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제피아 공화국 (3)
하인즈 2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저택을 뒤덮은 결계의 분석이었다.
그의 초월적인 감각과 어우러진 「통찰」이 결계의 구성을 파헤쳤고, 그를 바탕으로 「피의 신비」가 하나둘 진단 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혈마법을 중심으로 쌓아 올린 복합 술식 구성인가. 상당히 복잡하게 꼬아놨군.’
아우테리카의 「혈마법」에 타 차원의 흡혈귀들이 가진 여러 지식이 더해져 탄생한 「피의 신비」.
온갖 가능성을 품은 그것은 ‘피’를 매개로 발동하는 술법에 한해선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능력이었다.
거기다 복합 술식이라는 것 또한 그에게는 딱히 특별한 게 아니었다.
백날 이런저런 것을 긁어모아 복잡하게 꼬아놓은들, 그게 지구에서 겪었던 차원 단위의 신비를 한데 엮은 술법들만 하겠는가?
‘제법 공을 들인 것 같긴 하다만···.’
그에겐 의미 없는 일이었다.
분석을 위해 가만히 결계를 응시하는 하인즈의 시선 너머로, 불사성에서 한창 연구에 매진하고 있던 한스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가세했다.
그에 따라 「마도의 길」을 비롯한 스킬들이 「피의 신비」가 파악한 진단 내용을 순식간에 낱낱이 해체하기 시작했고—.
‘위상의 중첩 적용과 반전까지. 다른 것보다 안정성은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군. 이걸 부수기 위해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계의 정체와 그 파훼법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정석은 내부의 깊숙한 곳에 있는 핵을 노리는 것이지만, 다른 방법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결계에서 대치되는 안과 밖의 동일 지점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
저 안에선 바깥과의 소통이 차단되는 건 물론이고, 어느 한 쪽에서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타점을 잡을 수 없어서 이론으로만 가능한 소리였으나.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했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것 같긴 하지만··· 오는 길에 제법 많이 수확했으니 상관없겠지.”
여전히 태연한 기색의 하인즈가 가볍게 고개를 비틀었다.
그리고 그 직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려 위로 향한 그의 손바닥에 몇 가닥의 핏줄기가 솟구쳤다.
츄르륵—
용솟음치듯 꿈틀거리다 이내 서로 뒤엉키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새빨간 선혈.
「정제혈정」의 순수한 혈액으로 만들어진 그 힘의 정수는 「피의 신비」의 통제를 받아 그가 바라는 이적을 품은 채, 서서히 한 점으로 압축되어 주먹 만 한 핏빛 구슬이 되었다.
일전에 습격자들과 싸우던 헤스페론에게도 보내준 적 있는 혈마법의 힘을 가득 담은 매개체였다.
‘두 개 정도만 더 만들면 되겠군. 파괴력 자체는 조금 부족할 테지만, 어차피 이건 신호탄일 뿐이니 이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지.’
그렇게 총 세 개의 구슬을 만드는 작업이 끝난 후에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으니.
바로 지금 손이 비는 유일한 아바타, 휴고를 불러 구슬을 쥐여 주고 저 결계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감각을 공유하는 아바타를 통해 내부와 연결되는 타격 지점을 찾기 위해서.
“후우.”
이젠 완전히 지구의 잡일 담당이 되어 개체 스킬인 「다재다능」을 바탕으로 점점 가사 마스터가 되어가고 있는 휴고.
그는 하인즈의 기운이 풀풀 풍기는 구슬들을 챙기고 당당하게 결계 안에 들어서, 내부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해 그중 하나를 사용했다.
쿠르르릉—
역시 생각했던 대로.
강력한 혈마법이 발동하며 한순간 강한 진동이 결계 내부를 뒤흔드는가 싶었으나, 그것은 몇 초 가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진압되어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외부에는 약간의 조짐도 감지되지 않았고.
“···찾았다.”
그러나 최대한 집중해서 저택 전체의 인과의 흐름을 살피던 하인즈가 정확한 영점을 잡는 데엔, 그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오오오—
목표 지점을 노리고 천천히 앞으로 뻗어지는 오른손.
그의 손끝에서 대량의 혈액이 뽑아져 나오고, 한순간에 몰아친 어마어마한 혈마력이 그와 뒤섞여 한순간에 밀집하기 시작했다.
‘기다릴 것 없지. 곧바로 간다.’
그의 오른손 앞에 뭉친 농구공만 한 핏빛 구체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꿈틀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계 내부에서 두 번째의 혈마법이 터져 나오는 것을 기점으로—.
