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80화 (180/284)

#180

마왕성 탈출 작전 (2)

시아나는 불사성 내의 거주 구역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제국 귀족이라는 신분을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

사실 한미한 귀족가를 집어삼킨 것도 좀 더 고위층으로의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만큼, 불사의 군대에 속하게 된 지금은 딱히 지위에 집착할 필요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간 공들인 게 있는데 그냥 버리기에도 아깝지 않겠는가?

다행히 그녀의 주인인 불사왕 한스도 그것에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시아나가 주기적으로 가문에 방문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이 답답하고 퀴퀴한 공간에서 벗어나 재차 귀족스러운 삶을 만끽할 수 있는 휴가나 다름없었으니.

“흠흠~♪”

그 당일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 것도 딱히 이상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자마자 최고급 홍차와 케이크로 입가심부터 해야겠어. 그다음은 쇼핑하면서 사치를 즐겨야지. 이젠 돈 따윈 의미도 없으니 아끼지 말고 팍팍 쓰자. 일단 그동안 놓쳤을 구두 컬렉션부터 채우고···.’

나가게 되면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활기찬 발걸음으로 음침한 성내를 거니는 시아나.

그렇게 불사왕께서 몸소 설치해 주신 이동 마법진으로 향하기 전, 당분간 자리를 비울 것에 대비해 마지막으로 관할 구역을 둘러보던 그녀는···.

거주지의 식당에서 심상치 않은 몰골의 언데드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세상에, 앤드류? 정말 앤드류 당신인가요?”

“아? 하,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누님.”

아니··· 자세히 보니 언데드가 아니라 사람, 그것도 그녀와 함께 이곳에 끌려온 지구 출신의 각성자 앤드류 위버였다.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초췌한 안색과 언제 씻었는지 떡 진 머리, 눈두덩이의 짙은 다크 서클에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까지.

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안에 퍼 넣던 그는 시아나의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니 괜찮냐고 물어봐도 의미가 없겠군요. 아무리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으니.”

“아하핫··· 아, 간만에 반가운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군요. 요즘 하도 보지 못해서 이미 저 같은 건 잊어버린 줄 알았지 뭡니까?”

“크흠, 그건 어쩔 수 없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그래도 저번에 올리비아에게 넌지시 한마디 해 두긴 했는데···.”

기운 없는 목소리임에도 뼈가 있는 그의 말에 그녀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얼마 전에 생각나서 한 번 찾아가 볼까 싶었다가 금방 다시 까먹은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뭐,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생각해 보면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없잖아?’

물론 악마족답게 그녀의 미안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상하관계인 데다 지금은 입대 동기에 불과한데, 그래도 이렇게나마 챙겨주는 게 어디랴.

“그런데 일이 많이 힘든가요? 당신이라면 적당히 요령껏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능력을 사용하는 데 티가 나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눈 감고 앉아서 쉬엄쉬엄하면 될 텐데.

천성이 게으른 그가 육체노동이 주도 아닌 일에 저렇게 혹사당한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도 그렇게 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만. 그 여자, 그런 건 또 귀신같이 잡아내더군요. 제 몸의 생체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아, 과연.”

언데드의 기본 능력인 생명력 감지.

확실히 올리비아 정도 되는 존재라면 그걸 이용해 당사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말 그대로 진짜 귀신이기도 했고.

“그걸 몇 번 걸린 후로는··· 아예 할당량까지 정해져 버렸습니다. 그걸 채우지 못하면 숙소에도 돌아갈 수 없었고요! 그 언데드와 흑마력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도 없게 하다니, 완전 악마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되새길수록 분통이 터지는지 힘없이 말하던 앤드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그 말에 진짜 악마인 시아나의 기분도 덩달아 나빠졌다.

악마들에게 악마 같다는 말은 칭찬이나 다름없었으나, 그걸 저렇게 욕처럼 사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 않은가.

“예, 예. 아직 기운이 남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지금 그렇게 떠들 여유가 있나요? 빨리 식사를 끝내고 조금이라도 자 두는 게 좋을 텐데.”

