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초월 (2)
엘븐 킹덤은 해리스의 활약으로 대륙 붕괴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은 결코 작지 않았다.
라이칸스로프와 거인들의 침공으로 생긴 막대한 인명 피해는 물론, 이젠 외곽부 곳곳에 발생한 다수의 균열 때문에 추가적인 대응책까지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세계수를 지킬 믿음직한 버팀목인 하이 엘프 초월자가 새롭게 탄생한 데다, 국경 부근의 균열은 주변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 최악이라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진짜 최악인 건 에나멜 대륙이 아닌 이온 대륙.
계속되는 불사왕의 공세로 시시각각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인간의 영토였다.
콰아앙—! 퍼엉!
마을 곳곳에서 화염이 솟구치고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도망쳐! 빨리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야··· 커헉!”
“엄마··· 엄마···!”
그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사람들과.
철그럭! 철컥!
[키에엑!]
까드드득—!
앞을 막아섰던 수비군을 몰살시키고 기어이 마을로 들이닥쳐 날뛰는 언데드 병력까지.
비극적이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이제 이 정도 사건은 이온 대륙에서 그리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성자가 미리 습격 위치를 알려준다 해도 막기만 하는 것엔 한계가 있는 만큼, 계속되는 파상 공세에 결국 뚫리는 곳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국력이 약한 곳일수록 그런 일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결국 대륙 서부의 세 왕국은 자존심을 굽히고 탈리아 왕국과 협정을 맺어 먼저 뱀파이어의 원조를 청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힘든 와중에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과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으니.
연전연승 무패의 행진을 이어가는 구원자들이자, 주신교단의 성자가 이끄는 대륙의 희망인···.
콰아앙—!
[크허억!]
“카하하핫! 뒈져라!”
···용사 파티였다.
이미 바글바글한 언데드가 주변을 가득 채운 틈바구니 속.
커다란 크레이터의 중심에 선 할리가 자신의 커다란 손에 잡힌 채, 땅바닥에 처박힌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바라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끄그극··· 말도··· 안 된다. 이 몸의 검이 고작 생채기밖에 내지 못하다니!]
분노한 데스나이트에게서 한순간 위압적인 기세가 터져 나오며 거칠게 피어오른 흑마력이 자신의 머리를 잡은 이의 몸을 파고들었다.
평범한 이라면 접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르고, 설령 극의에 이른 전사라도 오러를 몸에 두르지 않으면 저주에 휩싸이는 공방일체의 수법이었으나.
[어떻게 맨몸으로···!]
고작 그 정도 수준으론 이미 완성을 넘어 하루가 다르게 고점을 경신하고 있는 할리의 육체, 「궁극의 진화 생명체」를 파고드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굳이 기운을 일으킬 것도 없이 수준 이하의 공격은 그의 체내에 흐르는 생체력과 광기에 모조리 튕겨 나가 버리는 것이다.
“엉? 아냐, 아냐! 너 잘했어. 설마 이 몸에 상처를 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야! 크하핫!”
말석이긴 하나 그 데스나이트 또한 불사성에서 파견된 간부급 지휘관.
최초 목표 지점을 완전히 쓸어버린 후에도 끝까지 남아, 본인의 몸을 좌표로 계속해서 언데드들을 증원받으며 레스크 왕국의 남부 일대를 휘젓던 마스터급 거물이었다.
그래봐야 할리의 몸엔 이미 재생되어 흔적도 남지 않은 상처 몇 줄을 남겼을 뿐이었지만.
그간 레스크 왕국의 수많은 강자들을 벤 위용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성과였다.
까드드득—!
할리의 악력에 데스나이트의 투구가 형편없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것도 동급의 오러가 아니면 제대로 된 상처조차 낼 수 없는 금속이었으나, 그 또한 압도적인 힘 앞에선 의미 없는 일반론일 뿐이었다.
[끄기기긱! 너, 광기의 사도야! 불사왕께서 너를 용납하지 않으실···!]
“응, 아냐.”
콰지직!
주먹이 쥐어지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금속의 잔해.
투구 모양이었던 그것은 어린아이가 쥔 찰흙처럼 볼품없는 모양으로 일그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음! 이 정도면 됐겠지.”
