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192화 (192/284)

#192

정착자 (3)

“···그러고 보니, 내가 전에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지? 허헛, 그때는 농담이라 여기는 것 같더니만.”

잠시 몸을 굳혔던 체하이는 곧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금방 여유를 되찾은 그의 얼굴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옅은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함부로 남에게 해서. 하지만 맹세컨대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닙니다. 이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어쩌면 불사왕을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으음? 불사왕이라···.”

“제가 말을 꺼낸 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체하이. 부디 솔직히 답해주십시오.”

그 진심이 가득 담긴 지오스의 말에 체하이의 시선이 다시 응접실 안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지금은 이렇게 애들이나 돌보며 조용히 살고 있다지만, 한때는 그도 피 튀기는 전장에서 나름의 명성도 쌓았던 몸이었으니.

당연히 저들에게서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강자의 기세를 읽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사왕을 맞상대하기 위해 결성된 결사대··· 라고 했지.’

요새 명성이 자자한 주신교단의 성자부터 시작해, 아이들의 정서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험상궂은 야만인, 보육원에서 머리가 좀 굵은 애들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어린 소녀, 그리고···.

그의 시선이 잠깐 헤스페론에게 머물렀다.

자신이 뭔가 착각한 게 있나 싶어서.

‘···삼류 마법사? 아니, 그럴 리가. 그럼 기운을 속인 암살자인가? 과연, 그쪽이 더 설득력이 있겠군. 대단한 실력이야.’

하지만 그렇게 그가 혼자 납득하려던 와중.

그 시선을 느낀 헤스페론이 씨익 미소 지으며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답하기 좀 힘드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제 소개부터 다시 해볼까요? 전 지구의 한국에서 온 각성자, 하승훈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재차 자기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우테리카에선 헤스페론이란 이름을 쓸 생각이지만 말이죠. 아니면 그냥 헤론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이곳에 온 지는 이제 두 달이 조금 넘은 것 같네요. 하하핫!”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체하이는 눈만 끔벅거리다 다시 응접실에 자리한 이들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용사 일행들.

“하아—.”

아무래도 더는 내뺄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국? 한국이라··· 그래,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 한국산 자동차가 썩 괜찮다고 했던가?”

실상 자신의 출신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그에 지오스는 눈을 빛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다 그가 있는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역시, 체하이 당신도 헤론과 같은 차원 출신이셨군요.”

“그래. 저 친구도 알려나 모르겠는데, 난 에티오피아에서 왔지.”

“아! 압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죠? 소말리아 옆에 있는.”

“오? 견문이 넓군. 그 썩을 것들 이름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운 것이··· 참 미묘한 기분이야.”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자리한 에티오피아.

한국과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나라였으나, 그래도 나름의 수교도 있는 만큼 완전히 생소한 나라도 아니었다.

커피의 원산지로 유명해 사람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편이기도 했으니.

“···이곳에 온 지는. 글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만.”

그리고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뭔가를 고민하며 수염을 쓰다듬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30년은 훨씬 넘은 것 같군. 40년까진 안 됐겠지만.”

“···그렇습니까, 상당히 길군요.”

지오스는 그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으나.

그를 제외한 이 자리의 나머지 이세계인들에게 그건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호오, 30년 이상이라?’

사실 전송된 세계에 어느 정도 적응만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이득인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당장 체하이의 경우처럼 30년을 머무른다 해도 지구에선 3년 남짓이 지날 뿐이고, 아예 눌러살기로 했을 땐 지구의 시간을 따르는 노화로 수명이 열 배는 늘어나지 않겠는가?

거기다 이세계에서만 주어지는 성장 보정까지 더하면 작정하고 몇십 년 동안 수련만 하다 괴물이 되어 귀환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만약 도중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도망쳐 올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지구에는 20년 이상 머물다 왔다는 사람이 없지.’

알려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여태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저기, 체하이 씨? 일단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죠.”

헤스페론은 하얗게 샌 수염과 함께 주름이 접히기 시작한— 명백히 노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흑인 사내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지금,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있으신가요?”

“크흠, 알고 있었나 보군. ···사용할 수 없게 된 지 제법 되었지.”

바로 이게 정도 이상으로 이세계에 오래 머문 이들을 ‘정착자’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으니 카르마 상점도 열 수 없고, 자연스레 더 이상 지구로 돌아가지 못해 평생 이세계에서 살아가야 했으니까.