“윽! 그, 그렇죠.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 아니, 그런데 누님이 먼저 말을 걸었으면서···.”

그녀의 핀잔에 구시렁거리던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입안에 음식을 꾸역꾸역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시아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돌려 다시 구역 점검에 나섰다.

일단 오랜만에 인사는 했으니 빨리 자신이 맡은 일을 끝내고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생각으로.

그렇게 마음이 급했기에— 그녀는 식당에 남은 앤드류의 수상한 기색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후우—.”

뭔가 홀가분하면서도 아쉬움이 깃든 눈길로 시아나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것도 잠시, 그는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도 보기 힘들었으니 시아나 누님과는 이걸로 마지막이겠군. 이별이 이런 식이란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아우테리카에 전이된 지도 9년이 훌쩍 넘은 시점.

마침내 귀환을 목전에 둔 그는 앞으로 조금 남은 시간을 버티기 위해 전투적으로 식사를 이어 나갔다.

‘이제··· 이제 곧,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오직, 이 지옥에서의 탈출을 꿈꾸며.

***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된 불사성의 제2 거주 구역.

“···오늘이죠?”

“오늘이지.”

그곳에서 평소와 같이 마법 수련에 매진하던 라일리 황녀와 헤스페론이 나지막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곳, 불사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되찾을 될 날이.

“마침 상황도 나쁘지 않아요. 우리를 감시하던 그 리리스라는 여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건, 곧바로 이변을 알아채고 대응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당분간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식사는 알아서 하라며 그녀가 식량을 잔뜩 놓고 간 게 불과 어제 일이었다.

원래라면 포로인 그들에게 그런 정보를 알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곳도 일반적인 감옥이 아니었던 만큼 그 정도는 별다른 문제도 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엔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한 가지 따랐는데···.

“그래도 그동안 저 얼굴을 보지 않아서 마음이 편했는데 말이죠. 이건 좀 아쉽게 됐네요.”

“뭘 그렇게 속닥거리는 거지? 라일리? 아주 태평해 보이는구나. 그동안 놈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꽤나 편하게 지냈나 봐? 가축처럼 말이지.”

바로 그동안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던 황태자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곳에 감금된 초기에는 앤드류에 의해서, 그 이후엔 시아나의 노리개가 되었던 사이먼 카르테 아제리온 황태자.

그는 매일같이 이어지는 괴롭힘에 혼자 있을 때도 숙소에 틀어박혀 지친 몸을 달래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제부터 하루 종일 쉬었다고 기어코 이렇게 나돌아 다닐 정도로 체력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역시 좋은 걸 많이 먹고 자라서 그런가. 체력 하난 끝내주는군.’

더군다나 그는 기사로서 제법 단련된 몸을 가지기도 했으니 아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물론 시아나는 그걸 보고 튼튼하다며 더 좋아할 뿐이었지만.

“어머, 오라버니 아니십니까? 오늘 분의 세탁과 청소는 모두 끝내고 나오신 건지요? 하루라도 잊었다간 나중에 혼나실지도 모른답니다? 복종 훈련이 부족했다고 말이지요.”

“크읏! 너, 너···!”

괜히 먼저 시비 걸었다가 아픈 구석을 찔린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애초에 말싸움으로는 이길 구석이 없는데 왜 먼저 싸움을 걸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 끼리끼리 잘도 어울리는구나. 그런 정체도 모를 놈팡이와 붙어먹다니. 역시 비천한 피는 속일 수 없는 건가?”

결국 그는 가만히 옆에 있던 헤스페론까지 끌어들여 그녀의 외가 전체를 깔아뭉개고 나섰고.

그에 이번엔 라일리의 눈썹이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외가도 엄연한 귀족가이긴 했으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상인 가문 출신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심지어 외조모 또한 부유한 상인가에서 시집온 케이스였으니, 황태자를 필두로 한 보수 세력들이 물어뜯는 단골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그녀가 재차 입을 열며 반격하려던 순간.

“거참.”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헤스페론이 뒷머리를 긁으며 슬쩍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패드립은 선 넘었지.’

게다가 따지고 보면 비천한 피 어쩌고는 자신도 포함해서 한 말이 아닌가?

