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24화 (224/284)

#224

칼코스 부족 연맹 (2)

온갖 기괴한 장식품들이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천막 내부.

정체불명의 약초가 조금씩 타오르며 뿜어낸 연기가 가득 찬 곳에서.

차르륵— 촤륵!

가볍게 던져진 뼛조각들이 원형의 금속 쟁반 위를 나뒹굴었다.

그 결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파는 이윽고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후우— 이젠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는구만. 나도 늙었나보이.”

한탄을 터트린 대주술사 모르나가 얼굴에 가득한 문신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점이란 것 자체가 원래 그리 정확도가 높지 않은 주술이긴 했으나, 그거야 일반적으로나 통용되는 얘기일 뿐이었다.

그녀 정도 되는 대주술사에게 간단한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그래야 했을 터인데. 언제부턴가 앞날이 흐려지더니 이젠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그녀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천막 틈 사이의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곳에 보이는 건,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

뭔가에 홀린 듯 부지런히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뿐이었다.

‘발테온···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정상 회의가 파한 직후부터 이곳에서 감금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그녀의 이름값이 몇 부족들을 움직이는데 필요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약발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군. 일단 나름대로 손을 써두긴 했는데, 과연 그가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런지. ···뒷일은 하늘만이 알겠지.’

자신의 ‘직감’에 따라 감시자의 눈을 피해 접촉했던 커다란 덩치의 대전사.

그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으니, 남부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파악한 순간부터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상념에 젖어있던 어느 한순간.

모르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기운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이 둥그렇게 부릅떠졌다.

“허, 이미 늦은 건가···?”

체념한 표정으로 한 뼘의 좁은 틈새로 바깥 풍경— 베오르센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딘가 다른 도시에 잡혀있을 가족들을 떠올리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겐 제발 저 화가 비켜나가길 빌면서.

고오오오—

저 너머 발테온의 거처가 있는 도시의 중심에서.

그녀가 이미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끝없이 불길하고 끔찍한 기운이, 서서히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

-하워드 : 허어, 진짜 돌았구만? 진작부터 알고 있기야 했지만.

-헤스페론 : ···와, 진짜 나중에 어쩌려고 저런데?

-하인리히 : 멈춰! 너는 어디까지 선을 넘을 셈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건···!

-한니발 스트라우스 : 아아— 이젠 그런 소리 듣는 것도 지겹구나. 필요할 때 다시 연결하도록 하지.

-하인리히 : 잠깐···!

한스는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내면에 벽을 세웠다.

본체가 정신을 잃기 전에 세운 「마인드 허브」와의 장벽에 비하면 작은 울타리 수준에 불과했으나.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다수의 사고가 잠잠해지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사악한 지혜」가 「명경지수」와 「혜안」을 흡수하고 「부정한 현자」로 진화합니다.》

그것이 어떠한 계기가 되었는지, 어둠 속에 앉아있던 그의 눈앞에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호오, 과연. 이 구슬 제법 쓸 만하군.]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 한편에 놓인 구슬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내방했던 율령자가 남겨놓고 간 선물.

사용 시 모든 정신적인 능력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이것은, 방금 귀찮은 아바타들과의 상시 연결을 막는 데에 큰 도움이 되어준 기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각 개체 간의 독립성이 강해진 것도 한몫했겠지만.’

본체가 건재하여 모든 개체의 중심이었을 때.

각 아바타는 그저 조금 개성적인 버릇이 있는, 하나의 몸에 달린 손과 발 등의 신체 일부와 다르지 않았다.

심연의 정신 침식을 막아낸 충격으로 본체가 잠든 직후의 얼마간에도 그들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고를 공유하며 행동했다.

한스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하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

아바타들은 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일명 ‘뇌 내 회의’라는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여전히 서로의 상황은 물론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했으나, 그 과정이 조금 더 번거로워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 「마인드 허브」라는 완충지대도 없이 각자 개성이 뚜렷한 자아가 뒤섞이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할 터이니.’

특히 오염까지 되었던 한스, 한니발 스트라우스는 그들 중에서도 유독 따로 떨어져 있던 경향이 강했으며.

이참에 그는 아예 구슬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의지로 여닫을 수 있는 벽을 세워버린 것이었다.

물론 자의적으로 연결을 통제한다 해도 본질적으론 같은 존재인 만큼 그 효과가 오래 가진 않을 테지만, 어차피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았으니 그건 딱히 상관없는 문제였다.

[크크큭— 아, 이거 머리가 굉장히 상쾌하군.]

