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제국의 황궁 (1)
‘하, 하하하. 이야— 이거 참 이상하네? 역시 내가 고생을 좀 하긴 했나 봐. 환청으로도 모자라 실어증까지 와 버렸나? 아무래도 병원에 가 봐야겠어. 모아둔 돈이 얼마나 되더라? 아니, 어차피 이제 내 능력이면 돈 정도는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 상관없나?’
고유스킬의 강화로 쓸데없이 강해진 사고력이 폭주하면서 한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앤드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써 ‘부정’하며 생각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흐음, 이 위치는 미국인가? 그중에서도 서부 지역··· 캘리포니아로군.]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그 목소리는 도저히 상황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어째서? 왜 불사왕이 여기에 있는 거야!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지?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저 아우테리카의 괴물이 어떻게 지구로 넘어와!’
다음 단계는 ‘분노’였다.
사실 한바탕 화를 쏟아내긴 했지만, 불사왕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지구에 있을 수 있는 건지는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걸 안다고 처지가 달라지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야 평온한 삶을 되찾았다고 생각한 직후에 이건 아니잖습니까? 하다못해 조금만이라도 시간을···!’
다음 단계는 ‘타협’.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는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자— 앤드류 위버, 그럼 첫 번째 임무다. 곧바로 주변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넘어오도록. 도착하게 되면 이쪽에서 따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아.”
금제로 인해 막혔던 말문이 풀리며 앤드류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우울’에 빠진 그에게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을 뿐이었다.
‘···그래, 뭐. 그래도 올리비아 그 귀신 밑에서 일하는 것보단 낫겠지. 한국이란 곳도 그렇게 못 사는 나라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피자와 콜라가 있고 TV까지 볼 수 있다면··· 그 정도면 더 바랄 것도 없겠네.’
마지막으로 비로소 모든 것을 ‘수용’하기에 이른 그는 공허한 얼굴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을 따르겠습니다. 불사왕님.”
따지고 보면 항상 바쁜 불사왕의 직속이 되는 것이니, 깐깐한 상사가 있던 전처럼 업무가 그리 빡빡하지도 않을 터였다.
환경 또한 언데드들이 득실거리며 뿜어내는 흑마력과 죽음의 기운에 비하면 도시의 매연 따윈 향수나 다름없을 테고.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업무 환경만 개선된다면··· 차라리 이렇게 강자 밑에 붙어있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럼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급격한 사고의 격류를 겪으며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가자,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행복 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국의 앤드류 위버가 죽음의 5단계를 거치며 한층 성숙해지고 있을 때.
[크흐흣—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빨랐군. 뜻하지 않게 미국 좌표도 얻게 되었고. 나중에 이동할 시간을 덜 수 있겠어.]
일본에 있던 한스는 사방을 뒤덮은 결계를 유지한 채, 바쁘게 죽음을 수확하는 살마의 활약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쿠우웅—!
“끄아악!”
“젠장! 뭐야, 이 시커먼 건? 뭐가 이리 빠른··· 크헉!”
이후 제법 수준 있는 각성자들도 많이 포함된 야쿠자 조직이 몰살당하기까지 고작 30여 분.
생각 이상으로 살마의 무공과 ‘심연’의 시너지가 뛰어난 듯 대단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이 정도면 생전과 그다지 차이 나지 않아 보일 정도였으니.
‘역시 살마는 무공이 주력이라 그런지 고유스킬을 잃은 타격이 크지 않군. 다른 자잘한 스킬들은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고.’
아쉽게도 각성하며 주어지는 고유스킬은 소유자가 사망함과 동시에 소멸해 언데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대다수의 각성자들이 그것에 크게 의지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실.
어쨌든 마공을 사용하는 어비스 레버넌트, 살마의 시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정의 개량까지 거치면 앞으로 점점 더 효율적인 개체를 만들 수도 있을 테지.
한스는 뒷정리를 시작한 언데드들을 바라보다 느긋하게 난장판이 된 주변을 훑었다.
