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38화 (238/284)

#238

제피아 공화국 (1)

갑작스럽게 방문한 골드 일족의 엘더 드래곤, 슈리하트겐.

그는 호루스를 데리고 타라크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자신이 지금껏 몸을 감추고 있던 둥지, 이온 대륙의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상당히 공들여 준비한 곳이지. 아무리 불사왕이라 해도 정확한 정보 없이는 절대 이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오오—!”

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는 하나, 아직 시간이 남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억지로 수명을 연장하던 동면에서 깨어난 여파로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의미 없이 연명하는 것보단 자신이 다음 세대를 위한 양분이 되어 주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으니까.

‘삼백 년 전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지금까지 간신히 버텨왔다고 했지.’

오직, 골드 일족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버텨오던 그의 앞에 갑작스럽게 호루스라는 후계자가 등장한 것이다.

호루스는 레어를 안내하는 그를 힐끔거리다 미묘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운이 좋은 이방인일 뿐인 자신으로선 그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 기간이나마 최선을 다해 가르치도록 하지. 이건 일반적인 해츨링 교육 방식이 아니긴 하다만 지금은 어쩔 수 없군.”

그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으나, 사실 그쪽이야말로 호루스가 원하는 바였다.

오히려 드래곤이랍시고 세월아 네월아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축내야 했다면 그게 더 답답했을 터.

“「황금의 보고」는 내 죽음과 동시에 너에게 이전될 것이다. 사실 유산이라고 해도 쓸모 있는 것들은 대부분 전쟁에 동원되었던 탓에 남은 것은 그리 많지 않다만. 그래도 그것들만 해도 어지간한 고룡(古龍)의 레어 수준은 될 테지.”

물론 그 혹평도 유물이나 마도구 같은 신비가 깃든 물건에 한해서일 뿐, 환금성이 높은 일반적인 재물들은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잠깐, 용언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츨링인데?”

“넵, 보여드릴까요?”

그리고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눈 직후.

호루스는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을 보이던 슈리하트겐이 진심으로 당황한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진짜군. 허 참. 쥬브나일에 이른 녀석들도 용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거늘, 고작 해츨링이···. 아아, 드라카리온이시여.”

해츨링이 유아기라면 쥬브나일은 청소년기였다.

어덜트 드래곤— 성룡이 되기 바로 전의 단계.

쉽게 말해 지금 호루스가 한 일은 미취학 아동이 수능 문제를 술술 풀어버린 것과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용언은 대충 기초만 잡아주고 추후 스스로 완성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상당히 시간을 아낄 수 있겠구나.”

이내 상황을 받아들인 슈리하트겐이 흐릿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언 자체야 드래곤의 권능이나 다름없으니 나이를 먹다 보면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을 좀 더 효율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마도서를 비롯한 마도구를 통해 안배를 남겨둘 생각이긴 했으나, 그런 걸로 온전히 전수되기엔 용언 마법이 가진 격이 너무 높았으니까.

‘그래서 죽기 전에 다른 일족의 생존자에게 부탁이라도 해둘까 싶었는데 잘 됐군.’

물론 지금처럼 종족 전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 부탁받은 쪽이 거절할 리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일족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않겠는가.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다른 일족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천 년 전에 불사왕이 등장하기 이전은 물론이고, 그 후 삼백 년 전의 전쟁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족 간의 사이는 상당히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니 수천 년 동안 망각이 없는 삶을 살아온 그의 입장에선 지금 상황이 썩 만족스러울 수밖에.

“좋다. 아주 훌륭하군. 그럼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옙!”

그렇게 이온 대륙 북서부에 감춰진 한 이름 없는 작은 섬에서.

꼬마 해츨링 호루스와 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노룡 슈리하트겐의 합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

지구, 대한민국의 수원시에 위치한 모처.

빛 한 점 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기다란 흑발을 늘어뜨린 한 여성이 눈을 감은 채 홀로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침묵만이 가득한 어둠 속의 티타임.

하지만 그 고요는, 갑자기 그녀의 몸이 경직되면서—.

쨍그랑—

이내 그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찻잔과 함께 산산이 깨져나갔다.

