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뱀파이어 라이즈 (4)
제피아 공화국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애초에 소란의 원인이었던 양측이 전부 한 사람의 아래에 복속된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사태에 휩쓸린 이들이 모두 그의 통제에 따르는 것은 아닌지라 아직도 곳곳에 소란이 남아있긴 했으나, 근본적인 원인이 사라진 상황에선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할 터.
이제는 여기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며, 명하신 대로··· 뒷정리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휘하의 클랜원들을 소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이 로드.”
“음."
호화롭게 꾸며진 집무실 내부.
화려한 의자에 앉은 하인즈가 자신의 앞에 부복한 검푸른 머리칼의 여성을 내려다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제법 순종적이군.’
그녀는 실질적으로 오바이포 클랜을 꾸려나가던 이인자, ‘샤밀라 오바이포’였으며.
‘브로코슬락의 뮬로’와 ‘유페르쉬의 테오도르’와 마찬가지로 클랜의 실무를 책임지는 진혈의 뱀파이어였다.
‘이만한 규모의 세력을 온전히 흡수하는 데엔 내부인, 그것도 고위층의 협조가 필수적이지.’
오바이포 클랜은 뱀파이어 세력 중에서도 3강에 포함될 정도로 막강한 집단이지 않은가.
아무리 그가 명령권을 강탈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온전히 다루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싸움이 끝난 하인즈가 곧바로 가장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던 그녀를 추적해 잡아들였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순순히 말을 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들이 모시던 성혈마저 패배하고 명령권이 넘어간 상황인데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아주 약간의 강압이 가미된 설득이 이어진 끝에 현실을 깨닫고서 순순히 명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럼, 이쪽 일은 대충 끝났군.”
그렇게 중간보고를 위해 찾아왔던 그녀가 다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떠나간 후.
오바이포 클랜이 보유한 저택에 눌러앉은 하인즈는 자신이 이곳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여유롭게 와인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동부를 기점으로 대륙의 암흑가 상당수가 그대로 놈들의 손에 넘어가 버렸겠지.’
오바이포의 목적은 모든 뱀파이어를 지배하는 왕이 되는 것이었으니.
혼란을 틈타 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조차 그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태생 자체가 어둠의 자식인 그들이 누군가의 악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대륙에 미칠 파급력이란···.
하나의 대륙을 침몰시킬 뻔한 라이칸스로프보다 숫자도 많은 뱀파이어가 본격적으로 난장을 피우기 시작했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어쩌다 보니 내 존재 자체가 제대로 카운터를 치게 되었지만. 그러고 보니 난 이상할 정도로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는 것 같네.’
물론 심연의 광기 유출 사태부터 몬스터의 준동, 로한 공국 멸망 등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 사건도 적지 않았으나, 그가 개입하여 해결한 문제는 그 이상이었다.
사실 큰물에서 노는 만큼 큰일과 엮이는 것도 필연적이라지만, 영 찝찝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 하나 끝났다고 설마 또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겠지?’
예컨대, 이번엔 휴버트의 상회와 하워드의 대장간이 있는 타라크에서 뭔가 사고가 일어난다던가.
‘···음, 예감이 좋지 않아. 혹시 모르니 좀 더 주의를 강화해야겠군. 꼭 이럴 때 방심하다 문제가 생긴단 말이야.’
그 두 아바타는 이렇다 할 전투 능력이 없는 만큼 일이 벌어졌을 때 즉각 대응하기 위해선 좀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어쩐지 한껏 예민해진 직감이 아직 쉴 때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도 이번에 얻은 특전이 그런 돌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다행이네. 「군주의 권세」라···.’
하인즈 2세가 흡혈왕이 되며 받은 특전, 「군주의 권세」.
그것은 마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자신에게 속한 이들의 위치와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하는 건 물론, 원격으로 간단한 명령까지 내릴 수 있는 세력 관리 계통의 능력이었다.
그가 지그시 눈을 감자.
그와 연관된 수많은 세력의 목록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아우테리카>
-불사의 군대
-하이브리드
-휴버트 상회
-칼코스 부족 연맹
-······
‘···많기도 하군.’
줄줄이 이어지는 세력 목록.
각 항목을 대충 확인해 보니 그 조직과 관련된 이런저런 사항은 물론, 그곳에 소속된 이의 개략적인 정보마저 열람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신교단이나 엘븐 킹덤같이 그가 온전한 ‘군주’라고 할 수 없는 곳조차 제한적이나마 기능이 적용될 정도였으니, 아바타의 숫자만큼 가진 세력도 많은 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능력이었다.
