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30화 (230/284)

#230

뒷수습 (2)

첫 공격을 실패하고 불사왕의 반격을 받았을 때.

지오스는 자신이 확실히 죽었다고 생각했다.

전신을 파고들어 심장을 비롯한 장기를 파괴하는 날카로운 가시와, 그를 통해 독소처럼 퍼져나가는 끔찍한 기운은 산 자가 버틸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핏빛 오러에 옮겨간 생명력은 육체라는 그릇이 파손되었음에도 그가 즉사하지 않게 해 주었으며.

너무 늦지 않게 이어진 성녀의 신성력 세례는 그의 생을 잠시나마 붙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본 드래곤과 불사왕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는 동시에 파티원들에게 부여된 가호를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여력을 쥐어짜 지오스를 회복시키는 데 전력을 다하는 리에스타 성녀.

‘여기서 괜히 나에게 더 힘을 낭비하다간 다른 사람들도 위험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끝까지 만류하는 성녀를 뿌리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고···.

한창 불사왕과 맞서던 하인리히의 싸움을 눈에 담고서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아아.’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선연하게 느껴지는 무모할 정도의 도전과 그것을 관철하는 철의 의지.

그는 몸이 찢기고, 부서지고, 터져나가면서도 끝내 멈춰 서지 않았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목표에, 어떻게 해서든 닿고 말겠다는 일념을 담아.

지오스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창을 들어 올리며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주신이시여, 제가 주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을 불살라 저 영웅의 일보에 한 손 보태는 것.

아마 그건 지오스 칼킨이라는 사내의 끝맺음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마무리겠지.

‘이 미천한 목숨이 작게나마 그의 앞길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주던 실낱같은 기운까지 모두 끌어모아 최후의 일격을 날린 그는.

그것이 불사왕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파훼 되는 순간 절망했으며.

그 직후, 마치 자신의 기도에 응하듯— 어둠을 밝히는 여명이 하인리히의 몸에 깃드는 것을 보고 전율했다.

그리고 절대 범접할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이 세상의 절대 악, 불사왕의 심장에 용사의 성검이 박혀 드는 순간.

그는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저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설령 지금 이 자리에서 불사왕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해도, 결국 마지막 결말은 저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란 것을.

어쩐지 아득한 기분 속에서.

그는 그 필연적인 끝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오스 님! 정신 차리세요!”

“지오스 씨!”

“성자님, 빨리 이쪽으로···!”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그는 지척에서 웅성거리는 소란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깨달았던 것은 그저 꿈이었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오스 님.”

그는 나직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용사를 마주했다.

이 세상의 희망이자 대륙에 빛을 가져다줄 구원자, 성자 하인리히.

“크흥, 형씨. 내가 선물을 가져왔는데.”

곧이어 할리가 손에 웬 덩어리를 질질 끌며 나타났다.

안 그래도 헐벗은 장비가 너덜너덜해져 더욱 개방적이게 보이는 모습으로.

“아! 이놈이 어떤 놈이냐면···.”

이젠 입을 열 힘조차 없어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그 괴물이 심연 개방을 주도한 무리의 수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과연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만족스러운 선물이었다.

그래봐야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금은 그저 놈이 자신의 눈앞에서 처분되는 것을 보며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복수 같은 건 어찌 돼도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그간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며 질릴 정도로 흑마법사를 사냥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느꼈던 어떤 깨달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뒷일은 이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겠지. 나 같은 거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들이니까.’

지금은 그저 쉬고 싶을 뿐.

왠지 모르게 리에스타와 이세아, 리디아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정신이 몽롱해지고 끝이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는 느낌이 들던 순간.

“안녕히 주무십시오, 지오스 님. 좋은 꿈 꾸시길.”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 따뜻한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단 채,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말대로.

그리웠던 가족들을 만나는 꿈을 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드르륵—

창문을 열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간질였다.

잠시 그 느낌을 만끽하던 나는 이내 창틀에 몸을 기대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다가오며 서늘하게 느껴지는 공기 속에,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력을 뿜어내는 안뜰이 눈에 들어왔다.

「개체 투영」으로 하이 엘프인 해리스의 힘을 불러와 손본 정원.

그 덕분인지 집 앞마당은 전문 정원사가 관리한 것 이상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허!”

잠시 그 풍경을 감상하던 나는 문득 헛웃음을 터트렸다.

꽤 오랜 시간 함께하던 동료가 자신 때문에 죽은 직후인데, 잘 꾸며진 정원을 보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행실이란 말인가?

‘정말, 어지간히 망가졌구나.’

밀려오는 자기혐오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오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복수를 원하는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걸.

그런 그에게 극악의 생존율로 악명 높은 용사 파티는 어쩌면 최적의 자리였을 터였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누구도 죽게 할 생각이 없었던 만큼, 간접적으로 그 복수를 도우며 천천히 마음을 다스리도록 타이르려 했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쓴웃음과 함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한스는 진심으로 그 자리에 있는 동료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아마 지오스의 활약이 없었다면 하인리히도 제때 초월에 이르지 못했을 테고, 본체가 깨어나는 것도 늦어져 어쩌면 정말 일행들 모두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하인리히는 분노한 한스가 지오스에게 살의를 보이기 전까지, 설마 진짜 그렇게까지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하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 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동료가 목숨을 던져 이루어낸 결과를 보고 다행이라니.

돼먹지 못한 감상이란 자각은 있었으나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나은 게 사실이었다.

‘···그래, 대신 복수는 내가 확실하게 마무리해 줘야겠지.’

사실상 발테온을 끝으로 그 사건과 관련된 놈들은 대부분 처리했다고 봐도 좋았다.

아직 남부에 남은 잔당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거야 그간 억압되었던 부족들이 들고일어나 깔끔하게 정리할 테고.

