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뒷수습 (1)
굳이 상황을 파악한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실상 육체만 잠들어 있었을 뿐, 자신의 정신은 계속 깨어있던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비록 그것이 여러 성향에 따라 아홉 조각으로 나뉘어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하! 이거 참.”
다양한 장소에서 각각의 개성대로 흘러가던 조각난 사고(思考)가 순식간에 하나의 체계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공화국의 부통령과 손잡고 오바이포와의 결전을 준비하던 하인즈 2세.
혼란스러운 정세를 역이용해 오히려 상회를 더욱 키우는 중인 휴버트.
식물처럼 세계수의 가지 위에 늘어져 광합성 하기 여념이 없는 해리스.
기어이 자오닉에게 드워프의 비기를 전수받는 데 성공한 하워드.
매일 방문하는 라일리의 관심 속에서 편하게 마법을 익히던 헤스페론.
쓰러진 본체를 보살피며 지구에서의 역할을 대신 수행한 휴고.
거기다 다수와의 전투로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결국 다른 마인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혼자 남은 대족장을 두들겨 패며 광소를 터트리는 할리와···.
‘···겨우 이틀이었는데.’
막 초월에 이른 고양감 속에서 찬란한 성검을 단단히 틀어쥔 하인리히.
그리고 그 성검에 가슴이 꿰뚫린 채 한창 분노를 표출하던 한스까지.
‘그 이틀 만에 일이 이 지경이 되나.’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저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정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한스의 뇌리를 잠식한 심연이 잠깐 날뛰기도 했으나, 때마침 몸에 박혀있던 성검의 기운 탓에 그 반항은 오래가지 못하고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물론 굳이 성검이 아니었더라도 큰 문제야 없었겠지만.’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정신을 잃기 전에 떠올랐던 문구를 다시 확인했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영혼 방화벽」를 획득합니다.》
지금까지처럼 단순히 「마인드 허브」로 부정적인 영향을 걸러내는 정도를 넘어, 말 그대로 본체의 영혼에 불가침의 방벽을 쌓는 능력이었다.
‘···이걸로 이제 전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
이쪽으로 흘러들어오는 역류를 막기 위해 악을 썼더니 아예 정신 오염에 면역이 되도록 성장한 것.
마침 능력의 취약점을 발견해 대책이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수고를 덜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지금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이번에 한스가 친 사고는 그간 아슬아슬하게나마 지켜오던 선을 한참 넘어서는 짓이었으니.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난리 속에서 덧없이 스러져갔으며, 심지어 동료인 지오스마저 거기에 휩쓸려 버렸다.
그 주체인 한스가 나 자신이었으니 누굴 탓하겠냐마는···.
이게 술 먹고 필름 끊겨서 거하게 사고 쳤다가 경찰서에서 정신 차렸을 때의 기분일까?
‘젠장, 그때 그 거인 놈이 개수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그래, 그렇게 따지자면 강제로 술을 먹여 대형 사고를 치게 만든 놈들이 원흉이었다.
실행범인 거인과 그걸 소환한 주체인 혁명가, 그리고 그 배후에 있을 주(主)라는 놈까지.
엄밀히 생각해 보면 이쪽도 피해자일 뿐이지 않던가!
‘하아— 망할.’
물론 그렇게 현실을 외면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남을 탓하기 전에 상황부터 수습하는 게 먼저겠지.
***
[키야아악——!]
후우우웅—
주인의 위기를 감지한 본 드래곤의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거구가 움직이며 거센 돌풍이 휘몰아쳤고.
그 바람이 불사왕과 용사의 곁을 지나간 직후, 전장은 자연스럽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빠르게 개입한 헤라토스의 뿔을 잡고 머리에 올라탄 채 뒤로 물러난 불사왕 한스.
그리고 성검을 그러쥐고 탈진 직전의 동료들 앞에 버티고 선 용사 하인리히.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들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불사왕 쪽이었다.
[크흐흣— 과연, 제법이구나. 용사 하인리히. 설마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내가 너희를 너무 과소평가했군.]
