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35화 (235/284)

#235

카르마 쇼핑 (3)

제피아 공화국의 수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 산골 마을.

주신교단은 대륙 최대 종교인만큼, 인구가 얼마 되지도 않는 이런 작은 마을에도 주민들을 위한 기도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그곳에 상주하는 건 수행 파견을 나온 수습 사제 하나에 마을 출신의 수도사 두엇이 전부일 정도로 열악하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 중에 이곳을 우습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수습 사제 수준의 미약한 신성력일지라도 응급처치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들은 언제든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신앙은 둘째치고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데 싫어하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 그 어느 곳보다 신성해야 할 기도소의 내부에서—.

허락받지 않은 건 물론 한 톨의 신앙심도 갖지 않은, 전혀 경건하지 못한 이들의 은밀한 회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분의 은총을 받은 감상이 어떤가, 오바이포? 뱀파이어인 그대라면 적합성도 제법 훌륭할 터인데.”

“크흐, 과연··· 썩 나쁘지 않구나···. 갑자기 찾아왔을 때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싶었는데 말이지···.”

“섭섭하군. 그래도 제법 오래 어울리며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거늘.”

곳곳에 주신교단의 상징이 새겨진 기도소 내부에서 오가는 불경한 자들의 대화.

동부에 터를 잡은 오바이포 클랜의 로드, 성혈의 뱀파이어인 오바이포와···.

“그 신뢰를 먼저 저버린 건 너다, 혁명가여···. 에나멜의 광대와 남부 야만왕의 죽음에 네 책임이 없다고 하진 않겠지···?”

“그건 미안하게 됐군. 급하게 사정이 생겨서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혼란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흉, 역천의 서약의 설립자인 혁명가였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나. 그 힘이 있다면 그대도 다른 이들처럼 쉽게 당하진 않을 테지.”

“크흐흐··· 어차피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을 제피아의 총사령관은 이미 배제한 지 오래다···. 놈도 내 권속으로 삼고 싶었다만, 역시 초월에 이른 무인을 굴복시키는 건 쉽지 않더군···. 아쉬운 일이지···.”

공화국의 최강자라 불리는 이마저 쓰러졌다는 충격적인 이야기.

또 다른 난관이라 할 수 있는 용사는 이미 뱀파이어의 탈리아 왕국 지배를 용인한 입장이었으니, 이제 와서 공화국 내부의 은밀한 정세에 끼어들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연달아 터진 사건에 세간의 시선도 분산되어 여러모로 오바이포에게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부통령 쪽은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사실상 그쪽이야말로 반대파의 수장일 터인데.”

“흐음, 그 여자 말인가···? 이제 쓸모가 다 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곧 처분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손발이 다 잘려 나갔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지만···.”

애초에 뱀파이어에 큰 적대감을 가진 그녀를 남겨둔 것도 그들에 반하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더 수월하게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그를 위해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녀 쪽에 수를 써 이런저런 안배를 해 둔 상태이기도 했고.

“상당히 여유롭군. 그 여자가 이미 서쪽의 하이브리드와 접촉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크흐, 그 자칭 흡혈왕 말인가···? 우스운 일이지···. 피의 원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왕이랍시고 떵떵거리는 꼴이라니···.”

당연히 그 또한 부통령과 하이브리드의 움직임에 대해선 이미 진즉에 파악한 뒤였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그는 상황이 일촉즉발로 흘러가 충돌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도 그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놈이 어떤 힘을 지녔건··· 그 몸에 뱀파이어의 피가 흐르는 이상, 원류에 가장 가까운 힘을 손에 넣은 나를 이길 순 없다···. 오히려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준 것을 치하해 주고 싶을 정도군···.”

걱정은커녕 기대하는 모습을 보일 뿐.

그는 진심으로 하이브리드의 왕이란 자가 찾아오길 바라고 있었다.

놈을 굴복시키는 순간이 곧 대륙의 뱀파이어 전부를 손에 넣게 되는 날이 될 테니까.

