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혼돈의 서막 (3)
언데드란 존재는 처음부터 세상에서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기본적으로 흉측한 그 외모는 둘째 치고, 죽은 시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것은 산 자들의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한 세상의 섭리를 거스른 언데드는 본능적으로 생을 갈망하기에, 생자를 마주하면 질투하는 걸 넘어서 증오하기까지에 이르니.
애초에 그들 사이에서 평화적인 공존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 북부 산맥 깊은 곳.
불사성 인근은 그런 언데드들이 어마어마하게 밀집한, 그야말로 ‘죽음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 압도적인 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기운에 산천초목은 이미 죄다 말라비틀어졌고, 주변 대기는 건장한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하고 쓰러질 만큼 오염되어 있었다.
아마 이 광경을 마주한 이라면 그 누구라도 인세에 강림한 지옥을 꼽을 때 이곳을 선택하길 주저하지 않으리라.
덜그럭— 덜그럭!
[끼야아악—!]
까드득—!
그때, 바글바글하게 들어차 있던 언데드 무리가 좌우로 갈라지고.
그 사이로 유독 강한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두 존재가 불사성의 입구로 다가섰다.
[이게 얼마 만에 있는 왕의 호출인지 모르겠군. 서두르도록 하지.]
3미터가 넘는 덩치에 검은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지옥의 기사, 둠 나이트 드렉슬러와.
[···항상 몇몇 간부들만 부르시더니 이번엔 무슨 일이지?]
용의 두개골 형상을 한 투구에 골격 갑옷 등 온통 뼈로 이루어진 장비로 전신을 두른 용아병, 제너럴 스파르토이(General Spartoi) 트레브였다.
그들은 평소처럼 영역의 가장 바깥에서 몬스터들을 사냥하다가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서둘러 복귀하는 중이었다.
심연의 경계에서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온 후, 불사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시작한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불사의 군대는 대륙 서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흩어진 병력을 모으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해 왔고, 그 덕에 이젠 생존한 대부분의 군단원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일반적인 언데드들뿐만이 아니라 전대 불사왕 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고위 간부들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두 존재 또한 그중 일부였고.
심지어 드래곤 하트까지 사용해 만들어진 용아병 트레브는 전투 서열 10위 내에 드는 최고위 간부로, 갑작스럽게 인간 사회 한복판에 떨어지고도 오랜 시간 대륙을 활보하다가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괴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장 뭔가 시작될 것 같아 상당히 기대했는데 말이지.’
불사성의 입구를 지나 대전으로 향하는 길.
트레브는 이미 몇 번이고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며 불만을 곱씹었다.
처음 불사왕이 부활해 북부 산맥에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그도 기뻐하며 한달음에 달려와 기꺼이 불사의 군대에 합류했다.
전대에 마무리하지 못한 대륙 정벌 계획에서 다시 한번 이 한 몸을 불사르기 위해서.
그런데···.
‘이럴 거면 차라리 이곳에 오기 전이 더 나았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유독 살육에 대한 욕망이 강한 언데드였다.
그래서 경계에서 빠져나온 직후, 주변이 온통 적뿐인 환경에서도 꾸준히 인간들을 학살하며 치열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꿉장난이지? 이 강대한 불사의 군대가 인간 세상과 전쟁을 하기는커녕 이런 산속에 처박혀 몬스터 사냥이나 하고 있다니!’
불사의 군대에 들어와 전쟁의 최선봉에 서서 마음껏 살육을 즐길 생각뿐이었던 그에게, 불사왕에게서 떨어진 ‘함부로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지금은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애써 갈증을 달래고 있었지만, 고작 이런 광기에 물든 마물들은 그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아아, 부족하다. 인간, 인간이 필요해! 그 비명과 피로 축제를 벌이고 싶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보내야 하는 거지···?’
용사와 했다던 3년의 유예에 대한 이야기는 그도 들었다.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소리였지만, 그래도 왕이 결정한 일이니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애써 납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래 놓고 어설픈 수준의 잡졸들만 보내는 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정말 대륙을 정벌할 생각은 있는 건가?’
거기다 대륙으로 파견 갈 병력을 선별할 때 자신을 보내 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건만 그것마저 묵살당했다.
그러면서 보내는 것은 숫자만 많은 쭉정이 언데드에,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알 수도 없는 모지리 흑마법사들뿐이었으니.
그로서는 지금 상황에 납득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군.]
그렇게 트레브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욕구불만을 억누르며 불사왕의 본의에 대해 의심하던 와중.
끼이이—
옆에 있던 드렉슬러가 대전의 거대한 문을 여는 것을 보고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불만이 쌓여있더라도 감히 불사왕 앞에서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마지막인가.]
내부에는 이미 스물에 가까운 고위 간부들이 전부 모여 바닥에 부복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전(前) 불사의 군대 서열 50위 내에 있었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왔던 인류 최악의 숙적들.
둘은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높은 곳에 자리한 빈 왕좌에 예를 표했다.
이 불사성은 오롯이 왕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으니,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저 자리에···.
[모두 모였나.]
···지금처럼, 나타날 수 있었으니까.
[그러하옵니다··· 왕이시여···. 왕의 부르심을 받고 전원···.]
[아아— 됐다. 다들 바쁠 텐데 용건만 간단히 하도록 하지.]
실상 정보부의 수장인 올리비아를 비롯한 몇몇 간부들을 제외하면 그다지 바쁠 것도 없었으나, 모두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여흥은 끝났노라.]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슬슬 장난하는 것도 지겨워진 참이니, 이제 이 대륙을··· 세계를 가져야겠다.]
여태까지 왕이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불사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굳이 이런 걸로 농담할 리도 없을 터.