콰르릉— 콰앙—!
마치 드래곤 브레스를 연생케 하는 검붉은 빛줄기를 뿜어내, 정확한 타이밍과 정확한 지점에 때려 박았다.
쿠구궁!
단순히 여파만으로 엉망이 된 주변과는 달리, 정작 공격에 직격 되었음에도 큰 변화가 없는 저택.
하지만 하인즈는 「통찰」을 통해 피격당한 결계의 뒤틀림과 그로 인해 발생한 균열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튼튼하군.”
확실히 날려버린 결계의 바깥 부분과 달리 내부를 파괴해야 할 구슬의 위력이 부족했기에 생긴 일이었지만.
어차피 한 방에 끝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직접 하는 공격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예상하고 있던 바다.’
타격과 동시에 즉각 수복되었던 첫 공격과는 달리, 상당한 손상을 입고 결계의 재생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찰나.
처음부터 바로 지금 이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
고오오오—
이미 준비가 끝난 하인즈의 왼손에서, 오른손에서 뿜어졌던 파괴광선보다 더욱 짙은 빛이 대기를 가르고 같은 지점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인과의 힘을 품고 아직 채 회복되지 않은 취약점에 직격하여.
콰아아앙——!
그 타이밍에 다시 한번 내부에서 터져 나온 ‘본인의 혈마력’과 호응해 피탄 지점 내외부의 결계를 동시에 뒤틀어버렸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져 내린 결계.
그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사방을 진동했다.
‘생각대로 됐군.’
그 과정을 도출하기 위해 약간의 인과를 조작하느라 힘이 과하게 소비되긴 했으나,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보니 썩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공격의 여파에 하인즈가 있는 정문부터 시작해 저택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건 덤이었고.
‘저자가 바로···.’
결계가 파괴됨과 동시에 휴고를 돌려보낸 하인즈는 그 통로의 끄트머리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자가 바로 오바이포 클랜의 시조이자 최초의 성혈 중 하나, 오바이포 본인이라는 걸.
이 시원시원하면서도 화끈한 만남에 흡족해진 하인즈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는군.”
거기에 이어진 그의 한 마디에 상대의 고개가 천천히 이쪽으로 향했다.
당황한 듯했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평온을 가장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아직 마음을 전부 추스르진 못했는지 그 입꼬리는 수습되지 못하고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노크가 과격했던 건 사과하지. 집주인이 가는귀가 먹었는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 말에 더욱 경련하기 시작한 놈의 입가.
도발이 썩 잘 먹힌 모양이었다.
하인즈 2세는 오바이포의 주변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며 팽창하기 시작한 혈마력을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숨겨둔 수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꺼내 보라는 듯, 어디까지나 당당하고 뻔뻔하게.
***
시작의 열두 혈맥.
아주 오래전— 오바이포와 유페르쉬, 브로코슬락을 비롯한 성혈이 처음 이 땅에 탄생했을 때.
세상에 뱀파이어라고는 오직 그들 열둘만이 존재했다.
시간이 흘러 뱀파이어들이 세상에 점점 더 퍼져 나가고, 성혈들 각자의 이름을 딴 클랜들 또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을 때.
어느새 그들은 대륙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족이 되어 자연스럽게 세상에 녹아들어 있었다.
‘지금은 그때의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오바이포도 그 최초의 성혈 중 하나였다.
추정 연령은 약 만 년 이상.
하지만 태생적으로 그 수명만큼 강대한 정신력과 망각이 없는 지성을 겸비한 드래곤과는 달리, 뱀파이어들의 정신력은 그만큼 막강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도 초월에 이른 존재였으니 평범한 필멸자의 수준은 아득히 넘어서 있었으나, 그것도 끝이 없는 세월의 흐름 앞에선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성혈들이 온전히 자아를 유지한 기간은 평균적으로 약 2천 년 전후.
대략 그때를 기점으로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 이들부터 하나둘 세월에 휩쓸려 그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누구는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미쳐 날뛰며 살육을 벌이다가 토벌당했고.
누군가는 어린 드래곤을 죽여 피를 탐하다 분노한 드래곤에게 찢겨 죽었다.
또 누구는 제대로 꼬리를 자르지 못한 탓에 교단에게 쫓기다가 추살 당했으며.
심지어 누군가는 영생에 괴로워하던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였으니.
최초 열둘이었던 성혈의 수가 지금 이렇게 줄어든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천 년분의 기억만을 남기고 모조리 소거하는 것을 택했다. 브로코슬락은 드래곤들처럼 주기적인 동면을 가져 활동을 줄이는 방법을 취했고, 유페르쉬는 자신의 힘과 기억을 쪼개 다른 육체에 담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했지.’
