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79화 (179/284)

#179

마왕성 탈출 작전 (1)

동이 트며 아침을 맞이한 이온 대륙 서북부의 대도시 타라크.

이곳은 한밤중에도 그리 조용하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번화한 도시였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은 그 분주함이 밤과는 차원이 달랐다.

끼익—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려, 항상 마차 조심허고!”

그리고 얼마 전에 타라크로 이사 온 디아나 또한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하지만 그렇게 서두르는 와중에도 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는데—.

이곳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주변 모든 것들이 낯설었으나, 지금의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 집도 그렇고! 일단 무기한 임대라는 형식이긴 하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이 아담한 주택은 식료품점에 딸린 생활공간에서 다섯 가족이 살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고,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시설은 따로 보수할 구석도 없었다.

심지어 그 입지 또한 치안이 좋은 중심 구역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집값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모조리 갖춘, 말 그대로 ‘비싸 보이는 집’ 그 자체였다.

그러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

“앗! 안녕하세요, 할머니!”

그렇게 분주히 문을 나서던 디아나는 이젠 익숙해진 이웃을 발견하고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그 목소리에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바람을 쐬던 옆집 노파가 문신이 가득한 얼굴을 그녀에게로 향하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끌끌끌··· 그래, 벌써 출근하는가? 매일 아침 부지런하구먼.”

“에헤헤, 아직 한창 배우는 중이어서요. 하인··· 휴버트 회주님이 믿고 맡겨주셨는데, 실망을 끼쳐 드릴 수는 없죠!”

“아직 어린데 기특하기도 허지. 흘흘···.”

처음엔 옆집에 무서워 보이는 할머니가 산다는 것을 알고 걱정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어린아이들에게 무척이나 다정다감했다.

진짜 친할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군것질거리를 쥐여 주는 건 물론, 이런저런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는 거침없는 입담까지.

그 덕분에 처음엔 경계하던 아이들도 어느새 그녀와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어린 라피는 둘째 치고 낯을 가리던 남동생 아론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옆집에 놀러 갈 정도였으니까.

‘저 할머니도 우리랑 마찬가지로 휴버트 상회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믿는 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물론 불과 얼마 전에 배신을 경험한 디아나로선 함부로 믿음을 주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의심만 하며 살 수도 없으니 그녀도 어느 정도 노력할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적어도 신뢰할 수 있는 이에게 검증된 상대에게만큼은 마음을 열도록 애써 봐야겠지.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래, 가는 길 조심허고. 뭐··· 적어도 이 거리에서는 그리 걱정할 필요도 없겠다만.”

휴버트 상회는 이제 명실상부 타라크 상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대표 상단이었다.

교단과 영주 일가에 걸친 빵빵한 인맥부터 시작해, 독점으로 공급하는 독특하고 뛰어난 상품들, 재능 있는 상인들을 한순간에 휘하로 끌어들이는 막대한 자본력, 거기다 알 수 없는 수단을 이용한 암투의 우위 등···.

그런 여러 요소에 힘입어 그들은 출범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서 순식간에 시장을 잠식해 나갔고, 지금 그녀들이 있는 이 구역은 휴버트 상회의 힘이 가장 크게 미치는 안마당이었다.

킁킁—

길을 걷던 디아나의 코가 연신 씰룩거렸다.

이제는 친숙하게도 느껴지는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모종의 뒷거래로 이쪽 거리를 집중적으로 순찰하게 된 도시 치안대와 상권에 배치되어 요인과 상가를 지키는 휴버트 상회 소속 경비팀.

그리고 거기에 더해···.

도시 곳곳의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풍겨 나오는, 비릿한 혈향까지.

‘설마 이 냄새를 맡고 안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때는 공포에 떨며 피해 다니기만 했던 냄새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없으면 불안해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이 주변의 흡혈귀들은 전부 아저씨의 명령을 듣는 이들이었으니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아저씨가 흡혈귀가 된 지 고작 2년 정도였던 거 같은데, 도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하셨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신 거지?’

지금 당장 타라크에 깔린 부하들도 그렇고, 이전부터 수월하게 진행되었던 이민 절차를 생각해 보면 높아도 보통 높은 위치가 아닌 듯했다.