“이제 브로코슬락과 유페르쉬의 정수만 손에 들어오면··· 그간 실전되었던 모든 시작의 혈맥이 한데 모이게 된다···. 그때야말로 이 세상은 진정한 흡혈왕을 마주하게 되리라···!”

오랜 세월, 후대에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었던 ‘시작의 혈맥’의 유산들을 한데 모아왔던 오바이포.

그는 완전한 혈맥을 완성해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을 꿈꾸며 희열에 젖었다.

그가 노리는 두 핏줄은 물론, 하이브리드의 휘하에 들어간 모든 이들이 이미 오래전에 그 순수성을 잃고 타 차원의 흡혈인자에 오염되었다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

나는 팔짱을 끼며 상품의 가격을 나타내는 숫자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흐음.”

3천만이란 그 압도적인 숫자에 비하면 고작 30만이라는,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변화였지만.

실제로 수치가 바뀌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던지라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뭐지? 저게 뭔데 갑자기···. 부하 중 누가 저것과 관련된 단서라도 입수했나?’

사실 물건의 가치와 입수 난이도에 따른 가격 책정이라고 추측하고는 있었으나, 당연히 그것도 백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일반적인 품목들의 가격 상황을 보면 그것이 가장 신빙성 있는 추론이라는 것도 사실.

그러니 무언가를 계기로 ‘저것’과 좀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만 있다면 저것의 정체도 알 수 있겠지. 그럼 우선 뭔가 관련된 정보가 입수되었는지부터 확인···.’

그러나 그렇게 빠르게 상황을 분석하던 나는.

곧바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에 생각이 미치자,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장 내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만 해도···.’

불사의 군대 정보 총책임자인 올리비아의 통제하에 대륙 전역에 흩어진 유령 첩보 부대.

세상의 어둠에 스며든 하이브리드 소속 뱀파이어들과 그 산하에 들어온 어둠의 조직들.

대륙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필요한 정보를 모아 제공해주는 주신교단 정보분석팀.

상계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물자의 흐름을 추적하기 위해 조직된 휴버트 상회의 정보원들.

‘그뿐만이 아니지. 간접적으로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경로도 있으니.’

남부에 있는 할리와 에나멜 대륙의 해리스도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영역에서 발생한 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황녀의 총애를 받는 헤스페론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상 골방에 틀어박혀 망치만 두들기는 하워드를 제외하곤 모두가 훌륭한 정보 수집 창구인 것이다.

‘···매 순간 각지에서 수집되어 들어오는 정보만 해도 까마득할 지경인데, 그중에서 정체도 모르는 무언가에 관련된 것을 특정할 수 있을 리가.’

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깔끔하게 고민을 털어버렸다.

솔직히 저것에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었지만, 어떻게 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일에 더 매달리는 것도 심력 낭비였다.

‘어차피 1퍼센트 정도면 그리 큰 변화도 아닐 테니까.’

그게 무엇이든 그 수치를 보면 아직도 까마득히 멀리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뭔가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다면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되겠지.

지금 당장 내게 중요한 것은 그런 막연한 문제가 아니었다.

꼴깍꼴깍—

나는 시선을 돌려 앙증맞은 두 손으로 유리병을 잡고 비약을 마시는, 맨몸 위에 커다란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걸친 어린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캬하—!”

다 마신 병에서 입을 떼며 시원한 탄성을 토하는 꼬맹이.

이어서 짭짭 입맛을 다시며 손바닥으로 쓱쓱 입가를 문지르는 손짓까지.

하는 행동마다 하나같이 치명적으로 귀엽기 그지없었다.

‘몸이 어려지니까 행동도 영향을 받는 건가?’

아니면 그저 평범한 행동일 뿐인데 그 외형 때문에 괜히 그렇게 느끼는 것일 지도 몰랐다.

물론 어느 쪽이든 굳이 이제 와서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아바타 개성이 독특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어쨌든 빠른 성장을 위해선 지구보단 아우테리카가 효율적이다. 하지만 어린아이 형태인 호루스를 그냥 아무 데나 혼자 보낼 수도 없는 일. 명목상이더라도 보호자가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온 휴고가 호루스에게 접근해 「아바타 클라우드」로 전달받은 이세계의 아동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잡일과 물품 공급 담당인 휴버트가 급하게 마련해 보내준 옷이었다.

