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85화 (185/284)

#185

이세계의 지구인들 (2)

로한으로 도착한 다음 날.

헤스페론이 정신을 차리자, 4인의 용사 파티는 그의 병실에서 황녀까지 포함해 따로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애초에 그들의 최종 목표는 불사왕 한스를 쓰러뜨리는 것이지 않았는가?

그런 마당에 포로까지 되었다가 그 본거지를 탈출해 빠져나온 이들이 있었으니, 정보 수집 차원에서라도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물론 그렇게 모인 6명 중 과반수인 3명이 실은 동일 인물이라는 건 다른 이들이 알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죠. 이후로는 별거 없어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땅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동하다, 결국 그리핀에게 당할 위기에서 성자님께서 구해주신 게 전부니까.”

아무리 헤스페론이 정신을 차렸다 한들 아직 환자인 만큼,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것엔 라일리가 먼저 자진하고 나섰다.

여전히 침대에 기대앉은 그는 뭔가 추가할 부분이 있을 때만 첨언하기로 했으나, 그녀의 조곤조곤하면서도 조리 있는 말은 따로 뭐라 덧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흐음, 불사성이라. 북부 산맥 내에 불사왕의 거점이 있다는 것은 관측으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워낙 위험 지역에 있는지라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마침내 그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인리히가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듯 지그시 눈 감으며 말을 이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 정보는 이후 불사왕을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지요.”

그리고 그런 진지한 분위기는 미리 들어 대충 알고 있던 이세아와 창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지오스도 마찬가지였으니.

오직 길어지는 이야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꾸벅꾸벅 조는 할리만이 천하태평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만.”

하지만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오스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조용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불사왕과 관련한 주제가 화두에 오르자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불사왕의 성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아직 명확히 말씀해 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무려 그 밴시 퀸 올리비아의 방해 속에서도 가능했던 방법 말입니다.”

“그건, 헤스페론 씨의 특별한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아까 말씀드렸···.”

“아니오, 황녀님. 이건 그렇게 어물쩍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불사왕이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 틀림없는 보안을 무력화할 수단. 이건 추후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평소와는 달리 청산유수로 말을 잇는 지오스 칼킨.

그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보는 하인리히와 이세아, 심지어 졸고 있던 할리까지 깨어나 동그래진 눈으로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특별한 능력이라면 어떤 식으로 특별했기에 가능했던 건지. 혹시 능력의 발동에 필요한 특정 조건이 그 열쇠가 아닌지. 혹은 그걸 다른 기술에 응용할 여지는 없는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라일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침상에 기대앉은 헤스페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의 암울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두 눈은 무언가의 열기로 강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잊지 마십시오. 상대는 그 불사왕 한스입니다. 지금 저희가 있는 이 로한 공국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대륙인을 학살한 그 한스 말입니다. 지금 저희는 사용할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으음.”

그에 차마 반박하지 못한 라일리가 침음을 흘렸다.

좀 과격하긴 했으나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충분히 주변의 동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주장이겠지.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이 자리에서 오로지 그 혼자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니지? 이건 오히려 괜찮은 기회 같은데.’

대의를 위해 개인의 비전(秘傳)마저 털어놓으라고 한다··· 이건 반대로 그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이지 않나!

호시탐탐 그의 기술을 탐내던 입장에서 이번 건은 좋은 계기라 할 수 있었다.

“음, 뭐. 딱히 숨길 일도 아니겠죠.”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들기며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후.

그의 시선을 받던 헤스페론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능력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아직 이걸 얻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거든요.”

“그게 무슨··· 그럼 그 능력을 얻자마자 곧바로 북부 산맥으로 향했다가 불사왕에게 잡혔던 거란 말씀이시오?”

“아, 그곳에 간 건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하필 떨어진 위치가 거기였던 거죠. 저는 다른 세상에서 온 이세계인이니까요!”

“···이세계인?”

그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지오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이세아도 살짝 움찔했으나, 그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능력도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거라··· 딱히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는 그렇게 말을 마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원래부터 헤스페론은 이쪽 노선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별로 큰 비밀이라 할 것도 아니었다.