상황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자 다시 앤드류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능력이 있으면 앞으로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지? 관리는 헤테로시스에 맡기면 될 테니 따로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고.’
물론 그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다시 꼼꼼하게 금제를 중첩하는 건 필수였다.
가장 큰 비밀인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야 감도 못 잡겠지만, ‘하회탈’이 지구와 이세계를 오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상당히 큰 정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정보 수집을 시키려면 한국어 교육도 병행해야 하지 않나?’
방금 있었던 텔레파시야 금제를 통해 의지를 전달하는 거니 별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그의 정보 수집 효율이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보거나 듣더라도 그 뜻을 모르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거기다 그를 한국에서만 쓸 것도 아니니 일본어나 중국어 등 다른 나라의 언어들도 교육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언어와 관련된 마도구가 있는지 따로 알아봐야겠군. 아우테리카에 없다고 다른 세상에도 없진 않을 테니. 물론 지금까지 못 들어본 걸로 봐선 상당히 귀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찾다 보면 어딘가에선 나오지 않을까?
수고스럽겠지만 그전까진 앤드류가 좀 더 노력해서 언어를 습득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스에게 그가 겪어야 할 노고에 대한 죄책감 따윈 없었다.
남들은 비싼 돈을 들여가며 받는 교육을 공짜로 해줘서 다국어 능력자로 만들어주겠다는데, 오히려 감사를 들어도 모자랄 판 아니겠는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앤드류의 평온한 미래에 K-교육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
“이세계인이라···.”
자신의 숙소에서 창을 손질하던 지오스 칼킨이 한순간 멈칫하고는 나직이 혼잣말을 뱉었다.
헤스페론이란 낯선 사내에게서 들었던 한 마디가 뇌리에 박혀 도무지 잊혀 지지 않았던 것이다.
‘장난···은 아닌 것 같았는데. 설마 진짜인가?’
여러 부분을 따져 봤을 때, 그의 말이 그냥 내뱉은 헛소리일 확률은 상당히 낮았다.
사실 주변의 분위기 또한 다들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느낌이기도 했고.
그렇다는 말은 곧···.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럼 그게 진짜였다고?”
이번에 한 말은 헤스페론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전, 훨씬 오래전에—.
자신이 이세계인이라며 그와 같은 소리를 했던 이가 있었다.
지오스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그에게 이 창과 비기까지 전수해 주었던 스승이기도 한 존재.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언제 한 번 찾아가 보는 게 좋겠군. 만약 사실이라면 그 헤스페론이라는 자의 능력에 대해서도 좀 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겠지. 성자님이 오시면 말이라도 꺼내 볼까.’
그렇게 생각을 일단락 지은 그는 멈췄던 창의 손질을 완전히 마무리하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서 도시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로한의 사정을 알기엔 충분했다.
무장한 채 이곳저곳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병사들과 더러운 길거리 곳곳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피난민들.
그들 중 누구의 얼굴에서도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혼란, 절망, 비탄, 원망, 포기···.
한때는 번영했던 일국의 수도에는 그런 암울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으며, 그들 모두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었다.
‘···불사왕 한스.’
이 모든 상황이 전부 그 존재 때문에 초래된 일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도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부지기수겠지.
‘역시 수단을 가릴 때가 아냐. 놈이 다시 뭔가 큰일을 벌이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지오스가 재차 마음을 다잡던 순간, 문득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 꼬질꼬질한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리 형편이 좋다 할 수 없는 초췌한 안색의 일가족이었으나, 한데 모여 서로를 의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는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후우—.”
잠시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힘든 이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 하나하나에 연민을 품었다간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일개 창잡이에 불과한 그로서는 그 모두를 책임질 능력도 없었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복수뿐.’
그저 그들의 분노와 한이 담긴 창날을 대신 휘두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
그 창끝이 불사왕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기만을 소망할 뿐이었다.