“음, 진짜였나 보군요. 일단 지구에도 알음알음 알려진 게 있긴 해서 말이죠. 물론 전부 간접적으로 전해진 것뿐이라 진위 파악이 힘들어 신뢰도는 높지 않지만요.”

그래서 당사자를 직접 대면한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보를 습득할 좋은 기회였다.

그를 찾아온 대외적인 이유가 불사왕을 상대하는 데 유용한 수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면.

본심은 정착자를 통해서 시스템과 각성자에 대한 좀 더 다양한 정보를 얻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정보야말로 최고의 무기다. 내가 가진 것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하물며 자신은 시스템에서도 여러모로 이레귤러라 할 수 있는 존재이지 않나.

그런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남들보다 더욱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체하이 님, 실례지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사소한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헤론 님께는 물론 저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원활한 정보 수집을 위해 이 자리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성자, 하인리히가 직접 그에게 부탁의 말을 꺼냈다.

거기에 지오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합세해 연신 그를 종용한 결과···.

“허허, 뭐 이제 와선 다 지난 일이니 상관없긴 한데. 이게 뭐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결국 체하이도 두 손을 들고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가벼운 헛기침을 시작으로, 이내 자신의 과거부터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크흠, 저 헤론이란 친구는 알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살던 고향은 그리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네.”

과거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치안을 자랑했던 한국마저 개판이 된 상황이었다.

아프리카에 소재한 에티오피아의 사정은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정부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급급했으며, 자연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자연스레 온갖 범죄 조직들이 우후죽순 일어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체하이 또한 그 과정에서 가족을 잃고 천애고아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건 그곳에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불행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난장판 속에서 어린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은 한정되어 있었지.”

그가 선택한 방법은, 원수나 다름없는 범죄 조직의 심부름꾼이 되어 그들의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십여 년간 오로지 생존만을 바라보며 그 조직의 일원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일상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는데···.

스물이 조금 넘은 나이에 시스템의 선택을 받아 각성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후후후, 그런데 하필 새로 얻은 능력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더군.”

말을 잇던 체하이가 가만히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각성한 고유스킬은 「위상굴절」.

국소 부위의 공간을 비틀어 조작할 수 있는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더는 뒤가 없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24시간을 매우 알뜰살뜰하게 사용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범죄 조직의 간부들을 깔끔하게 날려버리는 것으로.

지방 군벌에 가까웠던 그 조직에는 총은 물론 폭탄도 상당수 보관되어 있었는데, 체하이의 능력은 그것들을 빼돌려 테러에 이용하는 데에 최적이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세간에서 ‘전송 전 각성 테러’라 불리는 행위였다.

“뭐, 그땐 숙련도도 낮고 시간도 모자라서 내 위에 있던 몇몇 놈들을 없애는 정도에 그쳤지만. 이후엔 혼란스러운 틈에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가 곧 아우테리카로 몸을 피할 수 있게 되었지.”

사실 그는 이미 그 시점부터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이제는 설령 돌아가더라도 남은 조직 놈들에게 보복당할 뿐이었으니까.

이후 이 세계에서 용병이 된 그는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애초에 돌아갈 생각이 없던 만큼 카르마는 모으는 족족 자신을 강화하는 데에 투자했고, 그렇게 그는 십 년이 훌쩍 넘어서도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마을에 들렀다가 지금 마누라와 눈이 맞았지. 어차피 그동안 모아둔 돈도 충분했으니 결혼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 없었고 말이야.”

“엇? 체하이 씨 결혼하셨었어요?”

“그럼 내가 이 나이까지 혼자 살았겠나?”

놀란 듯 되묻는 헤스페론에게 그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오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낮게 읊조렸다.

“···저와도 이 마을에서 만났었죠. 그땐 제 또래인 줄 알았었는데 말입니다.”

“허허허, 그 후 몇 년간은 지오스 네가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었지? 흐음, 그러고 보니 그 얘길 해야겠군.”

낮게 웃음을 흘리며 턱수염을 쓰다듬던 체하이가 다시 시선을 헤스페론에게 돌리며,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아마 아우테리카에 온 지 20년 정도가 지났을 때일 거야. 어느 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 당장 지구로 귀환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애초에 돌아갈 생각은 고사하고 보유한 카르마도 없던 그는 그 본능을 억지로 무시했다.