역시 아바타끼리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던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

어쩐지 자신의 내면에 담긴 감정이 좀 더 순수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다 순결하고 깨끗한— 악(惡)과 독기의 응집 그 자체.

[그나저나.]

그의 시선이 공간을 가득 채운 새카만 기운이 유독 짙게 모인 곳으로 향했다.

“끄으으— 크르륵—!”

[크크큭— 이거 특이하군. 인간이 이렇게까지 심연을 받아들일 수 있을 줄이야. 광기를 품고 있을 때부터 혹시나 하긴 했거늘.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야.]

뿌득— 뚜두둑—!

바닥에 쓰러진 커다란 덩치의 몸이 계속해서 뒤틀리며, 동시에 그에게서 시커먼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계속되던 그 현상은 이내 밖으로 흘러나오던 기운이 다시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서야 마무리되었고.

꿈틀— 꿈틀—

“끄으으··· 지독하군. 광기를 이용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역시 불사왕인가···.”

마침내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나직한 불평을 토해냈다.

전신의 혈관이 검푸르게 부풀어 올랐으며, 흰색이었던 눈자위는 검게 변색되었고 동공에선 핏빛 광채가 일렁인다.

몸에서는 짙은 어둠의 기운이 물감처럼 뚝뚝 떨어져, 그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크프프픗— 어이가 없군. 그동안 그렇게 온갖 애를 써도 넘을 수 없었던 벽이, 이런 방식으로 깨질 줄이야.”

그는 불사왕과의 아주 사소한 분쟁 끝에, 약간의 무력을 동반한 설득으로 결국 진심을 알아주었던 대족장이었다.

그 김에 심연까지 받아들이며 마인이 된, 이번 쿠데타의 주역 발테온.

[힘은 마음에 드는가.]

“그래, 그래서 그쪽이 원하는 것은···.”

[발테온.]

하지만 들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공간을 진동해, 그는 입을 다물고 저도 모르게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말이 짧구나.]

짧지만 권위적이며, 압도되는 한 마디.

그가 받아들인 심연의 영향이었을까?

틀림없이 평생을 염원하던 경지에 올라섰건만, 그는 어째선지 불사왕 앞에서 마음대로 뻗댈 수조차 없었다.

“···원하시는 것은··· 전에 말씀하셨던 대로입니까?”

[물론.]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원하는 것은 대륙에 끼치는 영향력, 그중에서도 자신에게 풍족한 카르마를 보장해 줄 만한 막대한 영향력이었다.

[전쟁이다.]

이미 다 준비가 된 마당이었으니, 그저 이름만 올려도 적지 않은 카르마를 벌 수 있을 터였으나.

그는 이 좋은 기회에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기획 단계부터 시작해 최종 준비까지 다 끝나, 풍요로운 땅을 향해 출진만 앞둔 군대에 그의 개입을 최대화할 방법은?

‘눈앞에 정답이 있군.’

힘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잠식되어 그의 종이 된 총사령관, 발테온.

그의 경우처럼 준비된 군대의 수뇌부부터 말단까지, 모조리 그의 색으로 뒤덮어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크흐흐흣—!]

심연으로.

죽음으로.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일 따윈, 그에겐 매우 사소한 일일 뿐이었다.

***

정신세계의 구슬을 이용한 한스가 아바타들과의 연결 통로를 막아버렸다.

이제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한스가 문을 열기 전까지는 서로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까지 불가능해졌다.

“조금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마음이 급해진 하인리히의 선도 하에, 「아바타 클라우드」로 공수한 사막용 로브와 생존용품들을 배급받은 용사 파티는 빠르게 사막을 주파했다.

리에스타 성녀는 하인리히가, 이세아는 할리가 업은 채 속도를 높이는 데에만 주력했다.

“할리 씨 등판이 넓어서 집중하기도 편하네요. 푹신하기도 하고요.”

“으하하핫! 내가 또 한 등빨 하지!”

질주하는 일행 모두를 뒤덮는 인식 저해와 온도 유지 마법을 유지하던 이세아가 한 손으로 할리의 광활한 등판을 두들기며 감탄했다.

그 면적도 면적일뿐더러, 로브 아래엔 털이 풍성한 마수 가죽이 깔려있어 말 그대로 이동 침대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달리는 와중에도 일행끼리 몇 마디 대화가 오가는 와중.

아바타들의 뇌 내 회의장에서는 오늘도 역시나 심각한 주제가 오가고 있었다.

-하인리히 : 역시 한스를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 돼. 그 행보를 어떻게든 저지해야 한다.

