한 군주다운 선견지명이지 않은가?
그렇게 저 혼자 자화자찬하던 하인즈는 이내 다시 서류를 뒤적이며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역시 부려 먹기는 뱀파이어가 편하단 말이지. 개체수를 조절해야 하니 무분별하게 늘릴 수는 없지만, 당분간은 계속 공무원 쪽 지원자들을 우선하라고 해 둬야겠어.’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 인간과의 차별은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 하나, 아무래도 지배층인 뱀파이어들에게 좀 더 혜택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인간들과는 달리, 하인즈에게 종속된 뱀파이어들은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혜택은 혜택일 뿐, 철저한 실력주의를 표방하는 신 탈리아 왕국에서는 능력만 있다면 순수한 인간도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야 일이 편해지니까. 멍청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괜히 나만 피곤해지지.’
실무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이들에게 맡기고, 그쪽에 재능이 없는 뱀파이어들은 감찰관과 각 지역 치안 책임자 등으로 삼아 전국으로 퍼뜨렸다.
대체로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는 구 왕국의 귀족들이 관직도 겸하고 있었으나, 개중엔 평민임에도 빠르게 두각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을 발굴하는 것도 뱀파이어 감찰관들의 임무였으니, 아마 왕국은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안정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당장이지만. 인간들은 그렇다 치고, 뱀파이어 쪽에서도 이렇게 문제가 터져 나올 줄이야.’
미리 충분히 주지시켜두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간 오랜 세월 쌓인 선민의식과 우월감 등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듯싶었다.
그런 경우는 일단 경고를 주고, 이후에도 시정되지 않고 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그 녀석은 어쩔 수 없이 혈정의 재료로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겠지.
[로드, 브리키 님이 오셨습니다. 들여보낼까요?]
그때, 왕성 곳곳에 깔린 친위대로부터 텔레파시가 전해져왔다.
모종의 임무를 떠났던 하이브리드의 또 다른 성혈, 브리키가 돌아왔다고.
[들여보내.]
그리고 당연히 성혈이 직접 나선 만큼, 그녀가 맡았던 임무의 중요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성혈씩이나 되는 존재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특히 이런 일에는 그만한 적임자도 없으니.’
그래, 하이브리드의 이다음 목표는.
‘아우테리카 뱀파이어 클랜 연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업.
바로 전 대륙의 뱀파이어 클랜을 하나로 일통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