그리고.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

또한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사라진 직후, 그에게 급속도로 노화가 찾아왔던 것이다.

마치 그동안 유예 받았던 세월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처럼.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이십 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던 그는, 이후 약 일 년 만에 실제보다 오히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중년의 모습이 되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다행히 다른 능력들과 스테이터스는 여전히 남아있었네. 나는 홀린 듯 고유스킬을 파고들기 시작했지. 나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스템이 강제로 사라진 상실감이 생각보다 크더군.”

하지만.

다시 그렇게 10여 년.

그가 이세계로 전송된 지 30년이 넘었을 때—.

그는, 각성자로서의 모든 능력을 잃게 되었다.

고유스킬인 「위상굴절」은 물론, 자잘하게 모아왔던 다른 스킬들과 카르마를 투자해 강화했던 스테이터스까지 전부.

“······.”

“······.”

거기까지 말한 체하이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입을 다물자, 한순간에 찾아온 정적에 응접실 내부는 옅은 숨소리들만이 낮게 울렸다.

‘시스템과 상점은 물론이고 노화의 제약도 없어진 데다, 나중엔 스킬과 스테이터스까지?’

이정도면 그가 따로 말하지만 않았을 뿐, 이세계에서의 ‘성장 보정’마저 잃었다고 봐야 했다.

각성자로서의 혜택은 모조리 사라지고, 말 그대로 이 세계에 정착한··· 원주민 그 자체가 되어버린 상황.

‘설마, 카르마를 강제로 회수한 건가?’

일반적으론 카르마 상점의 ‘귀환’으로 지구에 돌아오면서 시스템과 상점을 반납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킬과 스테이터스마저 초기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과연, 이게 귀환자와 정착자의 차이인가. 좋은 정보를 얻었어.’

이건 지구에선 듣도 보도 못한 정보였다.

그렇게 쏠쏠한 소득에 만족한 헤스페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그래도 얻은 게 아예 없진 않지.”

어느새 감았던 눈을 뜬 체하이가 이쪽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이어서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린 그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그것을 휘둘렀다.

짜악—

“으헉?”

그와 동시에, 헤스페론이 등짝을 부여잡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미 지오스를 통해서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던 수법.

그가 말했던 고유스킬, 「위상굴절」이 틀림없었다.

“···방금, 능력이 사라지셨다고···?”

“물론, 고유스킬이 사라지긴 했지. 이건 그걸 연구해서 오러 운용법과 엮은 내 비전이고.”

물론 「위상굴절」을 가지고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해지긴 했으나, 그 효용성은 이미 지오스가 몇 번이나 증명한 적이 있는 고절한 기술이었다.

초월에도 이르지 못한 순수한 오러 사용자가 공간을 넘어선 공격을 할 수 있게 만들 정도이지 않은가.

‘설마 그게 자신의 고유스킬을 분석해서 만들어낸 것이었다니···.’

“자네, 고유스킬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지?”

“네, 네···.”

“내가 삼십 년이 넘게 능력을 사용하며, 그리고 시스템이 사라지고 십년 이상을 미친 듯이 파고들면서 느낀 게 있지.”

그의 대단함을 접한 직후여서인지, 그 한마디 한마디에서 전보다 더한 무게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헤스페론은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건 응접실 한쪽 의자에 앉아있던 이세아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아닌 척 하면서도 열심히 귀를 쫑긋거리며 한 마디라도 놓칠까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고유스킬이라는 건 그저 무작위로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야. 어떤 식으로든 그 당사자와 깊은 관계가 있어. 그게 정확히 어떤 식인지 아무도··· 심지어 본인마저 모른 다는 게 문제지.”

그렇게 말을 마친 그는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진 능력이 다르니 얼마나 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만. 일단 기본적인 노하우들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도록 하지. 아마 썩 나쁘진 않을 거야. 허허헛.”

자신만만한 웃음을 터트리는 체하이.

어쩐지 그의 등 뒤에서, 하인리히에게서도 본 적 없는 수준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지 고작 하루.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보유할 수 있는 아바타의 개체수가 증가합니다.》

카르마 상점을 통하지 않고 고유스킬이 성장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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