굳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기를 쓰고 숨기려 들지도 않는 정도?

‘사실 미끼 같은 느낌도 좀 있고 말이지.’

그러면서 이참에 지오스의 반응도 살짝 떠볼 생각이었는데, 그는 이세계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뭔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다.

“지오스 님? 일단 그 문제는 넘어가도록 하죠. 어차피 복잡한 건 지금 듣는다고 별 의미도 없을 테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성자님. 그런 종류의 능력이라면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에 관련해서는 대마법사이신 이세아 님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아는 게 더 많지 않으시겠습니까?”

“과연 그렇군요. 제가 너무 마음만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인리히의 개입과 함께 한창 불타올랐던 지오스가 다시 잠잠해졌고, 그 대화를 끝으로 제법 길게 이어졌던 대화도 슬슬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전 잠시 주둔지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편하게 쉬셔도 됩니다.”

“으하하하! 난 근방을 좀 돌면서 사냥이나 하고 와야겠구만!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셨는데 잘 됐어!”

자리가 파하며 하나둘 각자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가는 일행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자리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라일리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병실을 나선 직후에···.

“헤스페론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둘이서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 게 있는데.”

끝까지 남아있던 이세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미국에 소재한 세계 귀환자 협회 본부.

딸깍— 딸깍!

“후우, 드디어 끝났군. 으차차!”

새롭게 추가된 정보의 업로드를 마친 사내가 뻐근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다 축 늘어졌다.

“어우— 이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

그는 귀환자 협회 ‘이세계 현황 파악팀’의 일원으로, 곳곳에서 수집되는 정보들을 취합해 각 차원의 현황을 갱신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얼핏 보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이건 의외로 대중들의 많은 호응을 받는 사업이었다.

아직 각성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리 이세계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공해 그들의 생존 확률을 높여주고, 이미 돌아온 귀환자들에게는 출신 세계의 정보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해 주는 뉴스 같은 역할을 했던 것.

사실 일반인들은 각성하게 되더라도 전송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어느 차원으로 갈지 알 수 없었기에, 그 수백 개가 넘는 차원의 정보에서 유용한 내용을 얻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세계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약간이라도 아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만약 관심 있게 살펴봤던 세계에 당첨되기라도 한다면 적응 기간을 확 줄여서 생존 확률도 급격히 올라갈 테고.’

실제로 그 효과는 최근 들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한 귀환율이 톡톡히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일하는 입장에서는 시차 때문에 변화가 너무 잦아 갱신이 좀 번거롭긴 하지만 말이야.’

거기다 본부에서는 세계 각국의 지부에서 올라오는 정보들을 취합하고 교차 검증까지 해야 하다 보니, 기껏 확인까지 마치고 정리를 끝낸 정보가 곧바로 폐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정도였다.

또 한 가지 귀찮은 경우를 꼽자면, 관측된 지 오래되지 않은 차원의 경우 정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품이 많이 든다는 점일까?

여기서 정리된 정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만큼 허위 정보가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사전 정보도 부족하고 아는 사람도 적은 차원은 정보를 검증하는 데 그만큼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이 차원은 그게 좀 덜한 편이었지.’

그는 자신이 막 업로드한 정보들을 다시 살펴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New) 아우테리카 차원.

이곳도 아직 돌아온 사람이 적은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체로 일치한 편이라 검증이 빨리 진행된 케이스였다.

돌아온 시기들도 비슷해서 각자가 알고 있는 세계정세에 큰 차이가 나지 않기도 했고.

‘···마왕의 강림으로 세계가 한창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고 하니까.’

대륙 전역에서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며 여러 국가가 휘청인 것은 물론, 결국 멸망에 이른 소국과 혼란을 틈탄 흡혈귀 마인들에게 점거된 나라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있나.

그에 협회에서 추정한 위험성 등급도 ‘상당히 높음, 주의 요망’이었다.