***
처음부터 용사 파티가 로한 공국에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이쪽으로 보낸 것도 황녀와 헤스페론을 픽업하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으니, 목적이 달성된 이상 더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물론 하나같이 최고급 인력들인 만큼 잠시 체류하는 것만으로도 전황에 상당한 도움이 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런 변방에 언제까지고 잡혀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가야 할 곳이 많은 몸이었으며, 이곳은 소수의 강자보단 다수의 군대가 더 도움이 되는 전장이었으니까.
그렇게 두 명이 추가된 일행은 로한에 머문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아직 파괴된 신전의 게이트가 채 복구되지 않았던지라, 이세아의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도착한 곳은 바로—.
“아···!”
라일리 황녀가 나직한 탄성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그 압도적인 규모의 건축물은 그녀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으니.
“···드디어.”
바로 근 두 달 만에 간신히 돌아오게 된 그녀의 집.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에 위치한 황궁이었다.
“확실히 황녀님이 돌아왔다고 하니 대우가 다르네요. 보통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외성 안쪽의 좌표는 열어주지도 않는데. 설마 내성도 아니고 이렇게 황궁 내부까지 바로 들어오도록 허가해 줄 줄이야.”
추가된 인원까지 데리고 장거리 공간 이동을 하는 게 부담되었던지, 조금 지쳐 보이는 이세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부라곤 해도 좌표가 개방된 시설 자체가 외곽에 있는 데다, 바로 옆에는 황실 수호대의 본부까지 있을 정도로 엄중한 관리를 받는 보안 구역이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이유가 없으면 황족이더라도 외성에서부터 절차를 거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대우는 확실히 특별 취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사실 성자님도 함께 계시니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지금은 ‘대(對) 불사왕 대응 특수 기동 타격대’를 이끄느라 일선에서 뛰어다니고 있으나, 원래 주신교단의 성자는 제국의 황제와도 겸상할 수 있는 거물이었다.
이번에도 하인리히가 번거로운 환영식 같은 건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미리 전해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진짜 국빈급 대우를 여실히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희를 따라오시지요.”
그런데 그들이 마중 나온 호위 인원의 안내를 따라 보안 구역을 나서자.
마치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서 서성이던 일단의 무리가 먹이를 발견한 들짐승처럼 일제히 몰려들었다.
“라일리 황녀님! 다시 돌아오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오오! 성자님, 저희 황녀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이것이야말로 주신의 은총이라 할 수 있겠지요.”
“흠흠, 프리스틴 자작님? 저 말라프 자작입니다.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모두 물러서 주십시오! 먼 길을 오신 분들입니다. 자자, 비키세요!”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것들을 온몸에 두르고 비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귀족들.
그들이 원하는 바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기존의 황녀 휘하가 아닌 다른 파벌 귀족들도 상당히 많이 끼어있군. 어라? 심지어 저 양반은 황태자파였던 거 같은데.’
원래부터 5황녀 파벌이었던 귀족들은 희희낙락하며 그녀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고, 다른 파벌이었던 이들은 줄을 바꿔 잡기 위해 열심히 자신을 어필했다.
과연 정치가 일상인 이들답게 대세를 읽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빠르게 판단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거겠지요. 솔라인 백작님은 못 뵌 사이 많이 야위셨군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건강은 챙기셔야죠.”
“황녀님께서 무사하실까 걱정되어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서 말이지요. 그래도 이제는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허허헛!”
“피아논 백작님? 2년 만에 뵙는 것 같은데,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흠흠, 물론입니다. 마침 수도에 왔다가 이번에 황녀님께서 무사히 귀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라도 드리고자···.”
라일리는 그간 보였던 모습과는 다른 도도한 얼굴로 그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조련해 나갔다.
황궁에 발을 들이자마자 시작된 정치판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두 달간 손을 놓고 애간장만 끓여야 했던 그녀는 오히려 이런 기회가 반갑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황궁 암투가 이젠 오히려 그립게 느껴질 정도라니.’
내심 실소를 흘린 라일리는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일행들과 함께 황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그녀가 평생을 싸워왔던 전장.
일시 휴전 상태였던 자신만의 전쟁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