소문으로 들려오는 탈리아 왕국의 상황까지 따져보면··· 정말 고위 귀족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터.

‘뭐, 굳이 그런 것까지 내가 알 필요는 없겠지. 그냥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그러나 디아나는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고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상회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평범하게 식료품 납품 관련 일을 하게 된 숙부와 달리 휴버트의 입김이 닿은 그녀가 맡은 책무는 상당히 막중했다.

상회에서 취급하는 물건들의 이상 여부를 전체적으로 점검하고, 품질을 일정하게 관리하는 일종의 감사관과 같은 위치였으니까.

당연히 그 낙하산 인사에 반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현재 상회 내에서 휴버트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던지라, 다들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솔직히 불안하긴 한데,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어떻게든 해 보는 수밖에.’

그렇게 디아나가 굳은 결의와 함께 상회 본점에 다다랐을 무렵.

웅성웅성—

그 인근에서 평소 이상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반가운 냄새도 함께.

“앗, 상회주님. 안녕하세요!”

“그래, 디아나. 오늘도 이렇게 일찍 오고. 역시 부지런하구나.”

때마침 그녀와 마찬가지로 상회 건물로 향하던 휴버트와 도중에 마주친 것이었다.

그런데 여유롭게 그녀를 응대하는 그의 태도와 달리, 뭔가 그 주변을 둘러싼 직속 경호원들의 반응이 평소와 좀 달랐는데···.

소수를 제외하면 멀찍이 떨어져서 호위하던 전과는 다르게 모두가 사방을 철저히 에워싼 건 물론, 접근하는 디아나에게까지 경계심을 표출하는 등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라? 그리고 이 냄새는···.’

거기다 몇몇은 전투까지 치렀는지 몸 곳곳의 상처와 무기에서 미묘한 피 냄새를 풍기고 있을 지경이었으니.

분명 여기까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저기,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음? 아아— 별거 아니다. 주기적으로 있는 일일 뿐이니까. 가끔 있단 말이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들이박는 놈들이.”

그녀의 물음에 태평하게 대답하는 휴버트.

이미 철저하게 대비를 갖춰 두었던 그는 고개를 갸웃하는 디아나를 데리고 상회 본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름대로 문명과 법치가 발달한 지구에서조차 이권이 걸리면 온갖 더러운 수작이 따라붙는데, 그보다 훨씬 야만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상회를 운영하는데 위협이 따르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당연히 그에 대비하는 것은 이곳의 상식이었고, 이를 사주한 놈들도 한 번에 성공하리라 보고 시도한 건 아닐 터였다.

그저 겁을 주기 위해 위협도 할 겸, 혹시 모르니 간도 볼 겸 의례적으로 시도해 본 거겠지.

‘감히 이 나를 상대로 말이야.’

당연하지만 휴버트 상회를 이렇게 키우기까지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벌어들인 자금의 상당수를 그에 대비하는 데 재투자할 수밖에 없기도 했고.

아마 사업 초기에 할리와 그 친구들의 도움이, 나중엔 브로코슬락 클랜의 조력이 없었으면 이렇게 성장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유페르쉬 클랜의 습격이 있고 나서부턴 기존 대비로도 불안해, 온갖 값비싼 마도구로 전신을 둘둘 두르고 있긴 했지만.

하지만 지금의 현실이 말해주듯, 그런 수많은 암투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언제나 그의 승리였다.

그럴 수밖에.

놈들은 그저 제법 커다란 상단을 상정하고 수작을 부렸을 터이나, 그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이는 조직의 규모는 절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자, 그럼··· 이번 일을 사주한 놈들은 또 누군지 한번 조사해 볼까?’

당연히 그놈들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이제는 국가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무색할 만큼 무너져 내린 로한 공국.

그들은 제국과 교단의 도움으로 수도 인근에 최후의 방어선을 꾸려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할 수 있었던 것도 불사왕 덕분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는데···.

그가 가장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밀려 내려오던 북쪽 방면의 산맥에 자리를 잡으며 방파제가 된 덕에 공국을 침공한 마물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한 게 원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사태 자체를 불사왕이 일으킨 것이라 믿고 있는 만큼 그것을 고마워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가 또 무언가의 변덕으로 그들을 조롱하고 있다고 여길 뿐.