이어서 흉갑도 가뿐히 찢어 흑마력이 흐르는 심장도 짓뭉갠 그가 가볍게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귀찮게 엉겨 붙던 언데드들은 그저 가볍게 몸을 터는 것만으로 트럭에 치인 것처럼 우수수 튕겨 나갈 뿐.
대충 휘적거리는 손발로 언데드들을 짓뭉갠 그는 동료들이 나머지 언데드들을 일소하는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놈은 조금 재밌긴 했는데, 역시 부족해.’
초월에 오른 직후, 그가 가진 성격의 큰 축을 담당하던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그때부터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으니.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큼 강한 적과의 치열한 사투, 맛있고 영양이 풍부하며 양도 많은 고기, 앞을 막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술 파괴 본능,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는 과시욕과···.
‘어라? 하나가 아닌가? 뭐, 어쨌든!’
지금도 어느 정도 욕구들이 충족되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썩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정말 억지로, 간신히, 겨우겨우··· 한 조각 남은 이성을 바짝 끌어모아 충동을 억누르고 있을 뿐.
‘아, 불사성에 쳐들어가고 싶어! 거기 쎈 놈들 많은데, 얼마나 재밌을까? 킹의 결정도 효과가 썩 괜찮았지. 내가 직접 사냥해서 먹었더라면 더 기분이 끝내줬을 텐데. 그러고 보니 드래곤 고기도 거의 다 먹었는데, 어디 숨어있는 녀석은 없으려나? 이참에 용 사냥꾼으로 나서 봐?’
단순해진 그의 머릿속을 흥미 본위의 단편적인 생각들이 휩쓸다 사라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딴생각을 하던 중, 문득 그의 시선이 한쪽에 보이는 사막으로 향했다.
‘그보다 남부는 언제 갈 거야···. 거기 대족장이라는 놈, 강하겠지? 참, 그 할멈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 혹시 내가 겁먹어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허?’
이곳은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레스크 왕국에서도 최남단 지역.
즉, 남부 부족 연맹으로 향하는 사막과 인접한 곳이었다.
‘···이참에 그냥.’
막상 목표물이 코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충동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간 다른 아바타들의 영향으로 힘겹게 버티던 얄팍한 인내심이 툭 끊어지는 것과 함께.
할리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
이제는 매일 같이 이뤄지는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가는 불사성.
그러나 그 수장은 그저 아랫것들에게 모든 진행을 맡긴 채, 자기는 그저 대전의 왕좌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인리히 : 할리! 또 어디 가는 거냐!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지 않나!
-할리 : 으하하핫!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얼른 놈의 모가지를 따고 오도록 하지!
-하인즈 2세 : 나도 그렇게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오바이포 이놈들, 상당히 복잡한 유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라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싹 다 쳐내다간 그거야말로 전쟁으로 이어질 테고.
-휴버트 : 브로코슬락이 탈리아 왕국을 집어삼켰던 게 어지간히 인상적이었나 본데. 오히려 더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하니. 숨어있는 동안 연구 많이 한 모양이야.
-휴고 : 저기, 일단 할리부터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워드 : 헹! 지금 저놈, 이제 어지간하면 죽지도 않을 텐데 상관없잖냐. 그보다 데트리움이라는 광석이 남부 사막에서만 난다고 하는데, 가는 김에 그것 좀 집어 와라! 안 그래도 수출 금지 품목이라 구하기도 힘든데, 이번에 밀매 루트도 꽉 막혀서 휴버트도 구할 수가 없단다.
평소처럼 분주하게 오가는 머릿속 사고 교류.
중심이 되어 줄 본체가 없는 탓에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취하고는 있으나, 이제 지구의 시간도 하루는 충분히 지난 시점이었다.
휴고를 통해 대충 진단한 바론 깨어나기까지 사흘 정도를 예상하였으니, 이르면 보름 정도 만에 눈을 뜰지도 몰랐다.
[흐음, 보름이라.]
새삼 그 사실을 자각한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는 다시 한번 진지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 에나멜 대륙 사태를 지켜보며 큰 감명을 받은 것과 동시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간 이룬 것이 너무 없지 않나. 역시 내가 너무 물렀다. 철저하게 이득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했건만, 몸에 남아있던 기억이 은연중에 영향을 끼친 모양이구나.’
