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11화 (211/284)

#211

설상가상 (3)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전부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2차 대륙 정상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교단 측의 좌석에는 성자와 성녀 없이 두 명의 추기경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마치 때를 노린 듯,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될 불사의 군대의 공습에 대응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미 습격과 관련된 국가들에도 경고가 전해져 대대적인 조치에 들어간 상황이었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회의가 마무리되는 대로 빠르게 귀국할 예정이었다.

사실 원래라면 어제 끝나야 하는 일정이었지만, 이번 사안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느라 시간이 더 소요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결된 것은 많지 않지만.’

회의 내내 별다른 말이 없던 하인즈 2세가 부산스러워진 대회의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애초에 언제 자국이 습격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선뜻 타국을 돕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그 방안인 대륙 연합군에 대해서는 질리도록 논의를 나눈 후이지 않았던가?

더 잦아진 공세에 맞춰 추가로 인원을 차출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사실상 성자 하인리히가 제공하는 예지를 바탕으로 자력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지.’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아제리온 제국과 제피아 공화국은 영토가 넓은 만큼 강자의 수와 군사력, 인프라도 잘 깔려 있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인구수 대비 전투 인력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칼코스 부족 연맹과, 마법이 발달한 데다 마탑의 본부까지 있는 작은 섬나라 위제트 마도국도 걱정이 덜한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영토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서부 4왕국, ···이젠 탈리아를 뺀 3개의 왕국은 상당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기회다.’

그리고 그것은, 하이브리드의 영향력을 국외로 뻗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으니.

“곤란해 보이는군.”

신 탈리아 왕국의 지배자이자 대륙 최대 뱀파이어 세력의 주인.

하인즈 하이브리드 2세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필요하다면 이쪽에서 도움을 줄 수도 있다만?”

회의가 끝난 후에도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수군거리던 왕국의 대표들을 바라보면서.

그 말 한마디에 한창 대화에 집중하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딱히 기세를 내뿜으면서 압박한 것도 아니건만,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격의 차이에 저도 모르게 위축된 것이다.

“···도움말입니까? 제안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탈리아 왕국과는···.”

그러나 그들도 각국의 대표라는 자리까지 오른 이들.

순식간에 신색을 회복한 샤로티 왕국의 대표가 앞으로 나서며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의 조국은 탈리아 왕국과 가장 가까워 견제에도 제일 적극적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커험, 잠깐 기다려 보시지요.”

“···맞습니다. 이곳은 대화를 하기 위해 모인 장소니,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두 왕국 대표들의 만류에 기세가 주춤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에게 동조해 줄 줄 알았던 이들의 태도에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현실을 깨닫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크흠! 뭐, 일단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야···.”

당연하게도, 그들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추후에 뱀파이어들이 부릴 수작에 대해 걱정하기엔, 당장 코앞에 다가온 불사왕의 존재감이 너무 위협적이었으니까.

그들도 지금의 탈리아 왕국이 가진 저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온 대륙의 뱀파이어 대부분이 한 깃발 아래에 모인 클랜 연합.

단순히 그 전력만 따져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는데, 그게 왕국 하나를 고스란히 집어삼키면서 나올 시너지는 오죽하겠는가.

애초에 그들이 견제를 계속했던 이유도 그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일단 조력을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다. 만약 뱀파이어들이 선을 넘는다면 교단은 물론이고 제국과 공화국도 좌시하진 않을 테니.’

그것이 지금 왕국 대표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물론 하인즈 또한, 그들의 그런 생각 정돈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당연하지만 그도 자원봉사 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대륙 연합군 위주로 개입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거 주변국부터 확실하게 다지면서 뻗어나가는 게 더 효율적이겠지.’

이미 인접국에 대해선 암중에서 접근하는 중이었으나, 이렇게 대외적으로 영향력을 넓힐 기회도 버리기 아까운 노릇이지 않나.

‘언제까지 탈리아 왕국 안에만 뱀파이어들을 모아둘 생각도 없고.’

애초에 전 대륙에 흩어져서 살아가던 놈들이다.

