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뱀파이어 라이즈 (2)
그것은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정신세계라 하기엔 너무나도 혼탁하고 무질서했다.
‘이건 대체···.’
어느 곳에선 검붉은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고, 또 한 곳은 피 웅덩이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며, 그 바로 옆은 메마른 사막이 펼쳐졌다.
조각난 세상의 파편들이 억지로 기워진 채 이리저리 뒤섞인 듯한 세상.
-어떻게 동족 포식을···. 힘을, 나의 비원이···.
-죽고, 싶지 않···. 언제까지, 숨어 살아야···.
-연구··· 연구를 해야··· 번천회, 힘을!
거기에 공간 전체를 타고 흐르는 알 수 없는 사념의 조각들까지 폭풍처럼 휘몰아쳐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었으니—.
[큭, 이 무슨···!]
단지 이 적대적인 환경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만년의 세월에 단단하게 굳은 영혼과 천년의 기억으로 자리 잡은 자아가 급속도로 침식되고 있었다.
[···설마 이게 전부 동족 포식의 사념들인가? 대체 얼마나 많은 수를 포식한 거냐···! 아니, 그보다 어떻게 정신세계가 이렇게까지 오염되고도 멀쩡하게 사고할 수 있었던 거지···?]
그는 서둘러 오랜 세월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업을 갑옷처럼 둘러 최대한 자아를 보호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처음 맹독과 같은 피를 접했을 때도 그의 육체에 깃든 알 수 없는 혈통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지, 진짜 그 정신세계마저 이 모양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정작 당사자인 하인즈가 너무나도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호오, 과연 태초의 뱀파이어인가? 상당히 열악한 환경일 텐데 제법 버틸 만한가 보군.]
그렇게 그가 애써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혼란을 가득 머금은 폭풍을 타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정신 나간 세계의 주인이자 그의 타깃, 하인즈였다.
[이거 미안하군. 워낙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미처 청소를 하지 못했어. 손님이 찾아온 건 처음이기도 하고 말이지. 뭐, 사실 워낙 난장판이었던지라 나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다만.]
웃음기 어린 조롱의 말.
오바이포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비틀리고 뒤섞인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하인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직접 나설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이곳은 침입자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둔 함정인가···?’
역시나, 아무리 생각해도 성혈에 이른 한 세력의 수장이 이런 미친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어딘가에 온전한 정신을 보관해 둔 안전 영역이 있겠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긴 하나···.’
그는 서서히 정신력을 고조시키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지금 이 함정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정신세계는 물리법칙이 아닌 의지와 사고의 힘으로 흘러가는 세상이었다.
무작정 길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은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밖에 되지 않을 터.
[나를 너무 우습게 봤구나, 하인즈···!]
그러나 그 또한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바이포는 최대한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고, 영혼에 깃든 미지의 권능까지 동원한 채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이 세상의 주인, 하인즈가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일념을 품고서.
스아악—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듯 삽시간에 뒤바뀐 주변 경관.
‘후, 빨리 끝내주도록 하···.’
그는 뜻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마침내 그것과 마주하게 되었다.
[···하? 저건 또 뭐냐···?]
세계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성벽.
불사왕 한스의 오염 사태를 계기로 탄생한 불가침의 성역, 「영혼 방화벽」을.
‘젠장, 설마 저 안에 숨어있는 건가···?’
산 넘어 산.
척 보기에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용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절대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한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혀왔다.
거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집어삼키고자 하는 침식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이대로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단번에 여기까지 오다니. 자신의 정신세계가 아닌데도 이만큼 능숙한 힘의 사용이라니, 과연 대단하군. 그런데 방금 그 힘은 역시···.]
다시 하인즈의 말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으나, 시간이 없던 오바이포는 그를 무시하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끌어올려 성문을 들이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혁명가에게 받은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면서.