미리 카르마를 확보해 둔 어중간한 각성자들이라면 잇달아 귀환을 선택할 만한 환경이라 할 수 있겠지.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겐 별 상관도 없는 문제겠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슬슬 퇴근 준비를 해야겠어.’

어쨌든 그가 할 일은 여기서 끝이었으니, 나머지는 정보를 받아들일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세계 귀환자 협회 본부에서부터 시작된 정보는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발달한 기술과 유능한 인재들에 의해 순식간에 각자의 언어로 번역되어 대중에 공개되었다.

소정의 금액을 받는 유료 서비스이긴 하나, 원한다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된 각 차원의 최신 정보들.

“오? 이제 슬슬 정보들이 풀리기 시작한 건가? 역시 아우테리카에도 알게 모르게 지구인들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그것을 살펴보는 이들 중에는 태평양 건너편의 한국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던 한성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주택 내부의 헬스장에서 운동과 샤워를 마치고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인터넷을 하다가 발견한 자료에 눈을 빛냈다.

딱히 고급 정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으나, 그래도 저번과는 다르게 제법 알찬 내용들이 들어차 있는 것이 그간 귀환한 이들의 수가 적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이온 대륙을 침공한 마왕, ‘불사왕 한스’에 의해 세계적으로 큰 혼란에 빠진 상황. 모든 몬스터들이 광기에 젖어 있으므로···.

기어코 지구에도 불사왕의 이름이 ‘한스’라고 알려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열심히 어필했던 만큼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거늘.

아무래도 아우테리카에 거주하던 지구인들에게까지 닿기엔 그 정도의 노력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쯧, 이제 와선 어쩔 수 없지.”

사실 여기선 하회탈이라고 불리고 있는 만큼 불사왕의 이름에 딱히 집착할 필요가 없긴 했다.

어차피 그건 실체도 없이 서류상으로만 남는 이름일 뿐이니.

‘흠,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내용이 나쁘지 않네. 확실히 이걸 잘만 숙지하면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어. ···내가 갔을 때도 이런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아우테리카에 대한 정보들을 쭉 훑어보며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아우테리카 종교계를 지배하는 최대 규모의 세력, 주신교단의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가 동료들과 함께 불사왕에 맞서며 당장의 전쟁은 피할 수 있게 됨. 하지만 언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인 것은 변함없으므로···.

-이온 대륙 서부의 탈리아 왕국에서 흡혈귀 마인들이 나라를 점령. 당장은 흡혈귀 군주의 강한 통제력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진 않고 있으나, 이 또한 불안한···.

물론 대부분의 정보가 그가 아는 내용들이긴 했다.

사실 안다고 하기도 뭐한 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들에 그가 개입한 것들이 한두 건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하지만 모든 정보가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정말 의외로,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정보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온 대륙 남부의 칼코스 부족 연맹에서 쿠데타 발발.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어 자세한 정보는 불명.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지역이기에, 만약 이곳에서 시작하게 되었다면···.

‘쿠데타?’

남부 부족 연맹이 시끄러운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조만간 방문할 생각이 있기도 했다.

그저 최근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계속 뒤로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왔을 뿐.

‘그런데 쿠데타란 말이지? 그것도 아우테리카의 여러 정보 조직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물론 부족 연맹은 정보의 사각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폐쇄적인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큰 사건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일을 벌인 쪽에서 정말 작정하고 계획을 시작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하던 놈들도 설마 지구인이 차원을 넘어 도망칠 줄은 몰랐겠지. 이런 일을 알 정도면 제법 고위층의 측근이었을 텐데.’

어쨌든 덕분에 쓸 만한 정보를 얻게 되었으니 이쪽으로선 감사할 따름이었다.

“흐음··· 남부, 쿠데타라.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좀 더 자세한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큰 사건에는 큰 카르마가 따르는 법.

거기다 남부라 하면 할리가 얻을만한 것들이 분명히 더 있을 터였다.

‘누가 뭐래도 마음의 고향이니까 말이지!’

물론 그것도 할리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반박하는 사람들의 허리를 전부 분질러 버린다면, 모두가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정보가 부족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남부에서 먹음직스럽게 숙성된 향기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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