-휴고 : 확실히, 뭔가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었어. 초기에는 그래도 서로 의견도 나누고 다른 쪽 입장도 이해하는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대화 단절이라니.

-휴버트 : 방법이 있나? 뭐, 신성력이 가득 담긴 성검으로 어떻게든 칼침 한 방 놔 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헤스페론 : 그러고 보니 할리, 아까 연결 끊기기 전 상황 보니까 한스가 거기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언데드나 괴물로 만들어버릴 것 같던데. 새 각인은 어떻게 하지? 당연히 그 할머니도 거기 있을 텐데.

-할리 : 으엉? 어, 진짜냐!? 야! 해골 대가리! 설마 주술사 할매 죽였냐? 확 씨! 대답 안 하냐? 할매 죽이지 마라! 경고했다!

그렇게 안팎으로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면서 이동하고 있지만, 그들은 명실상부 세상을 대표하는 강자들이었다.

당연히 그 기감 또한 범인의 인지를 초월할 수밖에 없었으니.

‘사막에 이만한 인원의 매복이라. 마적단인가? 아니면 파병 중인 군대?’

당연히 그들이 가는 길목 일대에 상당수의 인원들이 숨어있다는 것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것도 불필요한 시간 낭비일 테고, 저쪽에선 이세아의 마법을 꿰뚫어 보지 못할 테니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상대측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경계! 경계!”

“정지! 모습을 드러내라!”

“즉각 따르지 않으면 적대 병력으로 간주! 곧바로 사살하겠다!”

어느새 이십여 명이 넘는 인원들이 경로를 막아서고 창과 화살을 들이밀었다.

아무리 이동 중인 데다 다른 마법과 병행 유지하느라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하나, 명색이 대마법사인 이세아가 사용한 마법이었다.

그걸 사전에 감지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빨리 대응할 정도면 절대 평범한 놈들일 리가 없었다.

‘무시하고 지나갈까? 아니면 제압 후 정보 수집? 아니, 이 근방에 있는 놈들만 수백이다. 제압 후 심문까지 생각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는 게 나을 것 같···.’

여전히 달리는 도중,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 만에 어떻게 대응할지 차근차근 분석하다가···.

‘어?’

그 병사들 중 몇의 얼굴을 확인한 할리가 곧바로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하인리히와 다른 이들이 멈춰 섰다.

“할리 씨? 갑자기 왜···.”

그에 등에 매달려있던 이세아가 의아한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그녀도 별반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무렴, 그들은 30미터에 달하는 거인들도 어렵지 않게 찢어 죽이는 최강자들인데 고작 사막 병사 몇에 쫄 리 있겠는가.

할리는 이세아의 도움으로 인식 저해 마법을 해제하고 앞으로 나섰다.

여전히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로브를 입고 있어서 그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진 않았으나—.

“헙!”

“으음!”

그 커다란 덩치와 압도적인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력적인 압박감은 정예임이 분명한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뒤로 물러서게 만들 정도였다.

물론 개중엔 움찔하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자세히 관찰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저 덩치는 굉장히 낯이 익은디.”

“이 오싹한 느낌도 그래. 훨씬 더 강하긴 한데. 설마···.”

“할리? 할리 아냐?!”

굉장히 우연찮게도, 지나간 인연과 사막 한복판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한창 북부에서 자리 잡는 단계의 할리와 시비가 붙었고, 이후엔 친구 겸 부하 직원으로 어울리던 남부 전사 삼인방.

덩치 루왕과 털보 투라바, 칼자국 다오였다.

할리는 로브를 벗어던지며 그들에게 향했다.

“크하하핫! 이거 이런 데서 다 보는구만, 친구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할리 너야말로 여긴 어쩐 일로···.”

“맞어. 한창 용사님과 돌아다니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으잉? 가만, 그럼 설마 저쪽 분이!”

“히익! 미스티 님! 미스티 님! 잠깐 나와보십쇼! 할리가! 용사님이!”

베오르센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마주한 정체불명의 군대.

그들은 사악한 수법으로 부족들을 억압하는 발테온을 처단하기 위해 모인 반 발테온 세력으로, 그들을 이끄는 미스티라는 이 이십 대의 여성은···.

“안녕하십니까. 누군가 접근하고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만, 설마 그게 용사님 일행이셨을 줄은 몰랐군요. 이 또한 운명이겠지요. 전 미스티라고 합니다.”

발테온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이전에 남부를 통치하던 대족장의 딸이자.

대주술사 모르나의 손녀이며, 동시에 제자이기도 한— 대주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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