그러나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퍼진 붉은 홍차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음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처음 자세 그대로 가만히 굳어있었다.

똑똑똑—

“아리아 님? 괜찮으십니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서둘러 주변을 살피다가 여전히 티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이를 발견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아리아 님? 괜찮으십니까?”

“···아! 이런, 딴생각을 좀 하다 잠시 손이 미끄러졌네요.”

“찻잔은 금방 치우겠습니다. 잠시만···.”

“아뇨, 이건 나중에 제가 치우겠습니다. 일단 나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곧바로 달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완고한 축객령에 방으로 들어온 이는 더 이상 항변하지 않고 공손히 인사를 하곤 다시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다시 방 안에 혼자 남은 눈을 감은 여성.

대한민국의 밤거리를 지배하는 세력 중 첫 손에 꼽히는 혈맹, 그 온건파의 수장인 흡혈귀 아리아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눈가에 흐르는 피눈물을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역시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강경파가 축출되고 그 자리를 하인즈의 헤테로시스가 차지하면서 어쩌면 이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늘.

방금, 그녀의 고유스킬 「운명의 단상」에 재차 위기가 감지되었다.

예지 계열 스킬인 「운명의 단상」은 자신과 주변에 발생한 어떠한 흐름의 편린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녀가 난관에서도 항상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생명줄 같은 능력이었다.

흡혈귀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도, 이세계에서 무사히 돌아와 혈맹의 최고 간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온건파를 이끄는 수장이 되어 강경파에 맞섰던 것도, 하인즈가 혈맹의 세력을 흡수할 수 있도록 협조했던 것도 전부 그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하인즈···.’

어떻게 수를 써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방법이 없어 모든 짐을 떠맡겼던 사내.

그가 지구에서 새로 꾸린 혈통인 헤테로시스가 사실상 혈맹을 집어삼키는 데 성공하면서, 이제 ‘온건파의 수장’이라는 감투도 무의미해진 찰나였다.

그래도 헤테로시스의 이인자인 진소란의 배려로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크루를 결성해 평소처럼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일단 소란이에게 경고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네.’

푸스슥—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바닥을 어지럽히던 찻잔의 잔해와 홍차가 부스러져 사라졌다.

일본을 헤집던 하회탈이 갑작스레 종적을 감춘 지 나흘째에 접어드는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이온 대륙 동부를 지배하는 제피아 공화국.

날이 어둑해질 무렵.

지구의 헤테로시스와 아우테리카의 하이브리드, 그 둘 모두의 주인인 하인즈 2세가 수도 외곽의 낡고 허름한 주택 내부로 들어섰다.

그러나 당당히 길을 지나 대놓고 정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음에도 인근을 오가는 주민들은 물론 건물 내부에 있던 이까지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열었던 문을 닫은 그가 스스로를 다시 드러낼 때까지.

“···늦으셨군요.”

그렇게 그가 「존재부정」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건물 안쪽에서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왔다. 알다시피 내가 상당히 바쁜 몸이라서 말이지.”

“하! 그야 그렇겠지요. 나라 하나를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이렇게 다른 곳에도 부지런히 손을 뻗고 계시는데 오죽하겠습니까?”

날이 선 말과 함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중년의 여인.

한껏 예민해진 제피아 공화국의 부통령, 케일라 맥클레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장신의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것 또한 오해군. 난 제피아 공화국에는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오바이포를 복속시키는 것뿐.”

냉소를 지은 하인즈가 오연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잠시 호기롭게 그 시선을 맞받아치던 케일라는 얼마 가지 못해 눈꼬리를 떨고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먹을 수만 있다면 홀랑 집어삼켜 버리고 싶은 게 사실이긴 한데.’

그러나 규모도, 국력도 대륙 최하위권인 데다 지배층만 손아귀에 넣으면 되었던 탈리아 왕국과 이곳은 그 사정이 달랐다.

제피아 공화국은 서쪽에 면하고 있는 아제리온 제국과도 어느 정도 비빌 수 있는 강대국이었으며, 명색이 공화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지라 전에 사용했던 미적지근한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오바이포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다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할 거다.’