‘혹시 모르니 일이 확실히 처리될 때까진 할리를 남겨놔야겠어. 문제는 최종 배후인 혁명가 그놈이군.’

놈에 대해 알아보려고 역천의 서약 간부였던 시아나를 닦달해 보기도 했는데, 자신의 정보를 어찌나 철저하게 숨겼는지 영 쓸 만한 내용이 없었다.

여러 단서를 취합한 끝에 놈이 ‘심연에 봉인된 무언가’를 다시 세상에 꺼내놓으려 한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그게 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지.’

그것이 죽음이나 광기보다 더 흉악한 것일 거란 건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으리라.

어쩌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마신일지도.

‘아니, 마신은 시아나의 고향인 마계 관할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지금처럼 계속해서 그 계획을 방해하다 보면 결국 놈도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을 테니, 그때가 바로 놈을 처리할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멍하니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대강 생각을 정리했는데도 여전히 머리가 복잡해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실 최후의 싸움에서 한스가 급발진한 거야 정신 오염 탓이 크다지만, 그전까지 보였던 과격한 행보는 딱히 그것 때문만도 아니었다.

‘사실 나도 매번 유혹에 시달리던 차였으니까.’

윤리와 양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훨씬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선만은 넘지 않고자 학습된 인간성으로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이놈의 한스가 사고를 쳐 버렸네?

그동안 충동의 브레이크가 되어주던 도덕성이 결여된 자아가 결국 일을 저질러 버렸다.

‘일단 불사성에서 남하하던 병력은 산맥을 벗어나기 전에 멈춰놓긴 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불사의 군대가 대륙에 입힌 피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자신의 내면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내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라며 스스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으니—.

“하, 하하···.”

다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싶어서.

그래도 그런 이기적인 생각 덕분에 복잡하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또 그렇게 되니 그간 지켜오던 선을 넘으면서까지 추구했던 성과에 관심이 쏠렸다.

사실 이 짧은 시간에 워낙 대형 사건들이 연달아 터진지라 조금 기대되기도 했고.

“어?”

그리고 그 기대는, 예상했던 것을 아득하게 넘어서 충족되었다.

지구 시간으로는 겨우 이틀 잠들었을 뿐인데.

아우테리카 시간으로도 고작 20일이 좀 넘은 시간이었을 뿐일진대.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1,2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9,999,627』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수치의 포인트가.

그곳에 있었다.

“···와우.”

그 어이없는 단위에 저도 모르게 실없는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천만이 코앞이네.’

그동안 고유스킬 강화에 쏟아부은 포인트가 모두 630만.

거기에 스테이터스 강화에 사용한 포인트들까지 더하면 대충 엇비슷해지지 않을까?

쉽게 말해 지금까지 사용한 카르마와 비슷한 양이 고스란히 손에 들어오게 된 셈이었다.

‘내가 기절하기 전에 얼마나 남아있었지? 그리 많진 않았었던 것 같은데.’

거기다 카르마라는 건 큰일을 겪은 직후 대량으로 들어오기도 하나, 그 사건에 영향을 받아 뒤늦게 들어오는 양도 적지 않았다.

아마 이 압도적인 수치도 운 좋게 그런 것들이 맞물려 나타난 것일 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만이라···.’

몬스터 광기 사태에서도 근근이 안정을 유지하던 사회가 한스의 전방위적인 대륙 침공을 계기로 기어이 무너져 내렸다.

대륙은 몬스터와의 전선에 무관하게 언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불사의 군대에 대비해야 했고, 대부분의 영지가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한스의 악명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거기다 제론에서 라일리의 암살을 막은 것도 컸을 테고.’

황실을 등에 업은 채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대대적인 색출 작업에 들어갔던 라일리 황녀.

집요한 수사 끝에 그녀는 결국 그 사건의 배후가 제국에서도 넷밖에 없는 거대 가문, 황태자의 외가이자 현 황후의 친가인 허먼하트 공작가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직 대대적인 공표는 하지 않았지만, 충돌은 시간문제겠지.’

아무래도 현 시국이 인류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감이 있었다.

자칫하다간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초대형 스캔들이었으니까.

이것도 매일같이 헤스페론의 문병을 와서 수다 떨고 가는 그녀가 직접 말해줬기에 알 수 있었던 극비 정보였다.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에나멜 대륙에서 라이칸스로프들을 해치우고 세계수를 지킨 것인가.’

그 사건 직후에 해리스가 거의 반 식물 상태가 되었던 탓에 자세한 현황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려 신의 화신인 세계수를 지키고 대륙 침몰을 막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거기에 이번에 있었던··· 남부의 불온 분자들을 정리하고 불사왕을 물리친 사건까지.’

거기다 그 여러 과정 중에서 할리와 해리스, 하인리히 셋이 초월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던가.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고 보니 과연 이 압도적인 카르마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이 카르마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현실로 다가온 막대한 보상 앞에서 조금 전까지 마음을 뒤흔들던 번뇌는 깔끔하게 증발해버렸다.

지금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뿐!

그렇게 한창 기대감에 들떠 있는 와중에도 카르마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시차의 영향도 있어, 천만에 살짝 부족했던 수치는 순식간에 차올랐고.

마침내— 포인트의 앞자리 수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업적 달성! 사용하지 않은 카르마 포인트가 천만이 넘어섰습니다.》

《당신을 죽이지 못한 고난과 시련은 당신을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보상으로 특전 「카르마 상점 Ver.2 업데이트」를 부여합니다.》

《업적을 달성하여 카르마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예상치 못한 문구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이제 와서 상점 업데이트?’

아무래도 이 아카샤 시스템은.

내가 카르마를 아끼지 않고 팍팍 쓰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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