그리고 그 사태의 중심지—.

아직 직접 본 이는 아무도 없지만 그 존재만은 익히 알려진 마왕성··· 아니, 불사성에서 짧지 않은 감금 생활을 청산하고 탈출을 꿈꾸는 이들이 있었으니.

“헤론, 그래서 오늘은 어떻죠? 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으음, 잠시만···. 이거 애매하군.”

바로 아제리온 제국의 5황녀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과, 전이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지구의 신참 각성자 헤스페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결계를 두르고 한창 마법 수련에 열중하던 도중.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듯 조심스럽게 던진 라일리의 질문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일 자체는 언제든 시작할 수 있으니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뜸 들이는 과정에 가까웠는데,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슬슬 그녀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찾아온 듯싶었다.

“후우— 전 요즘 떨려서 잠도 못 자고 있는데, 당신은 참 여유로워 보이네요? 그거, 정말 가능하긴 한 거죠?”

자신만 서두르는 것 같은 상황이 못마땅했을까.

지금까지 조용히 잘 기다리던 그녀가 결국 한숨과 함께 투정 부리듯 입술을 삐죽였다.

“어허,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난 이 세계에 전이되자마자 곧바로 잡혀 와서 이곳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당연히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공간계 능력에서 정확한 위치 파악은 선택이 아닌 필수.

그 유용함과 비례해 위험성 또한 높은 만큼, 자칫 잘못하다간 차라리 사용하지 않느니만 못한 대참사가 벌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곳은 대륙의 북쪽 끝일 테니, 어떻게든 무조건 남쪽으로만 방향을 잡는다면···.”

“여기서 남쪽이 어디라고 생각해?”

“···윽.”

마법사로서의 경지가 높지 않은 그들이, 별개의 공간이나 다름없는 이 불사성 내부에서 바깥의 방위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애써 외면하던 현실을 직시한 라일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럼,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요?”

“그럴 리가. 사실 어느 정도 대충 감은 잡았어.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신중을 기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러다 다시금 던져진 희망에 그녀의 표정이 재차 밝아졌다.

역시 극한의 상황이라서인지 철혈 황녀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게 다채로운 표정 변화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너무 말을 편하게 하는 거 아닌가요?”

“에이, 뭐 어때? 이제 우린 운명 공동체인데! 편하게 하자고, 편하게! 하하핫!”

그래도 마법을 배울 때는 잠깐이나마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했거늘.

이젠 자신이 확실한 우위라 여겼는지 뻔뻔하기까지 한 헤스페론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어렸다.

그런데 그가 지금 상황을 타개할 열쇠를 쥐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하아— 부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하도록 하세요. 당신이 있던 곳과는 달리 이곳은 신분에 민감한 이들이 잔뜩 있으니까. 정말로 큰일 날 수 있다고요?”

결국 라일리는 한숨과 함께 그와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동안 그녀가 평대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도 이세아에게 지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지, 딱히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황녀를 편하게 대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괜히 나중에 밖에서 실수하게 될 확률만 높아지지 않겠는가?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을 겪는 것은 결국 그였으니 지금부터 미리미리 입 조심하게 해둘 생각이었는데···.

‘이젠 나도 모르겠다.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 밖에선 알아서 조심하겠지. ···하는 짓을 보면 조금 못미덥긴 하지만.’

라일리는 이지적인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은 능글맞은 표정의 그를 바라보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를 믿고 맡겨도 될지 한 번 더 고민하며.

하지만 역시 결론은 하나였다.

‘두 달이 지난 지금도 불안한데, 몇 년이나 이 안에 있을 수는 없어! 그때쯤이면 더 이상 판을 뒤집을 기회도 없을 거야.’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보자는 것.

‘고유스킬’의 대단함은 이세아의 경우로도 충분히 겪었던 만큼, 충분히 믿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판단한 것도 있었다.

또 헤스페론의 재능이 그녀 이상이었다는 것도 단단히 한몫했고.

‘···제발,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대륙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

바야흐로 대탈출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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