그 때문에 지금 오바이포가 가지고 있는 이전 시대의 정보는 ‘직접 겪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여러 사실을 바탕으로 ‘이후에 학습한’ 내용에 가까웠다.
생생하게 겪은 체험을 망각하고 이후에 추가한 건조한 몇 줄의 정보로 그를 대체하는 것.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뱀파이어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성혈들의 활동이 줄며 영향력이 약해지자, 클랜들 또한 세월에 따라 분화되고 사멸되기도 하며 하나둘 흥망이 갈리기 시작했다.
특히 성혈이 사라진 클랜의 몰락 속도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으니.
처음부터 종족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오바이포의 마음에 어떤 야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아니,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참으로 가련하고 지리멸렬하구나. 저 우매한 아이들을 하나로 묶을 방법은 없는가? ···그래, 역시 이 몸이 나설 수밖에 없도다. 내가 직접 위대한 왕이 되어 저 아이들을 이끌어 주겠노라.>
항상 최근 천 년간의 기억만 남기고 모두 소거하고 있었기에 언제부터 그런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천 년을 훌쩍 넘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마저 오로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오로지 다른 성혈들이 남긴 정수를 회수하는 걸 생의 목표로 삼고 움직였다.
군소 클랜으로 전락한 놈들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나 어느 귀족의 창고에 들어간 것을 빼앗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아무리 그라도 강탈하기 쉽지 않은 곳에 있던 것들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불사왕과의 대전쟁이 큰 도움이 되었지. 덕분에 드래곤과 교단의 손에 넘어가 있던 것도 회수할 수 있었으니.’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찰나에 발생한 불사왕의 준동은 그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거기다 오랜 탐색에도 끝내 찾지 못했던 정수마저 역천의 서약과 혁명가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브로코슬락과 유페르쉬를 제외한 모든 성혈의 정수가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드디어 오랜 세월을 그려왔던 꿈이 이뤄질 때가 온 것이었다.
그는 그런 마음으로 당당하게 하인즈 2세를 맞이했다.
설마 자신이 패배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하인즈라는 놈에게서 느껴지는 유페르쉬의 정수와 탈리아 왕국에 있을 브로코슬락의 정수를 회수할 생각만이 가득할 뿐.
‘왜··· 어째서···?’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더욱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발목이 잡히고 있었으니.
콰아앙! 쿠르릉—
“크헉!”
이미 원형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려 잔해밖에 남지 않은 저택.
방금 전까지 오바이포가 당당한 마음으로 도전자를 기다리던 왕좌였다.
지금처럼 엉망이 된 채 드러누워 있을 병상이 아니라.
푸스슥—
온몸에 돌가루가 묻은 그가 천천히 저택의 잔해에서 몸을 일으켰다.
파지짓—! 파직—!
쉬지 않고 튀기는 스파크.
의념 속의 싸움은 아까부터 이미 수십, 수백 차례나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예상치 못했던 점은···.
‘빠르다···! 놈의 능력은 물론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고 속도까지···!’
처음 당당하게 나섰던 것과는 달리, 상대의 능력이 그의 예상을 아득히 웃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어쩐 일에선지 그가 자신만만해했던 가장 큰 이유인 피의 ‘원류’에 다가선 자로서의 권한도 그에게는 눈곱만큼도 통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다른 혈맥의 성혈이니만큼 완전한 통제는 기대하지도 않긴 했지만, 그래도 무려 열두 혈맥 중 열 개나 손에 넣은 자신인데!
일말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째서? 애당초 혈맥이란 하나의 원류에서 갈라져 나온 열두 갈래의 줄기. 지금처럼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이건 마치, 원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의 핏줄이라도 되는 듯한 반응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을 테지만.
‘놈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건가? 아니면 설마 내 연구가 틀렸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럼 지금 상황은 뭐지?’
그의 머릿속이 헝클어지며 사고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존재가 수용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그가 가진 정수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그만큼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오바이포가 수용할 수 있는 힘은 기껏해야 1.3배 정도가 한계일까.
시종일관 밀리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딱히 유의미한 수치라 할 순 없었다.
‘···이것만은 쓰지 않으려 했거늘. 혁명가, 이것도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는 원류로서의 통제 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해 다른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왠지 혁명가에게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파지지지직—! 파직—!
그리고 그 때를 기점으로.
느긋하게 다가오던 하인즈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