‘음?’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대충 「군주의 권세」의 능력을 살피던 도중, 어쩐지 그의 의식 한편에서 뭔가 거슬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원인을 파헤치던 중 마침내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지구>
-혈맹 - 헤테로시스
아우테리카가 아닌 지구에서 거둔 그의 첫 번째 세력.
그중에서도 구성원의 상태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었다.
‘···뭐야 이건 또?’
└이름 : 진소란 (헤테로시스의 수장 대리)
└종족 : 흡혈귀
└위치 : 대한민국 서울 남부 대란동 [상세 좌표 보기]
└상태 : 위험 (중상)
‘···뭔 일이 날 것 같긴 했는데, 그게 이쪽이 아니라 지구였냐고.’
한국의 밤을 꽉 잡고 있는 혈맹의 최고 간부이자, 이젠 진혈급이라 할 수 있는 흡혈귀가 중상을 입을 정도로 위험한 상태라는 건···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으음.”
느긋하게 와인을 즐기던 하인즈가 침음을 흘리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으니.
***
알파가 정체를 드러내기 직전에 나눴던 대화.
-“집주인이 초대해 주지 않으면 막 들어가지 않아요!”
-“잘했어. 마음대로 들어가면 주거침입이지.”
그때 그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그에게서 퍼져 나온 강대한 혈마력이 주변을 뒤흔든 직후.
어린 이나희가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뻣뻣하게 굳었을 때, 이세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돌아온 진소란은 빠르게 그녀를 챙기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한껏 긴장한 채 뒷걸음질 치던 그들이 어느새 등지고 있던 사무실의 문을 넘어 내부로 들어선 순간, 그가 한 말이 바로—.
“어! 안으로 들어가 버렸네? ···그럼 곤란한데. 있지, 나도 초대해 주지 않을래?”
그 천진난만한 물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 찰나의 희망은 순식간에 스러져 버렸다.
당연하게도, 그녀가 끝까지 그 요청에 응하지 않자 보인 그의 행동 때문에.
“으응, 그럼 어쩔 수 없지!”
금속성과 노이즈가 섞인 듯한 그 기괴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수긍이 끝난 직후.
알파는 그 즉시,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마음대로 들어가는 건 안 되고 부수는 건 상관없다니. 무슨 이런 자기중심적인 기준이···!’
애애앵—! 애애애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에 잠시 아득해졌던 진소란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푸스슥— 후두둑!
“크흡— 허억, 허억.”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서 엉망이 된 몸을 간신히 일으킨 진소란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윽,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거지?’
주변 상황에 그리 큰 변화가 없는 걸 보아하니, 다행히 기껏해야 1초 남짓한 극히 찰나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막상 다시 주변 상황을 직시하고 보니 다행이라 여겼던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지만.
헤테로시스의 사무실이 있던 건물을 시작으로 이미 일대의 몇 채나 되는 건물이 무너졌고, 거리 곳곳은 부서진 도로와 사고 난 차량으로 난장판이었다.
화재와 감전, 낙석 등으로 인한 사상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
알파가 본모습을 드러내고 고작 5분여 만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아무리 애써도 잠깐 시선을 끄는 게 고작이라니···. 알파가 저 정도 수준은 아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알파가 혈맹에 있을 때만 해도 갓 8레벨에 이른 수준이라는 소문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건만, 지금 그가 보이는 기세는 그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굳이 레벨로 따지자면 9레벨이라고 봐야 할 터.
헤테로시스의 로드인 하인즈조차 기껏해야 8레벨 상위권 정도라 알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듣도 보도 못한 9레벨이라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아니, 어지러운 건 방금 입은 대미지 때문인가.’
그녀의 흡혈귀로서의 압도적인 재생력조차 육체를 좀먹어오는 상대의 기운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상대가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미 진즉에 죽고도 남았겠지.
로드 덕에 7레벨에 오르며 한껏 차오른 자신감이 항거할 수 없는 적을 마주하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히! 그러니까, 그 하인즈라는 놈 어디 있냐니까요? 말 안 하면 죽인다? 아, 죽이면 안 되지 참. 저 여자가 제일 높다잖아? 어? 그럼 어떡하지?”
그때, 난장판이 된 폐허 너머로 기이하게 뒤틀린 목소리가 경박하게 울려 퍼졌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는 알파.
확실히 그 뒤틀린 겉모습처럼 절대 정상적으론 보이지 않는 언행이었다.
‘소문엔 성격도 우리 로드 같은 진중한 타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그 소문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저자가 알파를 사칭한 가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도 했고.
