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13화 (213/284)

#213

제론의 고난 (2)

기습에서 살아남아 저항하는 기사들이 아직 조금 남아 있긴 했으나, 그들이 전부 정리되는 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적 일부가 사절단이 탄 마차 문을 하나씩 열어 인정사정없이 학살을 벌이고, 주변 일대엔 마법사들로 인한 추가 결계까지 깔려 「영웅의 발자취」를 사용하지 않고선 도주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상황.

그 위기 속에서 헤스페론의 머리가 그 어느 때보다 팽팽 돌아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뒷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반란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사전에 중요 인물에 대해 조사했을 때, 황실 수호대장인 스타브는 분명 중립··· 정확히는 황제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라일리도 그를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젠장, 황궁 내에만 틀어박혀 있던 인간이라 정보가 부족해. 아니, 지금 동기는 아무래도 좋아! 뭐라도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지금도 「결속의 끈」을 통해 라일리의 감정이 그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중이었다.

과연 황녀답게 숨겨진 수단이라도 있었는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는 기색이었지만, 그 실낱같은 기대는 이내 뭔가에 가로막힌 듯 다시 좌절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에 놈이 얘기했던 만반의 대비가 불사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것에 대해서였나.’

아무리 수를 찾아봐도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형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소녀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여기서 먼저 단념하고 물러나 버린다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게 어디 있어!’

이 세상을 뒤에서 조종하는 흑막이나 다름없는 자신인데,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않은가!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지. 마침 가능성이 보인 참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꼭 필요한 게 있었다.

바로 시간.

황녀의 마차에 설치된 결계는 완전히 파괴되기 직전이고, 그가 탄 마차로도 두 명의 기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사고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지금도 촉박하게 느껴질 정도.

-한니발 스트라우스 : 쯧, 멍청하고 비효율적이다. 둘 다 죽느니 너 하나만이라도 빠져나오는 편이 이득이지 않은가?

-헤스페론 : 아니, 어차피 난 이제 중급 마법사에 턱걸이한 수준이야.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산은 차기 황위 계승자인 라일리와의 인연이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이해하고는 있으나, 존재를 이루는 사고방식의 차이로 납득할 수는 없다.

그래서 헤스페론은 아주 친절하게 한스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헤스페론 : 그런데 여기서 도망가면 그저 그런 중급 마법사 하나만 남을 뿐이잖아. 그럴 바에야 도박이라도 걸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 성공한다면 차기 황제의 최측근이 되는 거라고?

-한니발 스트라우스 : 호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하긴 지금 너 정도 수준이라면 다시 만드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을 터.

-헤스페론 : ···그렇게 단언하면 좀 상처받는데.

-한니발 스트라우스 : 좋다. 시간이 아깝긴 하겠다만 반대급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걸어볼 만하군.

-하인리히 : 나도 막 전투가 끝났어. 여유가 생겼으니 지금부터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 제발 잘 됐으면 좋겠군. 황녀가 잘못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하인즈 2세 : 흐음,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라.

-하워드 :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간단하게 준비한 게 하나 있는데, 아직 미완성이지만···.

그렇게 가속한 시간 속의 뇌 내 긴급회의가 끝나고.

상황은 다시 급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

콰앙!

검을 뽑아 들고 사용인들이 탑승한 마차의 문을 열려던 기사가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마차의 문을 박차고 나온 상대가 그를 향해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던 것.

하지만 제국의 상급 기사인 그가 대응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반항인가? 귀찮게 하는군.”

“프리스틴 자작의 제자다. 마법사니 주의하도록.”

“마법사 말입니까? 마법사가 검을···.”

하지만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기사가 주의를 주기 무섭게.

그 사내, 헤스페론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광이 번뜩이며 그 속도가 몇 배로 증폭되었다.

“잔재주를! 어림도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기사에겐 가소로운 수준일 뿐이었으니.

그의 전신에서 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마찬가지로 찬란한 오러에 휩싸인 검이 감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법사의 검을 단칼에 두 동강 냈다.

그리고 그에 의기양양해진 그가 무방비해진 상대를 그대로 베어 버리려던 순간···.

콰앙—!

한순간에 번쩍인 검은 마력광과 함께 다시 몇 배로 증폭된 헤스페론의 주먹이 그대로 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커헉?!”

끼기긱—

격투가용으로 제작된 듯, 너클 부분이 강화된 금속 건틀릿이 기사의 갑옷과 마찰하며 불길한 소리를 퍼트렸다.

“이, 건··· 무슨···!”

거기다 문제는 단순히 타격에 의한 충격만이 아니었다.

주먹에서 발산된 치명적인 저주가 그의 몸을 감싼 오러를 파고들며 움직임을 제한한 것이다.

아마 오러가 아니었으면 이 저주만으로도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에게 살아남을 희망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푸화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새빨간 선혈이 비산하며, 목을 잃은 기사의 시신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네놈!”

