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33화 (233/284)

#233

카르마 쇼핑 (1)

‘할 일이 많군.’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그저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겠지만, 진짜로 몸이 열 개인 나에겐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아니, 오히려 몸이 열 개라 더 바쁜 것 같았다.

‘하나같이 큰물에서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큰일에 엮여 있기도 하고.’

먼저, 마침내 「투왕의 각인」을 새기게 된 할리.

전통을 중시하는 주술사들은 별다른 반발 없이 그를 인정하고 공경을 표했으나, 그렇다고 그가 곧바로 남부를 지배하는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마지막 투왕이 등장한 이후로 오랜 세월이 지나 서로 간의 합의하에 선출되는 대족장 체제가 굳어진 상태였으니까.

아무리 그것이 건국 초기의 약속이라 한들, 현세대의 대중들에게도 쉽게 인정받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터···였지만.

생각 이상으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굉장히 순조로웠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이번에 남부에서 불사왕을 물리친 결사대의 일원이자, 인류를 배신하고 온갖 폭거를 저지르던 전 대족장 발테온을 처단해 칼코스를 구원한 위대한 전사.

심지어 유폐당했던 현 대족장은 후유증으로 빠른 복귀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대중들은 그들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줄 젊은 영웅 ‘투왕 할리’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남부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패트릭한테도 가 봐야겠군. 언제 한번 용병 길드에 얼굴 좀 비춰달라고 그렇게 징징거리더니, 지금은 잘하고 있나 몰라.’

사무총장 패트릭은 그의 이름을 빌려 실각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길드에 버티고 앉았으나, 확실한 일 처리를 위해선 할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길드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일을 맡겼으니 이 정도는 협조해주는 게 도리겠지.

‘한스도··· 당분간은 시간이 좀 필요할 테고.’

때마침 한동안 불사성에서 요양할 예정이었던 불사왕 한스.

그는 이참에 두 가지 큼직한 연구 거리를 가지고 칩거에 들어갔다.

첫 번째는 심연의 문에서 입수한 금속 조각을 매개체로 ‘광기의 씨앗’을 추적해 그것과 함께 있을 혁명가를 찾아내는 것.

‘지금까지 철저하게 추적을 따돌렸을 정도로 범상치 않은 놈이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간파당하면 또 무슨 수를 쓸지 몰라.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처리한다.’

두 번째는 살마의 손상된 사념을 이용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카르마 수급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아무리 아우테리카에서 일을 벌인다 해도 결국에는 한계가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언제까지고 불사왕과의 싸움으로 우려먹을 생각은 없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물론 각 세력의 요직에 올라간 아바타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야 있겠지만, 일부러 세상의 혼란을 부추기지 않는 이상 상황이 안정될수록 지금보다 수입이 줄어들 것은 뻔한 일.

‘거기다 강환계는 무림계 차원. 대인 전투에 한해서는 차원 중에서도 손꼽힌다고 정평이 나 있으니,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걸 얻을 수 있을지도.’

기억을 읽는 한스의 능력으로 여러 무림계 귀환자의 지식을 강탈하긴 했으나, 힘의 근본적인 체계가 너무 다른 탓에 그들의 정수를 온전히 깨우칠 순 없었다.

물론 그렇게 훔친 초식과 무리(武理)만으로도 하인리히의 「무도의 길」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비의를 체득하기 위해선 직접 그곳에 가서 무공을 익혀볼 필요가 있었다.

이능의 불모지인 지구에는 아예 기(氣)에 입문하는 것부터 불가능하고, 아우테리카는 기운을 구성하는 법칙 자체가 달랐으니까.

물론 어느 쪽이든 결과를 내는 데 시간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머지는 당장 급하지 않으니 나중에 생각하자. 당장 신경 써야 할 건 따로 있으니.’

그 말대로, 지금 바로 이 순간—.

나는 그 무엇보다 큰일을 앞두고 있었다.

“후우—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긴장 속에서 깊게 심호흡하고, 두 손을 비비며 날카롭게 뜬 눈으로 코앞의 시스템창을 노려보았다.

『카르마 상점 Ver.2』

그래, 드디어 대망의 쇼핑 시간이었다.

준비된 총알은 530만 포인트.

‘일단 시작은···.’

먼저 가벼운 마음으로 『성장의 비약(7일) (200,000)』을 2개 구입해 하워드와 헤스페론에게 전송했다.