“푸힛!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저 여자 빼고 나머진 다 죽여도 된다는 거겠지요? 하인즈는? 에이, 그래도 배고픈데 잘 됐다! 응!”
그 정신없으면서도 살벌한 말에 진소란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압도적인 혈액 통제력에 의해 주변에서 발생한 희생자들의 피가 모조리 놈에게 빨려 나간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저딴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으니···.
‘로드께서 오신다고 승산이 있을까···? 아니, 하회탈은 이럴 때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최근엔 일본에서 활동도 안 하고 있던데! 진짜 다크 히어로라면 지금이야말로 등장해 줘야 할 타이밍 아냐?’
진소란의 머릿속이 어지럽게 엉켜 들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출동했던 가디언들마저 손도 못 쓰고 놈의 제물이 되어버린 지금, 당장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막막했던 것이다.
‘아아, 정말! 이런 상황에 나타나는 게 영웅이잖아! 일하라고 영웅!’
그것도 이왕이면 되도록 빨리!
쿠르르릉— 쿠릉!
그런 그녀의 그런 간절한 바람을 하늘이 들어준 것일까.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서 연신 무거운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번쩍— 콰르릉! 콰앙!
막대한 이능 에너지를 품은 채, 몇 줄기 벼락의 창이 되어 대지로 내리꽂혔다.
“그기게게그게겍—!”
정확히 알파가 있는 곳을 향해.
파지직— 파직—
이내 충격의 여파로 거칠게 튀는 스파크와 함께 저편에서 그 영웅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왜 하필 휴가 날에···. 거기다 만사 제치고 바로 달려왔는데도 그 잠깐 사이에 이 모양이라니···!”
다만 그 존재는 진소란이 애타게 기다리던 하회탈도, 차라리 오지 않길 바랐던 로드 하인즈도 아닌 별개의 인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사람도 있었지.’
최근 하회탈이 급부상하기 시작하며 그 존재감이 다소 빛이 바랬기에 잠깐 잊고 있었지만, 그 상대는 원래 그리 무시당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파직! 빠지지직—!
찌푸린 얼굴로 전신에 황금빛 뇌전을 두른 이십 대 후반의 여성.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세련된 외출복의 곳곳이 헤지고 상한 건 물론, 한껏 꾸몄던 것처럼 보이는 머리는 몸에서 뿜어진 정전기에 사자 갈기처럼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내가 요즘 얌전히 있으니까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 보네. 이렇게 대놓고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건 좀 선을 많이 넘는 것 같지 않아?”
그녀는 한국 최강을 꼽을 때면 항상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가디언이자.
여러 이세계 관련 매체는 물론 귀환자 인터뷰를 통해서도 그 업적이 알려진 영웅.
귀환자 협회 서울 남부 지부장, 뇌제(雷帝) 윤지윤이었으며.
“···넌 뒤졌다.”
이 구역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
「군주의 권세」로 진소란의 위기를 감지한 직후, 지구에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워낙 큰 사건이었던지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었다.
-[테러 경보] 서울 남부 대란동에서 대규모 테러 발발. 인근 주민 여러분들은 즉시 자리를 피하고···.
서울 외곽 지역에 거주하는 나에게까지 날아올 정도의 문자 알림을 시작으로, 여러 뉴스 속보가 슬슬 여러 매체를 뒤덮어 가기 시작했다.
일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이제야 소식이 확산되는 추세였으나, 그 피해 규모만큼은 벌써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불어난 상태였다.
‘고작 몇 분 만에 이 정도 파괴력. 상대는 초월급이라 보면 되겠군. 거기다 흡혈귀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렇다면 역시···.’
그리고 나는 그 일분일초가 시급한 상황 속에서 사고를 가속시켜 순식간에 정보를 추리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스스슥—
조용히 그림자에서 솟구치는 아우테리카의 흡혈왕, 하인즈 2세.
어차피 오바이포 클랜을 흡수한 하이브리드도 당분간 재정비에 들어갈 예정이었기에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든 소환 해제가 가능한 아바타를 보내는 건 기본이기도 했고.
‘다른 차원의 초월급 흡혈귀. 넌 내 꺼야!’
절대 다른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상당히 다급한 마음으로 부랴부랴 현장에 도착한 하인즈가 마주한 것은.
“크게겍! 하인즈으으!”
콰르릉—! 콰앙!
“아니, 아까부터 숙녀를 앞에 두고 계속 딴 사람만 찾는 거 봐? 생긴 것처럼 매너가 아주 빵점이구나!”
그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한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