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제국의 황궁 (2)
황궁의 영역 한편에 자리한 5황녀궁.
오랜만에 귀가했다면 부모님에게, 남의 집에 방문했다면 집주인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제국의 황제쯤 된다면 그것조차 단순한 안부 인사로는 끝나지 않는 법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복잡한 절차와 까다로운 예절이 강요되는 오찬은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겐 번거롭고 답답한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킁, 난 그런 자리는 딱 질색인데. 식사 정도는 편하게 하고 싶다고. 나도 꼭 가야 하나?”
그리고 용사 파티 안에선 상남자 야만 전사 할리가 딱 그런 경우였다.
“으음···.”
“확실히 좀···.”
그에 제법 긴 시간을 그와 함께한 이세아는 물론, 잠깐 동행한 게 전부인 라일리마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핀 고기를 뜯어 먹던 그의 야성적인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니까.
그는 평소 성격부터 언행, 그리고 그 패션까지 너무나 파격적이라 격식 있는 자리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성자님만 대표로 가셔도 상관없을 거예요.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성자님을 제외한 저희 셋은 좀 곁다리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잠시 라일리와 눈짓을 주고받던 이세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대체 불가인 성자님과 저희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그래도 완전히 무시하기도 뭐하니 성자님의 체면을 봐서 대우해 주는 느낌인 거죠.”
또 그나마 귀족이기라도 한 나머지 둘과는 달리 완전히 야인인 할리는 소위 말하는 ‘급’이 부족했다.
아마 결사대의 일원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아예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터.
“아— 그럼 저도 빠지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조용히 있던 지오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 또한 레스크 왕국의 귀족이긴 했으나, 평민 출신이었던 탓에 은근히 배척당한 면이 있어 이런 자리는 영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에는 워낙 무관심했던지라 자국의 왕조차 그리 자주 마주한 적 없기도 했고.
물론 그냥 어쩌다 딸려 왔을 뿐인 헤스페론은 애당초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럼 우린 좀 편하게 먹어도 되는 건가? 솔직히 황궁의 요리사 실력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잘 됐군! 으하하핫!”
“네, 제 궁의 전속 주방장에게 일러두도록 할게요. 원하는 대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결국 황제와의 오찬 자리에 참석하는 건 하인리히와 라일리, 이세아 셋만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할리와 헤스페론은 자연스럽게 지오스에게 다가가며 넉살 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자— 우리도 가 볼까? 과연 황실에서 먹는 고기는 어떤 맛일까?”
“오! 고급 요리를 먹는 건 이 세계에 와서 처음인데 진짜 기대되는데요? 물론 제 능력으로 이것저것 꺼내먹긴 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그쪽 형씨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형님! 그냥 헤론이라 불러주십쇼. 아, 전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크하하핫—! 거 시원시원한 친구로구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고, 헤론!”
“크~ 이렇게 멋진 형님을 모시게 되다니, 아주 든든합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두 사람.
실상을 따지고 보면 혼자 형님·아우 하는 촌극이나 다름없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별 위화감 없이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아, 지오스 님도 편하게 헤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야~ 이거 밖으로 나오자마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하하핫!”
“···알겠습니다, 헤론 씨.”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지오스 칼킨 때문이었다.
‘일단 그와 헤스페론을 좀 더 친해지게 만들어야겠지.’
로한 공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그가 하인리히에게 조심스레 꺼낸 말이 있었다.
자신의 지인 중에 스스로를 이세계인이라고 밝혔던 이가 있으니, 어쩌면 그에게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들어보니 최소한 20년은 이 세계에 있었다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라 가정한다면··· 역시 귀환을 포기한 정착자인가.’
정착자.
카르마 포인트를 모아 귀환하는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이세계에 눌러앉은 이들을 뜻하는 말로···.
지구에 별다른 미련이 없으면서 이곳에 더 애착을 가지게 된 이들이 간혹 선택하는 길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도 간접적으로만 접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이번이 직접 당사자를 대면해 정보를 얻을 좋은 기회라 할 수 있겠지.
‘갓 이세계로 넘어온 지구인으로서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친한 지인인 지오스가 직접 헤스페론을 소개해 주는 게 베스트인데.’
물론 하인리히라면 그와 대면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이세계의 성자로서 할 수 있는 말과 같은 지구 출신의 각성자로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의 범주는 차원이 다르지 않겠는가?
“자자, 이러고 있지 말고 다 같이 고기나 뜯으러 가자고!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겠어, 아주!”
“하하핫! 형님, 아까 간식으로 고기 꺼내 드신 지 두 시간도 안 됐습니다. 아, 지오스 님도 얼른 오시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친목을 다지는 데엔 함께하는 식사가 최고인 법.
거칠고 사나운 야만의 사나이 할리와 눈치 없고 순박한 청년 헤스페론이 위풍당당하게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지오스를 끼운 채로.
***
제국의 현 황제, 가리오 카르테 아제리온.
이제 예순에 가까운 나이인 그는 빛바랜 금발과 강렬한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학자라기보다는 무장 같은 느낌이 강한 사내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노고가 많으신 줄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염치없게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거기다 이번에는 이렇게 라일리 황녀까지 구해주시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황제께서 바쁘신 거야 세상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환란 속에서 거대한 제국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는 것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요.”