언제나처럼 오만한 태도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하인리히의 마지막 일격은 그에게도 무시하지 못할 피해를 안겨주었다.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성스러운 불길이 계속해서 그의 힘을 불사르고 있는 것은 물론, 아공간 너머의 「불사의 심장」에도 상당한 충격이 전해진 것이다.
물론 명색이 불사왕인만큼 급소를 한 번 허용했다고 곧바로 무력화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예기치 못한 치명타를 입은 것도 사실.
그런 만큼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모양새였다.
“이제 시작이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다음번엔 그 심장을 확실하게 쪼개주마.”
[허세는 통하지 않는다, 용사여. 너는 물론이고 네 동료들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만? 과연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마지막에 남는 건 누가될까?]
“···큭!”
그 말대로, 사실 지금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용사 파티 쪽이 더했다.
하인리히도 초월에 이른 덕분에 비교적 멀쩡해 보일 뿐, 갑옷을 비롯한 장비와 육신이 너덜너덜한 건 마찬가지였고.
주변에 가득한 심연의 기운으로부터 일행을 지켜주던 성녀의 보호막은 깨지기 직전에.
필사적으로 전력을 다해야 했던 일행들 또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는 등, 아무리 봐도 전투를 더 지속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나는 이 유희를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다, 용사. 대륙 정벌이 너무 시시한 것도 따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지오스의 상태가 굉장히 심각했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 몸이 직접 나섰다가 물러서게 된 것도 사실이니, 이 지역에서 일어난 침공은 네 승리라 해 두지. 기뻐해도 좋다.]
그러면서 선심 쓰듯 내민 대가는 불사의 군대가 이곳 베오르센 인근의 남부 일대를 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긴 주술사들 때문에 유령 정찰도 쉽지 않은 데다, 테러할 만한 녀석들을 찾기도 힘들 뿐이지만.’
또 그나마 있던 타깃인 발테온과 그 일당도 할리가 한창 때려 부수는 중이기도 했고 말이다.
“···주신께서 함께하시는 한, 우리는 절대 멈추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기필코 너를 심연의 밑바닥에 처박아주마, 불사왕!”
[흐— 그것도 재밌겠군! 그럼 그날을 즐겁게 기다리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간을 가득 채우던 어둠이 한순간에 한스에게 빨려 들어가며, 끝없이 넓었던 주변 공간이 눈 깜짝할 새에 저택의 중앙 홀로 바뀌었다.
펄럭— 펄럭— 콰르릉!
이어서 하늘에 체공하고 있던 본 드래곤의 거체가 비좁은 건물의 천장을 부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음번엔 내가 있는 곳, 불사성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나의 유일한 대적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여. 크흐하핫—!]
그리고 불사왕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언데드나 마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밤하늘을 가르며 유유히 사라졌다.
이제 그런 잡졸들 따윈 어찌 되든 좋다는 듯이.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렇게 한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훌륭하게 제1 과제, ‘불사왕의 이탈’을 마무리한 하인리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지오스 님! 정신 차리세요!”
“지오스 씨!”
“성자님, 빨리 이쪽으로···!”
···예정되었던 시간이 다가왔다.
***
콰앙—!
4미터에 달하는 근육질의 거한이 자기 가슴어림밖에 되지 않는 덩치에게 주먹을 내리꽂았다.
“커헉! 이 괴물이!”
“카하하핫! 누가 누구보고 괴물이란 거냐? 이 쪼끄만 괴물 놈아!”
“큭, 네노옴—!”
검은색과 보라색의 울긋불긋한 오염으로 뒤덮인 전신에,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이 우락부락하게 자라난 육체.
누가 봐도 괴물 그 자체인 발테온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며 매도하려 들었지만, 멋진 전사 할리(4미터)는 그저 껄껄 웃으며 그에게 재차 주먹을 날릴 뿐이었다.
‘역시 이 정도 사이즈가 딱 좋군! 여기서 더 키우면 순발력이 떨어져서 이놈처럼 빠른 놈들에겐 샌드백밖에 되지 않으니.’
전투가 시작되자 마인인 발테온이 덩치를 한껏 부풀리고 덤벼들었으나, 「궁극의 진화 생명체」로 신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할리에게 체급으로 비빌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그냥 격 자체만 비슷할 뿐.
할리는 불완전하게 경지를 끌어올린 그에 비해 모든 면에서 상위호환이었다.