그건 지금의 혼란스러운 대륙 정세의 틈을 타 벌어진, 시기를 잘 맞춰 일어난 일시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수십 년을 준비해 온 놈들답게 상당히 철두철미하게 진행하고 있다곤 하나, 이제 슬슬 상부의 이상을 깨달은 이들이 하나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을 터.

‘아마 한 번 일이 터지기 시작하면 그것에 이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겠지.’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통치의 공백 상태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도 평소였다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륙 전체가 전시 체제에 들어간 국가 비상사태.

그것도 세상의 전복을 노리는 흑막이 버젓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공화국이 내환에 신음하는 틈을 노린 혁명가의 수작으로 거인의 침공과 몬스터의 준동이 동부에 집중적으로 일어날 테고, 그로 인해 나라 전체가 흔들려 버릴 것이다.

거기다 그 상태에서 재차 오바이포까지 설치기 시작한다면···.

‘사실상 그게 놈들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상황이겠지.’

온전한 상태의 ‘제피아 공화국’ 통치가 아닌, 무정부 상태에 빠져 체계가 무너져 내린 국가의 난민들을 지배하는 것.

온전히 삼키기에 덩어리가 크다고 잘게 다져서 집어삼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

그렇게 누더기가 된 나라는 빼앗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탈리아 왕국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괜히 머리만 아플 게 뻔하지 않겠는가.

또 어차피 내가 먹지도 않을 거라면, 남이 순순히 먹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그것이 그 혁명가 놈이 원하는 바라면 더더욱.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니 별문제는 없었나 보군.”

“···후, 문제야 많았죠. 사실 지금 제가 살아있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니까요. 설마 오코넬 총사령관까지 당했을 줄은 몰랐는데.”

제국과의 국경을 지키는 초월에 이른 무인이자 제피아의 수호신이라 불리던 위인.

어떻게든 그와 연락을 취하려던 과정에서 알게 된 그 비극적인 소식에 이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도 본격적인 암수가 뻗어오기 시작했다.

“저 혼자였다면 분명 죽었겠지요. 순전히 그쪽··· 하이브리드에서 붙여준 호위 덕분에 살았으니.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스스슥—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건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작은 그림자 하나가 하인즈의 앞에 부복했다.

“오셨습니까, 하이 로드! 주변의 꼬리를 정리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백발에 붉은 눈을 한 소년.

부통령 케일라에게 호위로 붙였던 진혈의 뱀파이어, 오보르 브로코슬락이었다.

“그래, 진행 상황은?”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각 요지에 혈문의 배치를 완료했고, 동원된 전투원들 또한 전원 채비를 갖췄습니다.”

이어서 이번 일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현 상황과 적의 동태, 앞으로의 계획까지.

‘···뭐지?’

그러나 그 와중, 그 자리에 있던 케일라는 갑작스럽게 느껴진 위화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 군신 간의 대화 자체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이 원인인 것 같긴 한데, 그것은 미묘하게 신경을 거스를 뿐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기분 탓인···.’

그렇게 찝찝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주변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흐릿한 무언가와 눈이 마주쳐, 그 자리에서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가 추적으로부터 몸을 피하고자 들어섰던 허름한 주택 내부.

밤이 다가와 건물 안까지 드리운 어둠 곳곳에, 어느새 들어찬 검은 인영들이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어느새?!’

심지어 그 숫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뿐만 아니라 저 군신이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선이 잠시 돌아갈 때마다 어둠 속의 인영은 하나둘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벽, 창가, 계단, 난간··· 심지어 천장에까지.

그리고 그렇게 늘어난 그림자가 어느덧 수십을 넘어 백에 가까워졌을 때.

“좋다.”

주변의 이목을 강제로 잡아끄는 기묘한 힘이 서린 목소리에,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하인즈에게로 향했다.

“그럼, 드디어 준비가 끝났으니···.”

평소와 같은 차가운 얼굴에 어린 베일 듯한 날카로운 미소.

“이 세상의 모든 뱀파이어를 일통하기 위한—.”

스스슥—

사삭—!

수많은 천 자락이 한꺼번에 나부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백에 달하는 그림자들이 일제히 엎드려, 그들의 위대한 군주를 향해 경배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전쟁을 시작한다.”

뱀파이어들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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