당장은 필요에 의해 탈리아 왕국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 최대한 끌어모았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면 서로에게 좋을 것도 없었다.

물론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전처럼 다시 대륙의 그림자에 숨어들게 하면 더 편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굳이 왕국 하나를 삼키며 양지에 나선 의미가 없지 않은가?

‘뱀파이어의 양지화를 위해선 외부에서도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할 여건이 갖춰져야지.’

지금 뱀파이어의 인식은 거의 마물과 동급에 가깝지만, 원래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그렇게 대외적인 활동과 더불어 음지에서 세력을 뻗치는 작업도 동시에 병행해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바깥 사회와 섞여 나간다. 최종적으론 지금 왕국 내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타국에서도 피를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하인즈는 자신을 따라온 실무자들이 왕국 대표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원한다면 서부 왕국들에 대한 공세를 더 강화하도록 하지. 그렇게 하는 게 그쪽도 편하지 않겠나?

-하인즈 2세 : 생각해 준 건 고맙다만, 아직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

-한니발 스트라우스 : 좋다. 하지만 필요하다 판단되는 순간엔 개입할 것이다. 그것이 이득이니까.

···이렇게 원치 않는 한스의 도움까지 있으니, 왕국 측에서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더라도 일이 성사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건 그렇고.’

하인즈의 시선이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공화국 부통령, 케일라 맥클레어에게 향했다.

뱀파이어의 양지화를 이끄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긴 하나, 지금 그의 최우선 관심사는 공화국에 숨어 있는 오바이포 클랜이었다.

사실 지금도 흡혈왕을 자칭하고는 있지만, 오바이포 클랜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제대로 된 권좌라고 할 수 없었으니.

놈들까지 확실히 굴복시킨 이후에야 명실상부한 아우테리카의 흡혈왕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괜히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부 조력자는 있는 게 좋을 텐데. 시간을 두고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부딪치고 볼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그렇게 그가 고민에 빠져 있던 순간.

[“하이 로드.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옆에 서 있던 뮬로에게서 갑작스러운 텔레파시가 전해져왔다.

하인즈가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자 그가 서둘러 뒷말을 이었다.

[“동부에서 전해진 급보입니다. 오바이포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였다고 합니다.”]

공화국의 의원들과 언론, 상계 등은 물론 군부까지.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각계각층에 동시다발적으로 뻗어진 손길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동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심어두었던 첩보원 대부분이 제거당했습니다. 이 정보를 간신히 가져왔던 요원도 직후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지요. ···죄송합니다, 하이 로드. 아무래도 추가 정보는 얻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하인즈의 시선이 다시 케일라 부통령에게로 향했다.

지금 공화국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별다른 기색 없이 막 자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더 기다릴 때가 아닌 모양이군.’

그는 자신의 옆쪽에 있는 탈리아 왕국의 전(前) 대표 브라이트 공작에게 슬쩍 눈짓하곤 그녀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그렇지 않아도 뱀파이어에 대한 적대감이 강한 상대였으니, 일단 안면이 있는 상대를 먼저 내세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안녕하십니까? 부통령님, 잠깐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렇게 브라이트 공작이 케일라 부통령에게 접근했지만···.

“아, 브라이트 공작님.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일이 바빠서 말이지요. 급한 일이 있어 빨리 가 봐야 하는데, 필요한 이야기는 서면으로 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미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과연 정치인답게 그 표정에는 일말의 불편함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평생을 뱀파이어 밑에서 목숨 건 외줄 타기를 해 온 브라이트 공작의 눈치도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싸늘함을 넘어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불쾌감과 혐오.

전에 만났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역시 그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그러나 그에겐 억지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 준비되어 있었으니.

“아드님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말에, 그녀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이어서 얼굴에 맺혀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걷히고, 얼음장처럼 서늘한 눈길이 브라이트 공작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제 조금 대화할 마음이 드셨습니까?”

“···예. 공교롭게도, 급한 일이 막 해결된 것 같아서 말이죠. 잠깐은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불편한 회담이 성사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한니발 스트라우스 : 흥미롭군. 에나멜 대륙에 이어서 동부라? 올리비아에게 추가 조사를 지시하도록 하지.