매일 대장간에서 땀을 흘리는 중인 드워프 장인 하워드는 물론, 온갖 마법서를 탐닉하며 수련에 열중하는 헤스페론에게도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이 비약은 무엇보다 값어치 있을 테니.

‘딱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사 보자. 효과가 별로다 싶으면 다음부턴 어림도 없지만.’

처음엔 하나만 사서 시험해 보려 했다가, 좀 더 확실한 비교를 위해 그냥 통 크게 질러버렸다.

한쪽은 몸을 이용하는 기술 숙련 작업이고 다른 한쪽은 지식을 쌓고 마력을 다루는 과정이었으니, 이로써 좀 더 확실하게 성능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

이제 남은 건 490만 포인트.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앞자리가 바뀌어 버렸다.

괜스레 초조해진 기분으로 나는 그다음 목표를 노려보았다.

『무작위 기타 스킬 습득 (500,000)』

무작위 뽑기.

게이머에게도 익숙한 애증의 대상이었다.

확률에 홀려 눈이 돌아간 소비자에게서 끝도 없이 돈을 빨아들이는 악마의 상술.

원래라면 이런 도박성 짙은 상품엔 절대 손댈 생각이 없었으나···.

‘잘 생각해 보면 나한텐 충분히 이득이야.’

「아바타」는 본체가 가진 스킬을 공유한다.

즉, 따지자면 나는 스킬을 하나만 뽑는 게 아니었다.

본체를 비롯한 아홉 아바타가 모두 공유하는, 무려 10개분의 스킬을 뽑는 셈이었다!

‘실질적으로 생각하면 가격은 겨우 5만! 이 정도면 오히려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합리적이지! ···진짜 딱 한 번만 해 보자.’

그간 분신들의 초기 행보에서 첫 공유 스킬인 「초회복」이 얼마나 많이 도움이 되었던가?

단순히 도움이 된 것뿐만 아니라, 할리나 하인즈 2세의 「초재생」처럼 이후 스킬이 진화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튼튼함」같이 미묘한 성능이 나오더라도 괜찮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테니. 거기다 만약 대박이라도 터지면···.’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소소하게 「물리 면역」이라던가 「부활」, 「즉사의 마안」같은 거라도 나와 준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에 이미 단단히 홀려버린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당당하게 뽑기를 선택했고—.

《무작위의 가능성을 강제로 개화합니다. 스킬「제노글로시」를 획득합니다.》

그와 동시에 뭔가 있어 보이는, 굉장히 멋있는 이름의 스킬을 습득할 수 있었다.

“오오—! 오···?”

제노글로시(Xenoglossy).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었다.

단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초능력이었으니까.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모든 과정을 원어민 이상으로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며, 인종은 물론이고 종족마저 가리지 않고 적용된다.

그래, 마치—.

지금 내가 아우테리카에서 대륙 공용어와 엘프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즉, 이세계로 전송된 각성자에게는 기본적으로 탑재된 능력이란 소리였다.

“···아니, 아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자. 분명 쓸 데가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보면 지구에서는 충분히 유용한 능력이었다.

처음 하회탈이 일본에서 활동할 때 언어 문제로 얼마나 골치를 썩였던가.

그 때문에 한동안 열심히 언어와 관련된 기억을 읽어 들이며 따로 일본어를 습득해야 하지 않았나?

···바꿔 말해, 한스가 시간만 할애한다면 무난하게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란 소리였다.

“크흠, 한스는 고급 인력이니까. 앞으론 괜히 그런 문제로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 충분히 좋은 능력이지.”

그 시간에 좀 더 확실하게 정보 수집을 할 수 있을뿐더러, 번거로운 중간 과정을 거칠 필요 없다는 것만 해도 큰 장점이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기합리화를 마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두 번 다시 도박엔 손을 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남은 카르마는 440만.

하마터면 마음이 꺾여버릴 뻔했지만, 아직도 풍족한 총알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역시 안정적인 건 고유스킬 강화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근간이자 든든한 국밥처럼 언제나 후회하지 않게 해 준 선택.

120만짜리 ‘고유스킬 강화’를 선택했다.

《아바타의 잠재력이 상승합니다. 개체의 학습 능력이 더욱 향상됩니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이 확대됩니다. 관련된 하위 스킬들이 더욱 강화됩니다.》

이번엔 특별한 능력이 생기진 않았으나, 그래도 아바타의 개체수가 증가했으니 상관없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것은.