그리고 그와 동시에.

채앵!

동료가 피격당하는 순간 움직였던 다른 기사의 검이 어느새 헤스페론의 손에 생겨난 ‘칠흑의 검’과 맞물렸다.

물론 막 생명을 수확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검에서도 불길한 흑마력이 풍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것처럼.

그에 검을 더욱 강하게 찍어 누른 기사가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설마 흑마법사였나? 거기다 그런 마검은 또 어디서···!”

“큭, 친구한테 빌린 건데!”

그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그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설령 흑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든, 마검의 힘을 빌려 오러에 대항하려 하든.

챙—! 차앙! 채챙—!

최상급에 달하는 고위 기사 앞에선 그저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까.

‘아니, 아이 수준은 아니군. 분명 마법사라 들었는데, 아까 무투술도 그렇고 이 검술은 또 뭐지? 단순히 신체 능력만으로 반응하는 정도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외도(外道)의 힘을 빌렸다 해도, 일단 어떻게든 그의 공격에 반응해 검을 섞고 있다는 것부터가 평범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비록 정말 아슬아슬하고 간신히 견디고 있을 뿐이라 하나,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칭찬할 만한 수준.

쩌적—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기사는 자신의 강맹한 오러에 금이 가기 시작한 마검을 바라보며 사납게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아무리 흑마력을 가득 품은 기물이라 해도, 경지에 오른 이가 전력으로 휘두른 공격에 수차례나 노출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러로 무기를 강화할 수 있었다면 또 모르지만, 그 알량한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마법사 주제에 기사 흉내를 내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그렇게 그는 승리를 확신하며 마검의 균열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재차 검이 맞닿은 순간, 그 틈새에서 팽창하기 시작한 흑마력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엇? ···이건?!”

하지만 뒤늦게 이상을 깨달은 그가 뭘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었다.

콰자작!

균열에서 시작된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순식간에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마검에 걸려 있던 주문에 의해 특정 목적과 방향성을 갖고 한 방향으로 쏘아졌다.

콰아앙—!

치명적인 흑마력을 가득 품은 채 클레이모어 지뢰처럼 전방을 휩쓰는 수많은 파편.

무기를 맞댄 상대를 확실하게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필살의 마검은 살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유효 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했지만.

털썩!

그만큼 일단 거리 안에 들어온 이를 상대로는 압도적인 효과를 자랑했다.

그것이 설령 최상급에 이르는 기사라고 할지라도.

“하아, 하아— 레벨만 높다고 다가 아니라고. 이게 바로 템빨이란 거다.”

헤스페론은 막대한 오러 덕분에 간신히 형체만 갖춘 기사의 시신을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마법학개론」을 이용한 보조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고 「격투술」과 「괴력」 등의 스킬을 이용하더라도, 단순히 그의 능력만으로 이 정도 수준의 기사들을 이기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선 당연히 외적인 보조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아바타 클라우드」를 통한 고등급 아이템 지원이었다.

‘그것도 효과 하난 끝내주는 흑마력 위주의 마도구 말이지.’

무려 그 불사왕께서 직접 선별한 데다 손까지 본 후에 보내주신 물건이니 품질이야 두말할 것도 없는 노릇.

물론 그런 물건을 사용하면서 아예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었다.

파스슥—

“음.”

손잡이만 남았던 일회용 마검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검을 쥐었던 오른손으로 지독한 저주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몸에 걸쳐진 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 신체 능력과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해 협찬 받은 수많은 장신구에서도 꾸준한 오염이 발생하며 그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뭐, 수명이야 딱히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엄청나게 노려보는군.’

하지만 헤스페론은 목구멍을 넘어오는 피를 꿀꺽 삼키며 끝까지 긴장을 유지했다.

그만한 소란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미 주변에 널린 기사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 쏠린 상태였으니까.

“···저주받은 물건. 진짜 흑마법사였나?”

“아니, 자세히 보니 직접 익힌 것 같진 않은데. 저 마도구들이 원인인 것 같군. ···하긴,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나.”

“쿤터는 그렇다 치고, 설마 빌헬름 경마저 당할 줄이야.”

아주 잠깐 사이에 기사 하나가 죽고, 그에 곧바로 나선 이도 불의의 일격에 절명했다.

무난히 이기리라 생각하고 지켜만 보던 사이에 동료 둘이 비명횡사했으니, 그들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경계심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찌릿찌릿하네.’

물론 당장 나서지만 않고 있을 뿐, 기사들 사이에서 솟구치는 칼날 같은 기세는 언제든 그를 토막 낼 듯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하인리히 : 조금 늦었군.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될 거다. 또 준비되는 대로 추가로 보내주지.

그렇게 서서히 주변을 포위하는 기사들을 경계하고 있을 때.

