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백색 거인 (3)
[———!!]
거인의 분노와 살의가 가득 담긴 음파가 묵직하게 퍼져나가며 사방을 뒤흔들었다.
쿠르르릉—! 콰드득! 콰앙—!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신 들썩거리는 몸부림에 땅이 부서져 내리며 발생하는 지진까지.
“크하핫! 이놈 이거, 아직도 팔팔하구만!”
할리는 10톤에 달하는 자신의 몸으로 놈의 머리통을 깔고 앉은 채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전력으로 「보석안 : 강압」을 사용해 놈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면서.
물론 10층 건물만 한 크기의, 이 수백 톤짜리 거대한 몸뚱이를 완전히 억누르는 것은 아무리 그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놈의 육체가 인간형인 이상, 몸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은 뻔하지 않겠는가?
‘나도 인간의 신체 구조엔 제법 빠삭한 편이니까.’
직접 자신의 몸을 개조하며 본의 아니게 인체 해부학에도 해박해진 그에게, 거인이 일어나기 위한 동작만을 집중적으로 방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커서 오래 유지하긴 힘들 것 같긴 한데. 일단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었으니 됐어.’
거기다 「보석안 : 강압」의 발동에 ‘광기’를 섞은 생체력을 사용했더니, 과연 생각했던 대로 거인에게 더 뛰어난 효율을 보이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놈을 잡아두는 데에 더 많은 힘이 소모되었을 터.
쿠구구구—
하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어이쿠! 이 친구 성미가 급하구만! 좀 더 누워있어도 되는데 말이지!”
마침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거인이 조금씩 상체를 일으키자.
자신의 압도적인 질량으로 놈의 뒤통수를 누르고 있던 할리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후우웅—!
완전체로 변신한 지금의 할리와도 엇비슷한 크기의 하얀 손이 거센 파공음을 내며 그에게 날아들었다.
“엇차!”
물론 그런 단조로운 공격을 허용할 리 없는 할리는 가볍게 그 손짓을 피하며 바닥으로 몸을 피했다.
그래도 그가 시간을 벌어준 틈에 이세아가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피신시킨 덕분인지, 이제 근방에는 할리 자신과···.
“흐음,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습니다만. 내장을 아무리 파괴해 봤자 별 효과가 없군요. 그래도 설마 심장을 부숴도 멀쩡할 줄이야.”
“큭, 제 공격은 통하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열심히 거인의 몸통을 난도질하던 하인리히와 지오스 만이 남아있었다.
“크핫! 역시 머리를 노려야 하나 본데? 아까 위에 올라탄 채로 계속 부숴보려 했는데, 워낙 단단한데다 광기가 그득그득 들어차 있어서 바로는 안 될 것 같더군. 그렇게 방비가 단단한 곳이 약점 아니겠어?”
할리가 그 육중한 몸을 움직여 동료들의 곁에 서며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하인리히와 지오스도 제법 장신인 편이었으나, 그의 옆에서는 어른과 아이로 보일 만큼 극심한 신장 차이가 있었다.
···그래봐야 저 거인 앞에서는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 완전히 몸을 일으킨 백색 거인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걸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자니 온통 하늘이 가려져 사방에 그림자가 드리울 지경이었다.
[——?! ——!]
‘음, 역시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한껏 부풀어 오른 광활한 근육과 연신 꿈틀거리는 목울대에서 흘러나오는 거센 울림.
또 이젠 처음 쫓았던 보육원 일행은 안중에도 없는 듯, 놈의 고개는 용사 파티··· 정확히는 하인리히와 할리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런 거인의 심정을 반영하듯.
휘익—! 콰아앙!
어느새 높이 올라간 손이 벼락처럼 내리쳐지며 그들이 있던 곳 근방을 통째로 뭉개버렸다.
물론 그런 단조로운 공격에 당할 일행이 아니었으니, 전투는 다시 이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거인, 확실히 지능이 뛰어나긴 한데···. 그걸 효율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이성적이진 않군. 하긴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이니 당연한 건가.’
무슨 수를 썼는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 것은 물론, 그 대화에서 정보를 추려내 그들의 약점이 될 만한 대상을 정확히 특정했다.
심지어 이후엔 그걸 역으로 이용해 전투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는 영악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나.
‘결국 진짜 마을로 달려든 건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었지만.’
무릇 인질이란 살아있을 때 가치가 있는 법이었다.
정말로 죽여 버린다면 대적자의 분노만 자극할 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아니 잠깐, 정말 남는 게 없을까?’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상대는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이다.