[···심연의 힘인가? 아니, 뭔가 다른데. 역시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 같군. 그런데 어떻게 네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러나 몇 번이나 부딪쳤음에도 그 성문은 도무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인즈 역시 방벽이 무너지지 않을 걸 확신하는지 아까부터 계속 다른 데에 관심을 보일 뿐.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바깥에 있을 때부터 줄곧 무시당했었던 오바이포의 속을 긁어놓기에 충분했다.
[크흐, 아까부터 쫑알쫑알 시끄럽구나···!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는 것이 어떤가? 그렇게 겁쟁이처럼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야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에 더해 아무리 두들겨도 답이 보이지 않아 짜증이 치민 그가 빈정거리듯 내뱉은 말.
그것에 돌아온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과연, 네 말도 일리가 있군. 아무래도 좀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구나.]
[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무리 두들겨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그 철옹성의 입구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이내 바깥에 있는 그를 환영하듯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여태 열심히 두들겼던 게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개방이었다.
[초대하도록 하지. 어디 들어와 보거라.]
거기에 이어지는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도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스스로를 지키던 성문을 활짝 열고 내뱉는 오만한 선언이었으나, 오바이포는 그에 개의치 않고 기다렸다는 듯 당당히 내부로 들어섰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이곳에 왔을뿐더러, 이미 그에게 다른 가능성이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멍청하기는···. 후회는 네가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겐 절대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놈은 내가 정신세계에서도 다른 혈맥의 힘을 끌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능력으로 심장에 융화시켜 두었던 성혈의 정수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일부러 사용하지 않고 아껴온 그것에, 혁명가에게 받은 권능의 힘까지 한꺼번에 터트린다면···.
‘일시적이라지만 출력이 열 배는 상승하겠지.’
아무리 이곳이 하인즈에게 유리한 그의 정신세계라 하더라도, 그 혼자만의 힘으로 그만한 출력 차이를 뒤집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백 보 양보해 그가 네댓 배를 감당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그가 다른 대응을 생각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날 것이다.
그렇게 음흉한 속셈을 품은 오바이포는 보무도 당당하게 열린 방벽 안으로 진입했고—.
[왔군.]
그곳에서 그토록 보고자 했던, 붉은색으로 빛나는 인간의 형체를 한 하인즈의 영체를 대면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이게, 무슨···?]
그 정신세계의 내밀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하인즈 혼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크흐흐— 신기한 녀석이구나. 묘한 것들을 달고 있군.]
모든 걸 꿰뚫어 볼 듯한 검은 안광으로 이쪽을 훑어보는, 이 세상의 모든 부정(不淨)을 한데 뭉친 듯한 칠흑의 거악.
[저 힘. 굉장히 신경 쓰이네. 역시 혁명가 놈이 뭔가 수를 쓴 모양인데?]
반대로 신의 사랑이라도 받는 것처럼 찬란한 광채와 축복으로 둘러싸여 주변에 밝은 빛을 뿌리는 순백의 성인(聖人).
[쩝, 몸이 없는데 이상하게 배고프네. 이 상태로 저거 잡아먹으면 어떻게 될까? 허기가 차려나?]
[아··· 확실히 저자에게서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그 외에도 검붉은 광기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듯한 광인과, 따사로운 햇살을 품은 듯 느긋한 기색의 녹색 인영 등···.
어느새 열에 가까운 이들이 성안에 들어온 오바이포를 둘러싸고 있었다.
‘언제 외부에서 지원을···! 아니, 잠깐. 아니잖아? 전원이 이 정신세계의 주인이라고?’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술법과 정신계에 관해서도 정통해진 그는 저들을 보는 순간, 지금 상황이 굉장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절대 자신에게 좋지 못한 방향으로.
‘다중인격···? 아니, 단순히 다른 인격이 이만한 격을 갖췄을 리가! 거기다 그 성향과 수준이 전부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불사왕이라 느껴질 정도의 흑마법사에 성자라도 되는 것 같은 성인, 하이 엘프로 보이는 자도 있고. ···거기다 설마, 저건 드래곤인가···?’