그도 나름 귀하게 태어나 외동아들로 곱게 자란 몸이거늘, 이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폭언이었다.

“황태자라는 인간이 동생에게 말하는 꼬라지가 참 가관이네. 그래 놓고 품위 따지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니까?”

“···뭐냐? 네놈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

그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이제 와서 왜 끼어드냐니.

그의 자기중심적인 평소 사고방식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지 않나.

아무래도 그동안의 훈련이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시아나에게 한 소리 해야겠군.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장난감이라고 너무 오냐오냐한 것 같아.’

한 달을 넘게 매일 같이 시달렸을 텐데 아직도 기가 죽지 않은 저 태도를 보아하니 에고가 어지간히 높은 듯싶었다.

저런 상대를 온전히 복종시키기 위해선 꾸준한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법이거늘.

“역시 이건 주인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지. 교육이 부족하니까 이렇게 키우던 짐승이 밖에 뛰쳐나와서 아무에게나 이빨을 들이밀잖아? 조련사의 실력이 그리 좋지 못한 것 같네.”

빠득—!

“···헤론?”

그렇게 척 보기에도 별것 없어 보이는 하층민까지 자기를 조롱하고 나서자, 사이먼의 이빨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일리 또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건 마찬가지.

같은 황족인 그녀에게야 일상인 일이었지만, 자존심 강한 황태자의 성격상 급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이가 그를 모욕했을 때 벌어질 일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거기다 지금은 상황을 통제할 감시자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으니···.

“흐— 그래.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지 않아도 요즘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죽이지만 않으면 놈들도 크게 뭐라 하지는 않겠지.”

이어진 그의 반응은 역시나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잠깐만요. 지금 여기서 무력을 사용하실 생각···!”

그에 그녀가 황급히 사태를 수습하려 들었으나, 사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던 사이먼은 이미 인내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에 그리 좋지 않은 몸으로 굳이 이렇게 밖으로 나왔던 것도 그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어떻게든 발산하기 위함이었으니, 이건 오히려 좋은 핑계라고 할 수 있겠지.

우우웅—

작정한 듯 망설임 없이 피어오른 오러가 한순간에 그의 육체를 강화하며 무뎌진 전투 감각을 예리하게 끌어올렸다.

그 또한 라일리처럼 수련에 매진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와 제법 훌륭한 재능은 그를 한 사람의 기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크흐흣— 어디, 그 주둥이만큼의 실력이 되는지 한번 볼까?”

최소한 이제야 고작 초급 마법사를 벗어난 두 사람이 맞설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지금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한층 날카로워진 기감으로 재차 상대의 경지를 파악한 사이먼 황태자 또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의 수준으로는 자신을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헤론! 일단···!”

그는 다급히 뭐라 입을 여는 라일리의 말을 끊고—.

콰아앙!

“바닥을 기게 해 주마! 천한 것아!”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린 채, 땅을 박차 헤스페론에게 짓쳐들었다.

상대의 얼굴을 짓뭉갤 듯 바람을 가르고 뻗어지는 주먹.

그리고 그는···.

퍼억!

“크헥!”

쿠당탕—!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 회피와 반격에 정타를 허용하고 그대로 땅을 나뒹굴었다.

본인의 말처럼 바닥을 기듯이.

“크윽, 이게··· 무슨?”

“···어라?”

그 예상 밖의 상황에 당사자인 사이먼은 물론 황급히 마법을 준비하던 라일리까지 눈을 깜박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위 기사는 아니었으나, 평기사 중에서는 제법 높은 수준에 도달한 이였다.

애초에 기사란 전투 기술만을 갈고닦는 인간 병기.

별다른 준비도 되지 않은 하급 마법사 따위가 저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는데···.

“성격도 급하고. 어떻게 이런 인간이 황태자인지 참. 제국이란 곳의 앞날이 걱정이네.”

하지만 헤스페론은 그런 그들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며 가볍게 툴툴거릴 뿐이었다.

어느새 발동했는지, 전신으로 보조 마법에 의한 마력을 줄줄 흘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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