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43화 (243/284)

#243

뱀파이어 라이즈 (3)

오바이포에게서 강탈한 힘을 모두 수습한 직후.

“하아—.”

뿌연 수증기가 서린 숨을 내뱉은 하인즈가 천천히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과 전신에서 느껴지는 형언할 수 없는 힘에 고양감이 치밀어 올랐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피의 일족 (성혈聖血)」이 「피의 종주」로 진화합니다.》

《특수스킬「피의 종주」가 하위능력인 「초재생」을 흡수하고 더욱 강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기분 탓만이 아니었다.

여럿으로 갈라져 나갔던 열두 혈맥이 하인즈의 몸을 통해 다시 하나가 되면서, 그의 존재를 이루는 근간이 보다 완성에 가깝게 진화한 것이다.

‘아직 성혈의 벽을 완전히 넘어서진 못했지만.’

뱀파이어의 정점인 성혈(聖血)을 넘어선 경지, 가칭 신혈(神血)이 되기엔 고작 한 차원의 계파를 통일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정말 그런 단계가 있는지 확신할 순 없었으나, 한층 격이 오른 그는 왠지 모르게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결코 여기서 끝이 아니며, 아직도 이 위 단계가 남아있다는걸.

‘능력도 전보다 배는 강해진 것 같고.’

「피의 종주」는 뱀파이어의 기본 스킬이었던 「피의 일족」 시리즈의 완성 단계인 만큼 그 능력과 효율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안 그래도 강했던 재생력이 더욱 강해져, 이젠 에너지만 남아있다면 전신이 재가 되어도 살아나는 불멸이나 다름없는 몸이 되지 않았나.

‘이 정도면··· 이젠 정말 한스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봐도 되겠는데?’

일단 단일 개체로서 생명체를 대상으로 보일 수 있는 파괴력은 비슷할 것 같았다.

둘이 맞붙는다면 종족 상성상 한스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데다, 불사왕의 진짜 저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전으로 가면 상대도 되지 않기에 맞먹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뭐, 어쨌든 강해지면 좋지. 그게 내가 원하던 거니까. 그보다 일단 지금은···.’

아직 좀 더 확인할 것도, 처리해야 할 문제도 많이 남아있었으나 당장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오바이포 클랜을 서둘러 수습하고, 공화국에서 벌어진 사태를 깨끗이 마무리하는 것.

‘이제 전부 내 것이니까. 이 이상 망가지게 놔둘 수는 없지.’

지그시 눈을 감은 하인즈가 도시 전체로 자신의 의지를 퍼뜨렸다.

그렇게 명실상부 대륙 모든 뱀파이어의 군주— 흡혈왕 하인즈 2세의 명령이 하달되자, 한창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소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삽시간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찾아온 극적인 평화.

또한 그것은.

이온 대륙의 동부에 심어뒀던 역천의 서약의 마지막 안배마저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

서울 시내에 위치한 한 사무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미모의 여성이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 휠을 내리며 스피커폰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보고서 외의 특이사항은 없다는 말씀이시죠?”

-음···. 그러하다입니다? 나, 또다시 더 열심히 찾았다니다. 부사장 말 듣고. 그런데···.

“영어로 하셔도 괜찮습니다. 앤드류 씨.”

-오!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우고는 있는데, 한국어가 참 쉽지 않네요. 이제 듣고 읽는 건 어느 정도 할 수 있는데 말하고 쓰는 게 영···.

“배운 기간에 비하면 굉장히 빨리 느신 겁니다. 머리도 좋으신 데다 정신과 지능 쪽에도 스테이터스를 많이 투자하신 덕분이겠죠. 물론 앞으로도 공부는 계속하셔야겠지만요. 그게 저희 로드··· 아니, 사장님의 명이시니.”

헤테로시스의 이인자, 진소란이 입으로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으로는 모니터 속의 보고서를 빠르게 훑었다.

역시 다시 살펴봐도 이렇다 할 특이사항은 없었다.

-하아, 그런가요···. 아, 그러고 보니 전 아직도 사장님을 한 번도 뵙지 못했는데. 많이 바쁘신 분인가 봅니다?

“뭐, 그렇죠. 앤드류 씨는 사장님 지인분의 추천으로 오신 거였죠? 덕분에 앤드류 씨처럼 능력 있고 성실한 분과 함께하게 됐으니 저희야 감사한 일이긴 합니다만.