마침내 그것을 깨달은 간부들의 기세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크흐흣— 물론, 이번엔 너희가 직접 나서게 될 거다.]
또 거기서 이어진 왕의 말에 부복해 있던 이들 중 몇몇의 몸이 크게 들썩였으니—.
‘···내가 믿음이 부족했구나. 역시 왕께서는···!’
그것은, 트레브를 비롯한 여러 간부들이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한 마디였다.
***
목적 없이 수만 불어나고 있던 언데드들이 불사성의 고위 간부들에 의해 하나둘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처럼 이곳에 가만히 처박혀 있을 때라면 모를까, 본격적인 대륙 침공을 위해선 군대의 모습을 갖추는 게 효율적이었으니까.
그렇게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
‘역시 3년의 유예라는 약속을 깨는 건 좋지 않겠지. 아깝군, 전면전만큼 카르마를 수급하기 좋은 것도 없을 터인데.’
불사왕 한니발은 느긋하게 왕좌에 앉아 일의 진행 상황을 살피며 이후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어차피 이 몸에게 인간들의 평판 따윈 의미 없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긴 하나···.’
그의 목적은 정말로 대륙을 정벌하는 게 아니라, 효율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하는 것에 있지 않던가.
물론 이렇게 하다간 결과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키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당장 진행하고 있는 ‘안방극장’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선 하인리히의 체면도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이미 그 3년의 유예는 하인리히의 업적이 된 상황. 여기서 이 몸이 그걸 어기게 되면 성자의 명예에 흠집이 생긴다.’
교단은 물론 다른 세력들도 앞으로 3년간은 전면전이 없을 거라는 성자의 확신을 믿고 일을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믿음이 깨져버린다면?
‘하인리히는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그건 이후 다른 일을 진행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겠지.’
그런 건 그로서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그 흠결은 장기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하는 데 방해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
‘어차피 본체가 깨어나면 다시 기존 방침으로 돌아가게 될 터. 그럼 그 이후의 일도 생각해 두는 게 좋겠지.’
그는 초월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불사왕.
당연히 본인 스스로도 지금 평소와 다르게 과격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 정돈 자각하고 있었다.
전이었다면 본체의 제재가 있어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거란 사실도.
‘무른 생각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옳다. 앞으로 약 한 달, 그 안에 일을 최대한 진척시켜 둬야겠군.’
말하자면 지금 한니발의 상태는 자제심이라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만취한 채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는 본체가 쓸데없는 감정에 영향을 받아 이성이 흐려진 상태라고 믿고 있었지만.
‘방법이야 만들기 나름인 법. 약속한 건 전면적인 전쟁을 하지 않으리란 것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인리히와 약속한 것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더 많은 장소에, 더 많은 숫자를, 더 강한 정예로—.’
대륙 전역을 강습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길 무고한 이들의 희생 따윈.
더 이상 그가 알 바 아니었다.
***
‘큰일이군.’
인상을 찌푸린 하인리히가 미간을 주무르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한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체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 그야말로 제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실상 한성현에게는 뇌가 여러 개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던지라 그가 잠들어있을 때도 무의식적인 통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사람이 숨을 쉴 때나 걸을 때, 그런 상황에서조차 일일이 몸을 자각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본체의 통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심연 침식의 여파로 한스의 자제심도 깔끔히 날아간 상태였다.
지금 하인리히가 그의 심리를 파악한 것처럼 한스도 다른 아바타들의 사고를 접하고 있을 텐데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며 일직선으로 달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민폐도 이런 민폐가 따로 없었다.
‘전능하신 주신이시여. 이 역경을 헤쳐 나갈 길을 밝혀주시옵소서.’
그 골치 아픈 상황에 골머리를 싸매던 하인리히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다.
“···성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는 옆에서 들려온 코델리아 추기경의 걱정스러운 말을 듣고서야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런.’
이곳은 대륙 정상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대회의장.
그는 한참 회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혼자 한숨 쉬며 끙끙대다가 난데없이 기도까지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중앙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던 대표들의 시선도 아까부터 그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팔짱을 낀 채 마찬가지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하인즈 2세만 빼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그에 애써 웃으며 그들에게 사과를 건네려던 하인리히가 다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생각해 보니 현재의 이상 상황을 알리고 대응을 준비하는 데엔, 각 세력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지 않던가.
‘대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 그럼 이걸 긴급 안건으로··· 음?’
그렇게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쭉 훑던 그의 시선에.
뭔가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리에스타 성녀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 이전 그녀와 백색 거인을 사냥한 직후 나눴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때 분명··· 불사왕이 조용히 있는 게 뭔가 불안하다고 했었지. 앞으로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아무래도 리에스타는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이미 뭔가를 감지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주신과의 동조가 그보다 월등히 강한 그녀인 만큼 간접적으로 느껴진 게 있었을지도.
‘···그런 게 있으면 좀 더 확실하게 계시를 내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왕이면 자신에게도 알려주시고 말이다.
‘그건 아직 내 신앙이 부족한 게 원인일 테니 어쩔 수 없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하인리히는 다시 경건하게 두 손을 마주 잡고 주신께 짧은 기도를 드린 후.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주신께서 계시를 내려주셨습니다.”
화악—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는 신성한 아우라와 함께.
숨 쉬듯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불사왕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아바타의 개성은 한성현이라는 개인의 일부가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본체가 정신을 잃은 상태건 아니건 상관없이 유지되는 것이었으니.
‘이 정도는 주신께서도 용납해 주시겠지. 통 큰 분이니까.’
그것이 설령 믿음과 신앙심이 뻥튀기된 하인리히라 할지라도,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이게 원래 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