저들의 틈바구니에 인간형을 한 다른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실루엣의 금빛 생명체가 있었다.
자신조차 근 삼백 년간은 본 적이 없는 멸종위기의 강대한 생명체.
‘역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강령술로 불러온 영웅의 영혼들을 모종의 대법으로 몸속에 봉인한 경우인데···.’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바로 지금, 자신이 아주 엿같은 상황에 처해버렸다는 것.
비장의 수단? 부여받은 권능? 이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개 같은.’
오바이포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신세계의 영체에 생리현상이 있을 리 없으니 기분 탓이겠지만.
[크흐흐— 마침 연구에 조금씩 진척이 생기던 참인데. 설마 여기서 추가로 심연의 단서를 얻게 될 줄이야! 하긴, 그러고 보니 이놈도 역천의 서약 출신이었지? 이거 여러모로 좋은 단서가 될 것 같구나.]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오싹한 목소리.
저도 모르게 슬쩍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들어온 문은 애초에 열린 적도 없었다는 듯 이미 굳게 닫힌 상태였다.
[걱정 말거라. 조금만 협조해주면 된다. 마침 내게 좋은 물건이 있으니! 그리 아프지 않느니라. 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손에 웬 구슬을 들고 다가오는 시커먼 인영을 필두로.
하나를 상대하기도 버거워 보이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영체들이 슬금슬금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이란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니라. 크흐하하핫!]
그저.
그것으로 끝이었다.
***
“흐음.”
하인즈 2세는 천천히 눈을 뜨며 자신의 앞에서 굳은 늙은 뱀파이어, 오바이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신세계에서는 생각보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으나, 현실의 시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채였다.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이마에 팔을 뻗은 그의 손을 치웠다.
그는 마네킹이라도 된 것처럼 그저 움직이는 대로 힘없이 딸려 갈 뿐이었다.
‘설령 놈이 항복하더라도 수하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오바이포는 오랜 시간 역천의 서약과 함께하며 암중에서 모략을 꾸밀 정도로 음흉한 놈이었다.
매사 천하태평인 브리키와는 정반대의 성향인 데다 술법에도 뛰어난 놈이었으니, 설령 종속하고 나서라도 계속해서 찝찝함에 시달리게 될 터.
“패자는 승자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고 했지.”
푸욱—
망설임 없는 하인즈의 손이 빈껍데기나 다름없는 오바이포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붕괴되고 있는 육체와는 달리 펄떡거리며 날뛰는 심장이 그의 손에 잡혀 들었다.
“이 정도면 썩 만족스러운 공물이구나. 기쁘게 받아주도록 하마.”
그 말이 끝남과 함께, 하인즈가 그 심장을 움켜쥐며 터트렸다.
동시에 오바이포의 피와 더불어, 모종의 수단으로 이식한 듯한 아홉 개의 정혈이 깔끔하게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으음, 에너지원으로선 썩 나쁘지 않겠군.’
어차피 대륙의 뱀파이어들 대부분이 그의 휘하로 들어온 이상, 에너지 통이 커진다는 것 외엔 딱히 정혈이 많다고 특별해질 것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아무리 모아봤자 흡혈귀의 수많은 계파중 하나일 뿐인 데다, 무엇보다 그에겐 상위호환 격인 「혼혈진화」가 있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아니, 물론 중요하긴 하다만.
지금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가 오바이포의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 일어난 변화.
그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며 몸 상태를 조율하다가,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보고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업적 달성! 갈라지고 반목하던 종족을 일통한 뱀파이어 군주, ‘흡혈왕’이 되었습니다.》
《아우테리카 차원에 존재하는 뱀파이어 대부분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보상으로 특전 「군주의 권세」을 부여합니다.》
《업적을 달성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르마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인간이었다가 얼떨결에 말단인 잔혈의 뱀파이어가 되고, 결국 정점인 성혈까지 올랐던 하인즈 2세가.
마침내 진짜 한 종족을 지배하는 왕이 된 순간이었다.
#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