당연한 일이지만, 아우테리카 최대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아제리온 제국의 황제와 주신교단의 성자가 함께하는 오찬이 그저 식사만 하는 자리일 리 없었다.
그나마 지금은 하인리히가 교단의 대표가 아닌 결사대의 리더로서 자리했기에 좀 덜한 편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숨 막히는 긴장감 때문에 식사 같은 건 생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으으— 나도 그냥 빠질 걸 그랬나? 라일리에게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참가하긴 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밥을 먹으라는 거야!’
물론 현재 상태도 식사를 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속으로 한탄을 토한 이세아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식기만 깨작거렸다.
지금은 도저히 뭔가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다들 평범하게 식사하고 있는데 혼자만 멀뚱히 앉아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딱히 뭔가를 잘못한 것도 없건만, 한창 긴장하던 와중에 들려온 갑작스러운 황제의 부름에 잠깐 당황해 버렸던 것.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네, 황제 폐하. 하명하십시오.”
지구에서야 평범한 소녀였다지만, 지금의 그녀는 극의를 넘어서 초월의 벽을 두드리는 대마법사였다.
그동안의 긴장은 ‘여고생 이세아’로서의 자아 때문에 나타났던 것일 뿐, 막상 상황이 닥쳐오자 차분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며 한 발짝 뒤에서 상황을 관조할 수 있었다.
“워낙 상황이 급하게 흘러가다 보니 이제야 말을 꺼내게 되는군. 자작이 나서준 덕에 우리 제국도 면이 서게 되었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조만간 자작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성자의 동료로서 용사 파티에 합류해 활약 중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라일리를 구하기 위해 선택의 여지 없이 나선 일이었으나, 굳이 치하하며 상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황송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그녀의 겸양 어린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의 시선이 이번엔 라일리에게로 돌아갔다.
시종일관 근엄하던 그의 표정이 그녀를 바라보자 잠시 흔들렸지만, 순식간에 신색을 회복한 그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에게 차분히 말을 걸었다.
“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라일리 황녀. 그동안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만···.”
오랜만에 만난 부녀가 주고받는 말이라기엔 딱딱함이 느껴지는 대화.
단순히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은 아닌 듯, 그들은 익숙하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가 꺼낸 질문은 당연히 누구나 의아해했을 만한 것이었다.
바로 어떻게 그녀 ‘혼자만’ 탈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으니.
‘확실히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든 경우이긴 하니까.’
하인리히는 내심 수긍하며 천천히 나이프를 움직여 스테이크를 썰었다.
만약 이번에 황녀를 구해온 게 성자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지금처럼 수월하게 제자리를 찾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성자의 위명 때문에 대놓고 나서지 못할 뿐이지, 그녀의 정적들이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중이기도 했고.
그녀가 황녀로 변신한 가짜라는 주장부터, 그 몸에 숨긴 치명적인 저주를 수뇌부들 한가운데에서 터트릴 속셈이라는 우려, 이미 라일리가 세뇌를 당해 불사왕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확신까지.
하나같이 한스가 그녀를 일부러 풀어주었을 거라는 가정에 기반한 추측이었다.
“제가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함께 갇혀 있던 다른 이의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탈출은 꿈도 꾸지 못했겠지요. 저는 그저 운 좋게 그의 옆에 있었을 뿐입니다.”
이어서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갇힌 이후로 그녀와 왕래가 끊긴 황태자, 그 와중에 등장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내, 이어지는 마법 교육과 갑자기 나타난 희망.
물론 막바지에 황태자와 있었던 마찰은 일부러 빼고 설명했다.
굳이 그런 부분까지 말해서 분란의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흐음—.”
이어서 불사성에서 빠져나온 직후 있었던 위기와 홀연히 등장한 성자가 그들을 구해준 걸 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황제는 무거운 침음과 함께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혹시나 했건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황태자가 같은 방법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그걸 어떻게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라일리 황녀의 탈출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힌 데다 온갖 우연과 행운이 점철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어찌 보면 작위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미약한 가능성.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이상 그저 부정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우연이 필연이 되고, 너무나도 작아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확률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것.
···우리는 보통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스윽—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뜬 황제가 다시 하인리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2차 대륙 정상 회의가 머지않았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이 주도 채 남지 않았죠.”
1차 회의 때와는 다르게 그는 용사 파티의 일로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교단에서 소식 정도는 꾸준히 받고 있었다.
그 일로 다시 성녀가 갈려 나가고 있다는 후문도.
“저희 아제리온 제국의 사절단 대표로는 라일리 5황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사이먼 황태자와 라일리 황녀가 납치된 상황에서, 2황자와 6황자가 한창 서로 기 싸움을 하며 노리고 있던 자리였지만···.
이제 그녀가 돌아온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일일 뿐이었다.
‘드디어···!’
라일리와 이세아가 동시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저 일개 사절단 대표에 불과할 뿐이었으나, 주신교단의 성자가 함께한 자리에서 황제가 직접 꺼낸 말이었다.
단순히 그 문장의 뜻 이상의 의미가 내포된 것은 당연한 일.
일시 휴전이었던 라일리만의 전쟁이— 재개하자마자 경쟁자들의 진영을 초토화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