‘···그래, 역시 거기가 가장 낫겠군.’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숙고 끝에 호루스의 행선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너무 거물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도 덜하면서도 온갖 핑계로 아이를 데려오더라도 딱히 이상하지 않은 사람.

‘휴버트 상회가 있는 타라크.’

휴버트가 할 일에 잡일과 물품 공급뿐만 아니라 육아까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

《드라카리온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호루스가 이세계로 넘어온 직후, 그 눈앞에 떠오른 문구였다.

‘드래곤의 신인가?’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니 이제 와선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다.

‘이젠 오히려 이런 관심이 없으면 뭔가 아쉽다니까.’

이세계 한정이라지만 신들의 주목을 받는 삶.

물론 그만한 관심과 더불어 만족할만한 후원도 받고 있었기에 딱히 불만이랄 것도 없었다.

저렇게 지켜보다가 뭔가가 마음에 든다 싶으면 선물이라도 조금씩 던져줄 테니까.

“흐읍— 파—!”

호루스는 그 자리에서 깊게 심호흡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마나가 있는 세상에 오니까 다르네.’

이능의 불모지로서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던 지구와는 달리, 이곳에 충만한 마나는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드래곤하트로 몰려들며 그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과연 성장 보정과 비싼 비약이 열일을 하는 중인지, 당사자인 자신조차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지구에선 손실된 기운의 회복만 가능할 뿐, 그것이 성장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으니까.’

그래서 지구로 귀환한 각성자는 기술을 숙련해 기량이 늘어날지언정, 그 자체의 역량이 늘어날 순 없었다.

사실상 귀환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한계가 정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 문제야 나랑은 상관없지만···.’

또 자신은 이미 강력한 아바타를 몇이나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 그 정도로는 조금 부족했다.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한, 좀 더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그때 그 천사··· 번천회주 놈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선.

그리고 최근 가장 기대하고 있는 유망주가 바로 여기 있는 이 꼬마 드래곤.

통통한 두 손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지고 있는 호루스였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당장 직접 뭔가 할 단계는 아니지. 일단은 조금 여유를 두고 드래곤의 육체와 가진 능력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으니.’

그가 이세계에서의 첫발을 내디딘 이 장소는 휴버트의 개인 처소.

필요한 의식주 전반은 대부분 고용된 이들이 처리해 주니, 딱히 뭔가를 할 필요도 없이 원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좋아, 그럼 시작하자.’

그리고 호루스는 본격적인 훈련을 위해 숙소 내의 침상 위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흐으— 하—.”

이어지는 깊은 심호흡과 명상.

그는 찬찬히 자신의 신체를 관조했다.

그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이어서 다시 드래곤으로 「폴리모프」를 하며 같은 일을 반복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저게 뭐 하는 건가 싶겠지만, 호루스는 나름 진지하게 루틴을 행하는 중이었다.

일명 작전명 와룡(臥龍).

고급 주택에 틀어박힌 아기 용 한 마리가 비상할 날만을 꿈꾸며 몸을 웅크렸다.

***

아우테리카 모처.

온갖 물리적, 마법적 은폐 조치가 취해져 빛 한 점 들지 않던 한 작은 동굴 속에서.

쿠르르릉—

수백 년간의 고요함을 깨는 요란한 뒤척임과 함께 어둠 속에서 일어난 한 쌍의 안광이 천천히 타올랐다.

상황을 살피듯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 존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흐음? 이건···.]

이내 무언가를 느끼고 나직한 탄성을 토해냈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생소한 동포의 기척—.

[···드라카리온이시여.]

그것은 지금 같은 시기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의문일 정도로 매우 어린, 그들 기준에선 갓난아기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감지해 버린 이상, 그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게 되어버렸다.

[당신의 뜻대로.]

난장판이 되어가는 대륙의 상황과는 한 발 떨어져 있던.

인적이 없는 한 외딴섬의 동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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