그런 놈의 행동 양식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만약 그렇다면, 놈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특정 대상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그것을 본 누군가는 분노할 것이다.
또 슬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절망하는 이와 세상을 비관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감정들뿐이지.’
그리고 심연의 존재에게 그런 마이너스 감정은 단순히 힘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의 격을 올려줄 수 있는··· 악업(惡業)을 흡수해 강해질 수 있는 수단.’
그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스도 마찬가지니까.’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 줄여서 한스.
역대 불사왕들은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이겠다는 사명에 집어삼켜져 매번 대륙을 침공해왔다.
한스는 「마인드 허브」 덕분에 그 충동을 차단할 수 있었으나, 그 강제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몇 차례나 파편을 접하며 간접적으로 느끼기도 했을뿐더러, 전대 불사왕의 사념이 남겨준 정보를 접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전대의 악업이 이어진 게 바로 지금의 한스지.’
불사왕은 대를 이어 계승될 때, 전대가 쌓은 악업의 일부를 이어받아 더욱 강해진다.
물론 심연에서 꺼낸 죽음의 결정체인 만큼 처음부터 강하기도 했을 터.
당대 최고의 마법사였던 초대는 아무리 무방비한 상황을 노렸다고는 하지만 무려 대륙의 절반을 불태워 버렸고.
우연히 심장을 손에 넣은 삼류 흑마법사인 2대는 이미 충분히 대비가 끝난 대륙의 서쪽을 멸망시켰으니 말이다.
‘물론 이 거인에게 대를 이어 악업을 전달할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당장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백색 거인 또한 불사왕과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강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제2의 불사왕을 만들 속셈인가?’
검을 휘두르던 하인리히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금 일어난 현상이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닐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경계에 표류하던 존재도 아니고, 심연의 밑바닥에 있어야 할 괴물이 갑자기 상흔을 찢고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 몸에는 상당량의 광기까지 품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이 일을 벌인 자의 정체는 뻔하지 않겠는가?
‘역천의 서약. 심연에서 꺼낸 광기의 매개체를 가지고 있는 자. 놈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거인이 하필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이곳이 2대 불사왕과의 최후 격전지라 심연의 상흔이 많이 남은 레스크 왕국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지 않나.
‘···성자인 하인리히를 노린 건가? 아니면 할리가 품은 광기에 이끌려 온 것일 수도 있겠군.’
어쩌면 정말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이젠 그 이유야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놈이 더 성장하지 못하도록,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끝장내면 되겠지.’
성검을 휘두르는 하인리히와 날카로운 손톱으로 거인의 살을 헤집던 할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제 저도 보조하겠습니다! 보육원 사람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모아 안전한 곳에 간이 결계까지 설치했으니, 이제 어지간하면 그들이 휩쓸릴 일은 없을 거예요.”]
[“좋군요. 이제 걱정할 것도 없으니, 놈을 확실하게 마무리해 볼까요?”]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이세아가 돌아왔다는 의사가 전해졌다.
거인의 능력에 대해선 충분히 파악했고, 더는 신경 쓸만한 것도 없었다.
후웅— 쿠웅!
다시 할리를 노리고 내리찍어 오는 거대한 오른발.
하지만 그것이 바닥에 닿았을 땐, 이미 그가 거인의 뒤를 점한 뒤였다.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이동 궤적에 따라 피어오른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
바닥에 엎드린 할리가 맹수처럼 몸을 웅크리며 입꼬리를 올려 흉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뿌드득! 끼기긱—!
극한으로 압축된 근육에서 금속성이 새어 나오고, 「광룡의 심장」이 쉴 새 없이 박동하며 전신으로 고밀도의 에너지가 휘몰아쳤다.
“크흐하핫! 일단···!”
각인과 생체 오러, 그리고 ‘광기’가 육체의 한계를 가볍게 무시하고 그의 몸을 강화하는 동시에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괴사하는 세포를 유지하는 것은 「초재생」의 몫.
“눈높이부터 맞추자고! 친구!”
언젠가 습득했던 변종 미노타우로스의 유전자가 섞인 대퇴근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바닥에 박아 넣은 두 손을 힘껏 잡아당기면서.
콰아앙—!
할리의 몸이 미사일처럼 쏘아졌다.
거인의 오른쪽 오금을 향해.
꾸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인의 다리가 들썩이며 몸이 휘청했다.
아무리 놈이 수백 톤에 달한다지만, 그 또한 그리 가벼운 체중이 아니었다.
그런 몸을 인체의 취약점에 미사일처럼 들이박았으니 이어진 결과야 뻔한 노릇.