불사왕님의 오지랖 넘치는 간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그쪽에 이용할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그렇다면 단순히 모조리 쳐 죽이는 것보단 효율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할 수 있겠지.

그것이 결코 건전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

‘이상하네.’

하인즈 2세가 동부의 문제를 알아차린 순간, 에나멜 대륙에 있는 해리스도 사태의 특이성을 깨달았다.

그는 분명 세계수에게 뭔가 이상을 느꼈는데, 다른 하이 엘프들은 그것에 관해서 딱히 계시받은 게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 또한 자연에 과하게 몰입하는 과정에서 꿈결처럼 느껴졌을 뿐, 지금은 이렇다 할 계시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으나···.

‘아, 귀찮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또한 세계수의 제사장이자 엘프 사회의 정점인 하이 엘프.

그런 만큼 세계수와 관련된 예감을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을 꺼낸 해리스가 특별 조사대의 책임자가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신입이라고 꽁꽁 싸맬 때는 언제고. 여긴 안전하다 이건가?’

물론 그런 면도 있었으나, 세계수가 그에게만 뭔가 신호를 줬으면 그에 합당한 이유도 있으리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 오늘 바람도 선선하고 좋은데. 나무 아래서 늘어지게 자고 싶다.’

하지만 이미 맡은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었으니, 해리스는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일단의 파수꾼들을 이끌고 석연치 않았던 장소로 이동했다.

후우웅—

물론, 이미 편리함을 깨달아버린 그 몸을 들고 나르는 것은 바람의 정령인 파스칼의 몫이었다.

***

정상 회의가 끝나고 가장 먼저 귀국한 것은 대주술사 모르나를 위시한 부족 연맹의 사절단이었다.

하루 종일 굳은 표정이었던 모르나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누가 붙잡을세라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이들에겐 어떤 인사도 없이 그대로 교단의 게이트를 통해 남부로 떠났다.

그리고 그 직후.

칼코스 부족 연맹의 공식적인 입장문이 남부에 소재한 유일한 신전을 통해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통보되었으며.

그 중차대한 내용은 곧 아직 성지에 남아있던 각국 대표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제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칼코스가 뭐 어쨌다고요?”

대신전의 숙소에서 게이트 룸으로 향하는 길 한복판.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끝내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섰던 라일리 황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잘못 들으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황녀님. 저도 같은 심정이거든요.”

그에 교단 사람에게 급하게 전달받은 소식을 옮겼을 뿐인 이세아도 난감하다는 듯이 들었던 내용을 다시 읊어 주었다.

-칼코스 부족 연맹은 대륙 연합에서 탈퇴. 이전에 있었던 모든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며, 앞으로 독자 노선을 걷기로 결정했다. 이제부터는 신전을 통한 모든 간섭도 불허한다.

이런저런 말을 쳐내고 요점만 말하자면 그것이 전부였다.

“아니, 무슨 배짱으로···?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도 힘들 판에 이게 무슨···!”

다시 그 말을 들은 라일리가 분개하며 외쳤다.

당장 며칠간의 논의에 구멍이 뚫려버렸으니 당연한 일.

또 이런 식의 이탈은 남은 모두의 결속력과 사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왜 지금의 회의가 열렸는가?

서로 잘 맞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양보와 협의를 거쳐 함께 활로를 찾자는 취지에서 열린 것이 아닌가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슨 선전포고라도 할 게 아니면···.”

거기까지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전쟁과 관련된 주제는 이런 자리에서 쉽게 꺼낼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후우— 일단 돌아가죠. 이미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요. 지금은 교단을 믿어 보는 수밖에요.”

당연하지만 교단 측에서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칼코스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꾸준한 접촉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문제가 복잡해지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다시 일행을 이끌고 게이트 룸으로 향했다.

우선은 당장 쌓인 일거리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뒷일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러나.

그렇게 라일리 황녀와 이세아, 헤스페론을 비롯한 제국의 사절단이 서둘러 귀환한 수도 제론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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