자신은 고작 부하들을 보내 대륙 곳곳을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게 하는 게 고작이었거늘.
그간 우습게 보면서 방해 거리로만 여겼던 역천의 서약은 무려 대륙 하나를 통째로 수몰시킬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거기다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가기도 했으니, 만약 세계수를 등에 업은 해리스의 개입이 없었다면 정말 놈들의 뜻대로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벌어들일 수 있는 카르마가 도대체 얼마였을지···.
까드득!
한스의 「괴력」에 뼈로 만들어진 왕좌의 손잡이 부분이 으스러졌다.
흑마력으로 모든 활동을 대신하는 그에게 근육이 없는 것 정돈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자존심 상하는군. 불사왕인 이 몸이 그놈들보다 못하다니!’
놈들에게 감탄한 건 감탄한 거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세계의 진정한 흑막은 자신이어야만 했으니까!
역천의 서약과 부딪칠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둔 데다, 상당수를 자신의 휘하로 거두면서 놈들을 조금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래, 심연을 열고 광기를 꺼낼 정도의 놈들을 그리 생각해선 안 되었다. 확실히 과오로구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성찰이 끝났으니 그다음은 진로 수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약속 따윈 무시하고 당장이라도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고 싶었으나, 그리했다간 본체가 깨어나는 즉시 손해만 보고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시작하면 깎여버린 하인리히의 위신 이상의 이득을 얻기 위해 쉴 새 없이 몰아쳐야 할 텐데, 본체가 대규모 전쟁을 계속 용인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이제 와 다른 계략을 세우기엔 여유가 없다. 놈들은 분명 최소 십 년 이상의 시간을 준비한 계획이라 했지.’
깊은 생각에 잠긴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심연의 광기 유출부터 시작해, 얼마 전에 있었던 황녀 습격 사건, 라이칸스로프의 에나멜 대륙 침공, 단교를 선언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부족 연맹, 오바이포 클랜에 잠식되어 미심쩍은 행보를 보이는 공화국까지.
이전까지 벌어진 사건들의 규모를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수작들도 커다란 파급력을 보일 건수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래, 아예 이 몸께서 통째로 빼앗아 주마.’
물론 카르마란 철저한 인과관계를 따르는 만큼, 이미 다 된 계획에 숟가락만 올리는 정도로는 만족할 만한 양을 벌어들이지 못할 터였다.
그나마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기다릴 것도 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하인리히 : 잠깐, 한스! 대체 무슨 짓을 할 셈이냐! 지금도 충분히 과하다! 더 이상 큰 문제는···!
그에 언제나 정도(正道)를 추구하고 바른말만 하는 귀찮은 자아, 하인리히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지만.
그 정도로는 그의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 흠, 새삼스럽지만 한 가지 정정해두지. 이 몸은 한스가 아니라 한니발 스트라우스이니라.
-하인리히 : 그건 이제 포기하기로 하지 않았···.
아직도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사고를 무시하며, 불사성을 이용해 장거리 이동을 마친 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하늘에 떠오른 밝은 달과 수많은 별, 그리고 그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부스러지는 모래의 언덕.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한밤중임에도 무수한 횃불로 환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막의 도시까지.
이곳은 할리가 목표로 삼고 오는 중인 칼코스 부족 연맹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오랜 정보 수집으로 알아낸 부족장의 근거지이자 쿠데타의 중심지인 ‘베오르센’이었다.
땡땡땡땡—!
“비상! 비상! 모두 전투태세로!”
“주술사들은 곧바로 광전사들부터 깨워!”
우우웅—
역시 중요한 거점인 만큼 준비도 철저히 해 둔 것일까.
그가 등장하자마자 도시가 시끄러워지더니, 베오르센 전역이 기이한 결계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크흐흐— 역시 마음에 드는구나. 무능한 놈들이면 애초에 가질 필요도 없지.]
불시에 남부를 습격한 불사왕.
그는 순조롭게 진행되던 계획에 거대한 주걱을··· 아니, 삽을 들이밀었다.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아예 밥상을 엎어버릴 기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