놈이 잠깐 왼쪽 다리로 버티려 해보았으나···.
“흐읍!”
촤아악—
이미 잔뜩 칼집이 나 있던 데다, 때맞춰 그곳에 다시 검을 휘두른 하인리히로 인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결국 거인은 할리가 들이받은 옆쪽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에 놈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바닥을 짚으려던 순간.
“후우우—.”
깊게 심호흡한 지오스가 창을 들어 올리며—.
찰나 만에, 허공을 향해 십수 번의 창격을 찔러 넣었다.
그동안 그의 공격은 채 몇 초 만에 아물 정도로 거인에게 큰 효과를 주지 못하고 있었으나.
콰아아앙—!
그것은 땅을 짚으려던 놈의 손목을 아작 내 바닥을 나뒹굴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주변을 휩쓰는 막대한 충격파와 함께 거인이 기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멀쩡한 왼손으로 땅을 짚으며, 갓 재생되기 시작한 오른손으로 억지로 바닥을 밀어내 상체를 일으키려 할 때.
우우우웅—
마력이 공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재차 발동한 이세아의 중력 마법이 놈의 몸을 내리눌렀다.
그동안 길러온 팀워크와 의사 공유 마법을 통해 합을 맞춘 훌륭한 연계 공격이었다.
[“저 거인 항마력이 높아서 오래는 못 버텨요!”]
[“크하핫!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곧바로 다음 간다!”]
[“···네? 좀 더 정확히 말해 주셔야 맞추죠!”]
그러나 나머지는 직접 몸으로 보여주겠다는 듯이 할리는 그저 내달릴 뿐이었으니.
그는 거인의 머리가 있는 곳까지 향한 후, 전력을 다해 위로 뛰어올랐다.
“으랏차차—!”
[“아? 자, 잠깐만요! 지금 저 범위 안에 들어가면 할리 씨도···!”]
“으하하핫! 그게 내가 바라던 바라고!”
단단하게 움켜잡은 채 등 뒤로 넘긴 두 손과 활처럼 휜 허리.
그 상태로 허공에서 중력의 가속도를 받아 떨어져 내린 그는.
그대로 모든 체중을 실어 아래로 두 손을 내리꽂았다.
쿠우우웅!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재차 바닥에 처박힌 거대한 머리.
수십 톤의 망치가 머리를 후려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으세요?! 아무리 튼튼하다지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으음··· 조금 뻐근하긴 하구만.”]
당연히 육탄 공세를 펼친 할리도 충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두 손을 몇 번 털어댈 뿐, 이내 한 번 더 자신의 아래에 깔린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구도로군. 아주 그리운 광경이야! 자, 그럼 이제 이걸 부숴야 할 텐데.”
그는 두 번째라 익숙하다는 듯 「보석안 : 강압」을 사용해 거인의 움직임을 방해하며 바닥을 툭툭 밟았다.
그 두개골이 어찌나 단단한지, 그의 ‘필살 그래비티 해머’에 직격당했음에도 조금 찌그러진 게 전부였다.
[“···일단 목을 잘라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 괜찮은 생각인데, 형씨!”]
[“그럼 일단 제가 베어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역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인지, 목을 베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물론 그래봐야 시간만 조금 더 걸릴 뿐.
도중에 기어코 속박에서 벗어난 거인이 한 차례 더 날뛰긴 했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쓰러져 목이 베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 이건?’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손에 쥔 할리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아제리온 제국 서부 국경 지역.
“으아악!”
“뭐야 이 괴물은!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잡으라고!”
그곳에 한 주둔지에서는 말 그대로 대학살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미 사망한 정예병의 숫자만 수백에 이르고, 심지어 그중에는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마스터 급의 기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후퇴! 후퇴해! 이 사실을 군단에 알리는 게 먼저다!”
“아니, 저런 게 풀려나서 도시로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전부 몰살이라고!”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일단 주변에 경고하는 게 우선이야!”
결국 간부들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무리한 후퇴를 감행한 끝에, 이 정보를 전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부대원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떼죽음 당하는 비극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참극을 만들어낸 장본인··· 시산혈해의 한가운데에 선 거대한 백색 거인은.
투둑— 툭!
그간 자신을 옥죄어왔던 답답한 봉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혼자 환희에 젖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제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열린 것은 고작 한쪽 콧구멍을 막고 있던 봉인뿐.
[흐읍—]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에겐 커다란 기쁨이었다.
적어도 이젠, 이렇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거인이 깊게 숨을 들이쉬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빨려 들어가 그의 폐 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흐으—]
다시 한쪽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숨결에서.
화아악—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지독한 독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