-아, 그··· 그런가요? 하, 하하하···.

그녀의 칭찬에 전화 너머의 상대, 불사왕에 의해 강제로 한국까지 와서 헤테로시스에 입사하게 된 앤드류 위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도 원해서 성실하게 일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최근엔 지금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중이었다.

모종의 제약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선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 데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중국어 등의 언어 교육 때문에 여유도 별로 없는 나날이었지만···.

‘불사성에서 올리비아에게 혹사당하던 때에 비하면 이곳은 낙원이나 다름없지!’

거기다 콜라도 있고, 피자도 있고, TV도 볼 수 있으며 짬을 낸다면 게임도 할 수 있다.

미친놈들과 언데드들만이 바글거리던 틈에서 아등바등 발버둥 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환경.

‘이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사람을 미치게 하는 흑마력도 없는 데다 나름대로 보수도 빵빵하게 나오니까.’

애초에 돈을 쓸 시간 자체가 없다는 현실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여전히 블랙 기업이나 다름없는 환경 속에서 일하면서도 현 상황에 만족하는, 훌륭한 마음가짐의 자발적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앤드류 씨. 그럼 계속 살펴보시다가 추가적인 이상이 발견되면 언제든 연락해주시길.”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뚝.

전화가 끊어지고 다시 적막이 찾아온 집무실.

잠시 미간을 주무른 진소란이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찝찝하네. 일단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과 몇 시간 전, 그녀의 상사였던 온건파의 수장 아리아의 연락을 받아 어떠한 경고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아리아 님이 괜한 소리를 하실 리 없어.’

한때 온건파의 간부였던 진소란은 결코 그녀의 말을 쉽게 받아넘길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그 일신의 능력만으로 약소한 온건파로 강대한 강경파를 오랫동안 견제했던 대단한 사람이니까.

‘아마 미래 예지계 능력이겠지.’

사실 그녀의 휘하에 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별개의 정보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혈맹이라는 거대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오른 지금은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경고는 그런 연줄을 통해 얻은 정보가 아니라는 걸.

‘나에게 따로 연락을 주실 정도면 나나 헤테로시스에 뭔가 큰일이 생긴다는 뜻일 텐데. 아니면 혈맹의 어딘가인가?’

그녀가 급히 앤드류에게 긴급 요청을 넣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이야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관련된 뭔가를 빠르게 살펴보는 데에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으니.

‘당분간은 좀 사려야겠어. 혹시 모르니 사무실도 옮길 필요가 있겠네. 어디로 옮기는 게 좋을까···.’

그렇게 대충 생각을 마무리한 진소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니, 그러니까 여긴 그렇게 마음대로···!”

“에이, 잠깐이면 된다니···.”

그런데 정보 보안을 위해 설치한 집무실의 방음 결계를 넘어서자, 그녀의 예민한 청각에 사무실 바깥에서 울리는 소란이 감지되었다.

거기다 그중 하나는 그녀에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뭐지?’

의아한 마음에 사무실 입구로 걸음을 옮겨 문을 연 그녀의 시선에, 고작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낯익은 소녀의 뒤통수가 들어왔다.

그녀와 대치한 처음 보는 얼굴의 소년과 함께.

“나희야? 무슨 일이니?”

“아! 언··· 아니, 부사장님!”

그에 소녀, 이나희가 뒤를 돌아보며 그녀를 반겼다.

한때 온건파의 같은 크루에 속해 있었던 아이.

지금은 그녀와 같이 헤테로시스에 소속되어 사무보조 일을 배우고 있는 당찬 소녀였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책임자 되시나요?”

그때 사무실의 입구에서 이나희와 언쟁을 벌이던 그 또래의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음, 일단 내가 여기서 제일 높긴 한데.”

“아하!”

그녀가 얼떨결에 대답하자 소년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 순간 인상을 찌푸린 이나희가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며 다시 언성을 높였다.

“언니! 상대하지 마세요! 처음 보는 앤데, 얘 이상해요. 아까부터 막무가내로 들여보내 달라고 하고, 또···.”

“여러분들은 모두 흡혈귀 맞죠?”

그러나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잘라 들어오는 소년의 말에 입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와 반대로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소년.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태연한 기색의 진소란이, 미처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해 얼굴이 굳은 이나희의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는 네가 장난칠 곳이 아니란다? 장난은 친구들에게 해주지 않겠니?”