어느새 헤스페론의 오른손에 쥐어진, 하인리히의 신성력이 가득 담긴 성표가 그곳으로 파고드는 저주의 기운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아, 좀 살 것 같네.’

아무리 성표를 통한 간접적인 힘의 행사였다지만 명색이 성자의 신성력이었으니.

그 기운에 슬슬 합공할 준비를 하던 기사들이 움찔하며 다시 표정을 찌푸렸다.

“···엄청난 신성력. 성물인가?”

“빠르게 줄어드는 걸 보니 일시적인 것 같군. 그래도 저 정도 수준이면 최소한 대주교급이 개입한 것 같은데?”

“아까 저주받은 물건도 그렇고, 저런 것까지 가지고 있다고?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본캐의 지원을 받는 부캐입니다. 템빨 달달하네요.’

진지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으면서도 속으로 장난스럽게 대꾸한 헤스페론이었지만, 사실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싸우는 와중에도 머리 한편으론 계속해서 「결속의 끈」에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가 원하는 바에 도달하기엔 살짝 부족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마차에 타고 있던 이들은 저들과 한패로 보이는 소수 빼곤 모조리 몰살당한 상황.

그래도 자신이 난리를 부린 통에 시선이 분산됐는지, 배신하지 않은 기사 무리엔 아직 생존자가 제법 남아있는 편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

오싹—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슬쩍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배신자들의 수장인 스타브가 이쪽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바로 앞에 활짝 열린 마차의 문을 둔 채로.

***

헤스페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스타브는 곧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저런 놈 하나보단 이쪽 일이 더 중요했으니.

잠시 지켜보자니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좀 거슬릴 뿐, 경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은 상대였다.

이젠 부하들도 방심하지 않을 테니 그들 선에서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터.

“···스타브 경. 어째서 이런 짓을?”

“죄송하게 됐습니다, 황녀님. 원래 정쟁이란 다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원하는 게 달랐던 거지요.”

“제론에서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고도 무사할 것 같나요? 황제 폐하께서 이를 절대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길. 이쪽도 생각 없이 일을 벌인 건 아니니 말이지요.”

스타브는 라일리의 경고에도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번 일에 세력이 휘청할 정도의 유무형 자원을 쏟아부은 데다, 직접 동원된 것도 자신 혼자만이 아니었으니까.

매우 불행하게도, 불사왕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라일리 5황녀는 도주한 포로를 처단하기 위해 쫓아온 불사의 군대에게 당한 것으로 처리될 것이다.

지금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도 그 일환이었으며, 이미 모든 물리적·마법적 증거와 증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나를 포함에 여기 있는 모두도 말이지.’

그는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죄송합니다만, 더는 시간이 없군요. 이만 가셔야 할 때입니다.”

황녀에 대한 마지막 예우 차원으로 대화에 응해주긴 했으나, 그들에게도 남은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던 만큼 더는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중앙을 비롯한 각지에서 총력을 다해 시간을 벌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잠깐! 설마 당신은···.”

라일리는 어떻게든 말을 걸어 시간을 끌려고 했지만, 스타브는 그것을 무시하며 태연하게 아공간 마도구에서 짧은 단검 하나를 꺼냈다.

···사실 손잡이가 달려있기에 단검이라 칭할 뿐, 생긴 것만 따져보면 마수의 발톱 형상을 한 무언가였다.

“참, 한 가지 더 양해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 그리 곱게 죽으시긴 힘들 겁니다. 상당히 고통스러우면서도 처참한 꼴이 되실 테지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리는 핏빛의 발톱 단검.

그 또한 흑마력이 가득 담긴, 저주받은 마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친구가 저주받은 물건들을 사용하더군요. 사실 처음부터 그를 불사왕의 끄나풀로 엮을 생각이었습니다만, 아예 황녀님을 직접 시해한 흉수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의 시선이 아직도 소란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기척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놈이 살아남아 있던 소수의 기사들 틈으로 들어가 그들을 지원하며 온갖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신성력이 담긴 물건으로 기사들을 회복시키고, 위급할 때 결계 마도구로 시간을 벌며, 웬 핏빛 구슬을 매개로 발동한 피의 폭풍이 마법사들의 개입을 방해했다.

또 그 와중에 꺼내든 마검을 비롯한 불길한 물건들에 부하들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으니.

“···쯧, 무능한 것들. 저쪽도 제가 직접 손을 써야겠군요. 일이 바쁘니 이만 끝내지요.”

그에 미간을 찌푸린 스타브가 가볍게 혀를 차며.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라일리 황녀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라일리 황녀가 ‘있던’ 곳을 향해.

“···하?”

그렇게 허공을 벤 후, 잠시 굳어있던 스타브가 자신의 감각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한창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 한 가운데로.

그리고 그곳엔.

“어우 씨, 아슬아슬했네.”

코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헤픈 웃음을 짓는 헤스페론의 품 안에.

라일리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다소곳이 안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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