심지어 「광기의 폭군」으로 ‘광기’를 생체 에너지로 변환해 필요한 열량을 대체할 수 있게 되면서, 항상 발목을 잡아 왔던 전투 지속력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던가.
“크하하핫! 튼튼하구나, 튼튼해! 어디 부서질 때까지 가 보자!”
“끄으윽! 이 짐승 같은 놈이!”
거기에 「칼코스식 전투 각인」의 증폭 효과와 압도적인 생체력으로 뽑아내는 「생체 오러」까지 사용하며, 변칙적인 이능인 「보석안 : 강압」까지.
그가 일대 다수의 싸움에서 기어코 모든 마인들을 박살 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인데 다수로도 이기지 못했던 할리를 혼자 남은 발테온이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저택의 결계가 무너지고 불사왕이 떠나면서부터 더욱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던 그는···.
“···끄르륵, 아까까지만 해도 짐승처럼 날뛰기만 하던 놈이···! 젠장! 이 영악한 놈, 그건 일부러 보인 허점이었나···?”
결국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리에게 목을 잡혀 제압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으스러진 사지가 재생하지 못하도록 「보석안 : 강압」의 지속적인 외압에 비틀린 채로.
“음, 그건···.”
억울하다는 듯 이를 가는 그의 모습에, 본체가 깨어나면서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이 돌아온 할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날뛰던 것이 맞았으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싸움이 일단락되면서, 적의 근육 한 올의 움직임까지 감지하기 위해 좁은 지점에 집중되었던 감각이 풀어지고.
할리의 예민한 지각 능력이 좀 더 넓고 먼 범위를 인식한 순간.
‘어라? 생각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네?’
그는 이 도시 안에 함께 왔던 전사들뿐만 아니라 제법 많은 생존자가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묘하게 들뜬 기색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오호?’
뒷머리를 긁적이던 그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목줄이 잡힌 울긋불긋 흉악한 외견의 괴물에게로 향했다.
남부에서 발생한 변란의 원흉이자 독재와 억압의 상징, 악의 수괴 발테온에게로.
“흐하하핫—!”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할리가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예로부터 야성과 대등할 정도로 관종끼와 똘끼가 충만했던 할리.
그는 마치 주변에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하면서도 또박또박하게 발테온의 의문에 답했다.
“당연하지! 발테온, 너는 진즉에 이 할리 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암, 이 몸이야말로 진정한 전사이자 사냥꾼이라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 카하핫핫!”
남부의 역사에서 지금의 순간은 제법 기념비적인 순간일 터였다.
할리는 한 손으로 그를 제압한 채로 슬쩍슬쩍 몸 곳곳에 힘을 줘, 주변의 구경꾼들에게 자신의 육체미를 과시했다.
‘흠, 그러고 보니.’
그 와중 자신의 몸 곳곳에 새겨진 각인들이 눈에 들어오자, 문득 대주술사 모르나와 했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남부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투왕의 각인’을 새겨준다던 약속.
솔직히 초월까지 한 마당에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긴 했으나, 수백 년간 아무도 새기지 못한 각인이라는 희소성은 여러 가지 번거로운 점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남부의 문제는 이 발테온만 처리하면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
머리가 잘려 나간 이상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고.
그 대주술사 할멈의 기운도 도시 내에서 흐릿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이 환란 속에서도 어찌어찌 결계 안에 잘 숨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의뢰 완수라고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그 전에.
‘심연의 문 개방 사태의 주범, 역천의 서약의 남부 지부장 발테온. 이놈 정도면 썩 괜찮은 선물이 되겠지.’
“끄으으! 네놈 무슨··· 끄윽!”
우드득! 우득!
할리는 놈의 몸을 좀 더 꼼꼼하게 으스러트리며 위험 요소를 철저하게 제거했다.
아직은 조금 더 살려둬야 했으니, 만약의 사태를 일으킬 요인들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섬세한 손길이었다.
“후우, 됐다. 그럼 가자고!”
그리고 그는 「보석안 : 강압」으로 철저하게 포장된 발테온의 몸을 땅바닥에 질질 끌며.
어느새 적막이 깃들기 시작한 중앙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