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81화 (181/284)

#181

마왕성 탈출 작전 (3)

이세계에 전송된 지구의 각성자는 모두 기본적으로 성장 보정을 받고 있었다.

같은 조건에서 무언가를 배우더라도 원주민들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

당연히 그것에도 재능에 따른 개인차가 있었지만, 지구에선 제 몸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몸치도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전사로서 활약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 쉽기만 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분야의 정점에 서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데, 정말 어지간한 천재가 아니고서야 그 기간이 약간 줄어드는 정도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이세아처럼 ‘진짜 천재’인 경우는 극도로 희귀했으니까.

당연히 당장의 생존이 급한 각성자들은 좀 더 편한 성장 방식을 병행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그것이 바로 초기에 주어지는 ‘고유스킬’과 카르마 상점을 통한 ‘스테이터스 강화’였다.

‘하지만 사기적인 잠재력을 가진 고유스킬도 초기엔 제약이 많아서 사용하기 까다로워. 당장 「아바타」도 처음엔 영 써먹을 수 없을 정도였고.’

그 한계를 빠르게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카르마 상점을 통한 강화였는데, 고유스킬의 강화 시작 포인트는 무려 30만이었다.

그저 무작정 아끼면서 모으기엔 그 전에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 까마득한 수치.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먼저 스테이터스 강화를 통해 생존력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지.’

헤스페론은 슬쩍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움직임에 따라 흐릿하게 일렁거리는 푸른 마력이 그 짧은 순간에 마법이 적용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큭, 강화 마법···? 대체 어느새···!”

사이먼 황태자가 맞은 턱을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급소를 가격당했으나, 전신을 오러로 강화한 상태였기에 다행히 한 방에 무력화되는 꼴은 피할 수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당한 만큼 꼴사나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네놈, 제법 한 수가 있는 놈이었구나. 하! 그래, 그러니 그렇게 제멋대로 입을 놀린 거겠지.”

그는 어떻게든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듯,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히 서서 재차 전투 자세를 취했다.

“거기다 주제에 무술도 좀 배운 것 같고 말이야. 그러면서 오러가 아니라 마력을 다루다니, 재능이 부족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나 보지?”

“거참, 도대체 입만 산 게 누군지.”

아직 자신은 지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싶은 것처럼 거칠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먼.

그러나 가볍게 그를 무시한 헤스페론은 급하게 준비하느라 다소 불안정했던 마법을 다시 가다듬을 뿐이었다.

우우웅—

사고가 가속하며 순간적으로 세상이 느려지고.

그 잠깐 사이에 제대로 발동한 동체 시력 향상, 반응 속도 증가, 근력 증폭 등의 소소한 버프들이 그의 몸을 한층 강화했다.

하급 마법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마력 운용이었지만, 사실 이 정도는 그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사왕 한스를 통한 간접적인 조력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당연하지. 여기에 퍼부은 포인트가 얼만데.’

마법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스테이터스는 단순히 정신력만 있는 게 아니었다.

기억력과 연산력, 추론력 등의 사고 전반에 관한 능력부터.

친화력과 항마력, 통제력 같은 마나 전반에 관한 능력까지.

그 종류가 워낙 무궁무진하기에 보통은 취약점을 보완하거나 강점을 부각하는 정도로만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뭐, 적당히 올려놓기엔 나쁘지 않군.’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카르마가 불어나는 그에게는 괜찮은 투자처에 불과했다.

모든 스테이터스의 강화 시작 포인트는 1만.

항목이 많다는 걸 감안해도 쓸 만한 능력을 강화하는 것에 비하면 껌값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단계의 포인트는 2만.

첫 강화에서 효율을 체감한 항목에만 추가 투자했는데, 아직도 그 수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에서는 4만.

요구 수치 자체는 크지 않아 제법 이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이후부터는 다수의 항목 중에 선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카르마를 이렇게 물 쓰듯 펑펑 사용할 수 없었다.

아끼고 아끼며 고심 끝에 사용처를 정하고, 그러고도 귀환에 대비해 얼마간의 포인트를 남겨둬야 하는 법이었는데···.

“···한 번 허를 찌른 걸로 기고만장하다니. 이번엔 진짜 제대로 상대해 주마.”