『골드 드래곤 해츨링 휴레이오네의 드래곤 하트 (910,000)』

날 때부터 강대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 숨 쉬듯 마력을 사역하고, 그저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극의를 넘어 초월에까지 이르는 불합리한 종족.

바로, 그런 존재를 모사하기 위해 필요한 매개체였다.

‘기껏 다른 종족으로 변할 수 있게 됐는데 최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 정도는 해 봐야지 않겠어?’

물론 그 또한 진심이긴 했으나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종족으로 시작한 아바타들을 결국 대륙 정상의 위치에 세운 나였다.

그런 내가, 인간보다 월등히 높은 잠재력을 품은 드래곤의 육체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육성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불사왕인 한스조차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그 번천회주를 상대할 때도 큰 도움이 되겠지.

가장 큰 전력인 한스는 천사인 그놈에게 상성상 불리하니, 대신 용 정도는 나서 줘야 균형이 맞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차피 매개체로 사용할 거, 물품 목록을 검색해 제일 저렴한 드래곤 하트를 골랐다.

가장 처음 발견했던 183만짜리에 비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

드래곤의 유아기인 해츨링인데도 제일 싼 물품이 91만씩이나 한다는 게 끔찍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만했다.

‘두 차례의 대전쟁에서 철저하게 노려져 멸종한 드래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드래곤 하트는 불사왕에게 오염되거나, 멀쩡한 건 대륙 측의 전쟁 물자로 사용되었지.’

그만한 규모로 일어난 전 종족의 사활을 건 전쟁 속에서 뭘 아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드래곤 하트가 재료로 사용된 것 중에 지금까지 멀쩡히 전해져 내려오는 장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쪼개지고 가공된 드래곤 하트로는 조건을 만족할 수 없다.’

굳이 불사왕 한스가 아니더라도 성자 하인리히나 일국의 지배자 하인즈 2세의 영향력이면 그런 마도구 몇 개쯤은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하나의 훌륭한 마도구일 뿐, 「커스터마이징」의 재료로는 부적합했다.

‘매개체로 사용하기 위해선 온전한 물건이 필요해. 그것도 오염되지 않은 건 물론 가공도 되지 않은 순수한 걸로.’

인간은 물론 엘프와 드워프 같은 일반적인 종족들을 만들 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런 양품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해츨링의 것도 91만이나 하는 거겠지.

‘저런 고유한 물건들은 뭔가 따로 조건이 있는지,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가격이 변동되는 것 같지도 않고. 아니, 정말 지금 대륙에 존재하긴 하는지조차 의문이군.’

사실 생각해 보면 포인트 조금 아끼자고 기약 없이 물건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그 시간에 적극적으로 움직여 아바타를 성장시키면서 카르마를 벌어들이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한 나는 길어지기 시작한 고민을 억지로 멈추고, 더 망설임이 생기기 전에 단호하게 물품을 구입했다.

우우웅—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주먹 만 한 금색 결정이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으며 은은한 황금빛을 내뿜었다.

‘이게 진짜 드래곤 하트.’

할리가 헤라토스의 심장에 파고들었을 때 본 것보단 훨씬 작았으나, 그것이 내뿜는 기운은 압도적으로 정순했다.

“그런데··· 조금 부족한가?”

그러나 그것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물건은 매개체로서 합당하지만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하기엔 아직 내 수준이 부족하다고.

‘부족해? 그럼 강화하면 되지!’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어차피 총알은 229만이나 남은 상태.

나는 ‘기타 스킬 강화’를 이용해 10만 포인트로 「커스터마이징」을 한 차례 강화했다.

“아직도?”

하지만 그러고도 부족했다.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억누르며 이번엔 20만 포인트를 사용해 한 번 더 강화했다.

남은 포인트는 199만.

1로 변한 앞자리 수에 우울해지려던 찰나, 때마침 밑단위의 포인트가 차올라 다시 잔액이 200만이 되었고.

동시에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마음속에 차오른 흡족함이 두 배가 되었다.

‘망설일 필요는 없지.’

극히 안정되어 있어 누출되는 에너지가 크지 않고 집 전체에 온갖 결계가 쳐져 있다 하나, 그렇다고 이만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물건을 오랫동안 놔둘 수는 없었다.

스르륵—

그리고 스킬을 발동한 즉시.

손에 들린 금빛 드래곤 하트가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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