그녀는 소년의 말을 무시하며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차분히 타일렀다.

“아!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로 뭘 어쩌려는 게 아니라···.”

“걱정이고 자시고 경찰에 연락하기 전에 이만 가줄래? 너 때문에 시끄러워서 직원들이 일을 못 하고 있잖아.”

“그게 아니고, 저도 흡혈귀거든요? 그래서 동족들이 있다는 걸 알고 반가워서 찾아와 봤어요. 저도 동료로 받아달라고요!”

그 말에 진소란이 가늘게 뜬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처음처럼 미소 짓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에게선 혈마력은 물론 어떤 피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이네.’

원래의 그녀는 6레벨 상위권이었으나, 헤테로시스에 들어오면서 하인즈의 「정제혈정」을 받아들여 이젠 7레벨 수준에 이르렀다.

아우테리카로 치면 진혈이었으며, 강경파가 강성했던 기준에서도 고작 둘밖에 없었던 베타와 동급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결정적으로.

이나희의 또래인 이 소년의 나이가 중2 정도로 보인다는 게 좀 컸다.

“하아, 친구야? 누나가 지금 많이 참고 있거든? 좋게 말할 때 가주지 않을래? 이래 봬도 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아무리 문제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정상적인 회사로 위장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이곳이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의 눈에 띄는 건 영 껄끄러웠으니까.

거기다 저 소년이 경찰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 안 믿으시네. 진짜라니까요? 이거 보세요? 저 송곳니 뾰족하게 튀어나왔잖아요?”

“덧니네. 치과 가서 교정하면 된단다.”

진소란은 입에 손가락을 넣어 이빨을 보여주는 소년에게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 마늘 싫어해요!”

“네 나이 땐 그렇지. 그래도 편식하면 못써.”

“집주인이 초대해 주지 않으면 막 들어가지 않아요!”

“잘했어. 마음대로 들어가면 주거침입이지.”

소년이 연신 자신이 흡혈귀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흐르는 강물도 함부로 넘어가지 않고요!”

“그래, 위험하니까 앞으로도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체온이 낮아요!”

“냉한 체질인가 보구나. 따뜻하게 입으렴.”

“햇빛에 약한 편이에요!”

“자외선 차단은 중요하지. 그래도 햇볕을 쬐어야 비타민D가 생긴단다.”

이젠 오기가 생긴 듯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는 소년과 거기에 지지 않고 응수하는 진소란.

그 자존심 강한 두 사람의 싸움에 어느새 한 걸음 물러선 이나희는 그저 입만 헤 벌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은에 거부반응이 있어요!”

“금속 알레르기니?”

“심장에 말뚝을 박으면 죽어요!”

“나도 그래. 그건 누구나 다 그렇단다.”

“······.”

“······.”

마침내 레퍼토리가 다 떨어진 듯 말을 멈춘 소년이 앞에 당당히 선 진소란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 이게 안 통하네.”

“끝났니? 그럼 이제 가 주지 않을래?”

그 반응에 진소란이 지친 듯이 뚱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미소 짓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거짓말이에요.”

“알고 있었어.”

그에 진소란이 짧게 대꾸했으나—.

“전 심장에 말뚝 박아도 안 죽거든요.”

소년의 말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뭐야?”

지금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분위기.

마치 한순간에 사람이 바뀐 듯한 그 모습에 그녀는 이나희를 보호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앗! 제가 아직 소개를 안 했었죠? 이런 실례를!”

밝게 말하고 있었지만 척 보기에도 그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한 과장된 기색은 둘째 치고, 어느새 그 외양조차 거부감이 들 정도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뭐, 진짜 이름은 버린 지 오래돼서 쓰고 싶지도 않고.”

오른쪽 눈에는 세 개의 눈동자가, 왼쪽 눈에서는 네 개의 눈동자가 분화되어 저들 멋대로 안구를 이리저리 활보했으며.

여러 개로 겹친 듯한 목소리가 기묘하게 울리며 노이즈를 만들어냈다.

“그냥, 알파라고 불러주세요.”

“···알파?”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지기 시작한 피부.

이어서 그의 몸에서 짙은 혈향이 풍겨 나왔다.

어째서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하게.

“아참! 그래서···.”

그의 입이 귀밑까지 길게 찢어지며 상어 같은 이빨이 드러나고.

그 안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인즈라는 놈은 어딨냐?”

하인즈가 한창 제피아 공화국 사태를 수습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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