하지만 그때.

줄곧 무시당하던 사이먼이 나직한 말과 함께 재차 오러를 끌어올렸다.

변명하듯 계속된 자기 합리화에도 헤스페론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자존심이라도 상한 모양인지, 패배한 악당의 전매특허 같은 대사는 덤이었다.

“아까는 방심해서 당했다만! 겨우 그 정도 수준의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쿠웅—

과연 전력을 다한다는 게 허세는 아니었는지, 그는 아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쇄도해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 인간이 가진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 주는 에너지, 오러가 짙게 아른거리며 신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켰다.

어지간한 수준이라면 반응조차 하지 못할 속도.

‘확실히, 저 인간의 말도 틀린 소리는 아니지.’

당연하지만 하급 마법사에 불과한 그의 보조 마법이 완숙한 기사인 사이먼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일 리 없었다.

없는 것보단 확실히 낫지만, 그것만 믿고 있다간 단순히 험한 꼴을 보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으리라.

‘물론 그것만 믿고 있었다면··· 말이지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주먹의 궤도를 파악한 헤스페론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슬쩍 고개를 틀었다.

하인리히를 통해 간접적으로 「무도의 길」의 영향을 받은 만큼, 그 움직임에는 일체의 군더더기조차 없었다.

이어서 단단하게 땅을 딛는 보폭과 가볍게 비틀리는 허리, 그리고 옆구리 쪽에서 강하게 움켜쥐어진 주먹이 그대로 쏘아져—.

퍼억!

“커흡!”

그대로 사이먼의 명치에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왔다.

투웅! 퍼퍽! 콰득—!

그리고 급소를 가격당해 짧은 경직에 빠진 틈을 탄 연계가 그의 몸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뒤로 물러나는 발등을 밟아 움직임을 제한하고,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자 옆구리에 팔꿈치가 박혀 들었다.

반항하듯 뻗어진 주먹을 한쪽 손등으로 가볍게 흘리며, 반대쪽 손으로 노출된 겨드랑이를 노렸다.

손끝, 주먹, 팔꿈치, 무릎, 발 등···.

그야말로 전신이 무기나 다름없었다.

“크헉! 쿨럭!”

하지만 이번엔 사이먼도 확실히 각오를 다진 상태여서였을까.

그는 십여 차례가 넘는 공격을 허용한 직후임에도, 기어이 방어 자세를 취하며 몸을 비틀어 뒤로 빠져나갔다.

‘···영약 같은 걸 많이 먹어서 그런가. 오러의 질도 그렇고, 상상 이상으로 튼튼하군.’

몇 번이나 급소를 가격당한 것 치고는 아직도 제법 양호한 상태.

다른 건 둘째 치고, 그 몸을 감싼 짙은 오러가 충격을 흡수해 타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컸다.

“흐억, 헉. 아니,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무슨 마법사가 이런···!”

상대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싶었지만.

‘역시 「커스터마이징」으로 신체 능력을 깎은 게 크네. 근력이 부족하니 파괴력이 잘 안 나와.’

막대한 카르마의 수혜를 입은 것은 육체 스테이터스도 마찬가지였으나, 헤스페론은 마법사를 지향하는 만큼 아바타 생성 단계에서 상당한 조정 과정이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 「초회복」을 이용한 단련으로 부족분을 어느 정도 벌충하긴 했으나···.

‘역시 그것만으론 좀 모자랐던 것 같군.’

그나마 마법사에게도 도움이 되는 동체 시력이나 반사 신경 등은 크게 건드리지 않은 덕에, 기사인 사이먼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을 갖춰서 다행이었다.

다른 부족한 신체 능력은 선배 아바타들의 경험과 스킬들을 간접적으로 지원받아 충분히 메울 수 있었으니까.

“···헤론? 당신, 원래 무투가였나요? 마법에 대한 적성도 뛰어난데 그쪽 재능까지? 무슨 이런 불합리한···.”

어느 순간부터 구경꾼이 되어 멍하니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저도 모르게 한마디 하는 라일리 황녀.

“크흐···! 뭐지? 속도는 이쪽이 훨씬 더 빠른데 어째서···? 설마, 내 움직임을 먼저 예상했다고? 아니, 하지만 저놈은 분명히···.”

감지되는 기세와 직접 체험한 상대의 실력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혼란스러워진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황태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쓰러질 때까지 두들겨 패면 되겠지. 다행히 「초회복」도 있는 데다 체력은 그리 모자라지 않으니까.’

살벌한 생각과 함께 천천히 손을 풀며 앞으로 나서는 헤스페론까지.

그렇게 셋만이 참가한 불사성에서의 송별회는 한 사람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

전투가 시작된 지 약 한 시간 후.

“후우— 개운하네. 타격감은 물론이고 적당히 반항하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데도 좋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샌드백이로군.”

오랜만의 격한 운동을 마치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헤스페론이 상쾌하게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의 앞에는 사이먼 황태자였던 것이 너덜너덜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워낙 튼튼했던지라 좀 과하게 손을 쓰긴 했지만, 그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며칠만 정양하면 회복할 수 있을 터.

다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있었는데.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격투술」을 획득합니다.》

이 짧은 순간에 도대체 무슨 조건을 만족했는지는 몰라도 근접 전투에 관한 스킬까지 생성되었다는 것이었다.

격투에 관한 모든 행위에 추가 보정을 주는, 무투가에게는 필수라고 봐도 될 쓸 만한 능력이었다.

‘아니, 그보다 난 마법사인데.’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조금 떨떠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 생각했던 진로는 소환수로 안전을 도모하며 뒤쪽에서 우아하게 마법을 사용하는 그림이었는데, 뭔가 최전방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배틀 메이지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나 할까?

“···끝났군요. 설마 그 사이먼이 이렇게 먼지 나도록 맞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되다니. 썩 나쁘진 않은데··· 뭔가 미묘한 기분이네요.”

그때,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라일리가 복잡한 표정으로 기절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미워도 가족은 가족이라는 건지,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에 뭔가 답답한 듯한 기색으로.

“···아! 그렇구나.”

하지만 그에 헤스페론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

씁쓸하게 사이먼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탄성을 토해내더니···.

퍽!

그대로 시원하게 그를 걷어찼다.

“···라일리?”

“아닌가? 아직 잘 모르겠군요.”

그녀는 옆에서 뭐라 하건 말건,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재차 발을 휘둘렀다.

퍼억!

“아!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퍽! 퍼억!

그렇게 몇 번의 발길질이 더 이어진 후에야 그녀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후우— 역시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니까 답답한 거였어요. 언젠가 이렇게 시원하게 때려보고 싶었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걸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되네요.”

“······.”

그제야 상쾌한 얼굴로 배시시 미소를 머금는 라일리.

헤스페론은 그녀의 뺨에 튄 핏방울을 바라보다 그저 어색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음, 뭐. 네가 만족한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어차피 워낙 튼튼한 양반이니 저 가녀린 소녀가 발로 몇 번 걷어찼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로 한 사람의 기분이 나아졌다면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그보다 예상 밖의 일로 상당히 지체했는데, 이제 슬슬 움직이자. 사이먼도 기절했겠다,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니까.”

“괜찮으신가요? 조금 전까지 싸우느라 지쳤을 텐데.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아니, 괜찮아.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니까. 기회가 왔을 때 지금 바로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지 않겠어?”

그리 말한 그는 라일리에게 잡으라는 듯이 한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던 그녀도 그 말에 수긍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마치 이것이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된다는 듯이.

“간다.”

“네.”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우우웅—!

그는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그녀와 자신을 감싸고, 그대로 한계까지 기운을 운용하다가···.

[가긴 어딜 가신다는 건지요···?]

“크흡—? 쿨럭—!”

후두둑—

그 순간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마력이 역류하며 입에서 한 무더기의 선혈을 토해냈다.

“헤론!”

바로 옆에서 쓰러지는 그를 황급히 끌어안는 라일리.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녀는 긴장 어린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곧바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자욱한 안개가 깔린 주변은 몸서리쳐질 만큼 차가운 기운이 한가득 감돌고 있었다.

[소란이 일어 와 봤습니다만···. 탈출이라니, 이건 또 의외의 전개로군요···.]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귀부인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 불사성의 관리 총책임자.

밴시 퀸 올리비아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