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강환계 (2)
엘븐 킹덤의 수도 드라샤.
“에휴—.”
그 중심부에 자리한 왕성을 나서는 세실리 그랜우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대체 어딜 간다고···.’
불과 몇 시간 전, 그녀의 동기라고 할 수 있는 해리스가 보인 돌발 행동에 골치가 아파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성실하게 세계수의 곁을 지키던 그가 갑작스러운 휴가를 요구해 왔던 것.
사실 그것 자체는 그리 유별난 일도 아니었다.
어떤 위치에 있건 휴식과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인 만큼, 다른 하이 엘프들도 별말 없이 수긍하며 푹 쉬고 오라고 말하기도 했으니.
문제는 그가 드라샤를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엘븐 킹덤의 영역을 벗어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갔다 오겠다고 한 것에 있었다.
‘···어딘지 말은 안 했지만, 왠지 에나멜 대륙도 아닌 것 같단 말야.’
당연히 세실리를 비롯한 하이 엘프들은 그를 말리고 나섰다.
엘븐 킹덤에서도 몇 안 되는 상징적인 존재인 하이 엘프, 그중에서도 최고의 전력으로 급부상한 중요 인물이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를 곳에 혼자 가겠다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태평하던 평소와는 달리 매우 강경하게 나왔고, 결국 그들은 그 고집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라이칸스로프를 비롯한 위협도 제거했고, 따로 방비도 충분히 갖췄으니 그가 자릴 비워도 문제없긴 하지만.’
그렇게 합의된 시간은 딱 열흘.
열흘 내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해리스는 바로 조금 전, 곧바로 숲의 길을 사용해 어딘지 모를 곳으로 훌쩍 떠나간 참이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만한 강자가 어디서 쉽게 화를 입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지금 세상이 워낙 흉흉한지라 자연스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늘어져서 광합성이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으로 길을 걷던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평소 해리스가 빈둥거리던 나무 언덕 근처를 기웃거리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샤피론···?’
손에는 간식 바구니를 든 채, 곱게 단장한 듯 찰랑거리는 푸른 머리를 흔들며 연신 주변을 살피는 엘프 소녀.
라포리의 딸인 샤피론 실베스티였다.
사절단에도 함께 참가하고 연배도 비슷해 자연스럽게 적잖은 친분을 가지게 된 상대였는데.
‘아! 설마.’
오가면서 해리스와 그녀가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주로 축 늘어진 그의 옆에서 같이 간식을 먹거나 투덕거리는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그래서 당연히 그가 그녀에게는 따로 미리 말을 전해둔 줄 알았거늘···.
이제 보니 그녀에게도 별다른 언질 없이 그냥 홀랑 떠나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대체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잠시 굳어있던 세실리는,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한 쌍의 푸른 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샤피론.
그 천진한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하아— 이 사람이 진짜, 오기만 해 봐···.”
세실리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해리스가 돌아오면 꼭 한 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
위험 등급 매우 높음, 생존 우선.
그런 위험한 세상에 무턱대고 아무 아바타나 보낼 수는 없었다.
소환 해제가 있으니 어지간해선 죽지 않겠지만, 그렇게 이리저리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 자체가 낭비이지 않은가?
‘정확한 현지 정보를 파악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데는 무력이 필수니까. 압도적인 힘이 있는데 굳이 밑바닥부터 고생할 필요는 없지!’
한스는 불사성에 처박혀 몸을 회복시키며 연구에 매진하느라 바쁘고, 하인즈 2세는 양쪽 세계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인리히는 전 대륙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할리도 아직 남부에 남은 일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한가한 건 해리스밖에 없다는 소리.’
물론 그 해리스도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는 위치인 만큼 필요한 교두보를 마련한 후엔 다시 엘븐 킹덤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장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0일 남짓.
그 정도면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강환계의 모처.
인적이 없는 산지 한가운데.
스읍— 하—
“이곳이 강환계···. 썩 나쁘지 않은데?”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디딘 해리스가 깊이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가 존재하는 아우테리카 만큼은 아니었으나, 지구의 더러운 공기에 비하면 이곳은 청정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환경오염 탓도 있지만, 세상에 퍼진 에너지의 유무에 따른 차이도 크군.’
대기 중에 한 톨의 기운도 섞여 있지 않은 신비의 불모지— 지구와는 달리, 강환계의 공기 속엔 이 세계만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순환하며 세상의 탁기를 정화하고 있었다.
‘이게 기(氣)인가. 미묘한 기분이네.’
자연에 민감한 하이 엘프이자 초월에 이른 강자였기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기운의 차이는 물론 대기의 구성 성분 역시 아우테리카나 지구와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그걸 또 직접 겪으니 새삼 신기하네. 각성자란 뭐기에 이런 판이한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거지?’
각 차원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독립성과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유지하는 항상성.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게 괜히 생겼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흐음.”
긴 귀를 가진 금발 녹안의 귀공자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은 그런 세상의 비밀에 사색할 때가 아니었으니.
‘지금 중요한 건 실험이 성공했다는 거지.’
그 덕분에 ‘자력으로 지구 귀환’에 이은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해 「이계전송진 소환」이 강화되었다.
이세계 시간으로 10일에 한 번씩 가능했던 전송이 이제는 5일로 팍 줄어든 것이다.
‘이세계에서 자신이 지나간 장소로 다시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특전.’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해리스가 강환계로 넘어올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현경의 고수인 살마에게서 추출해 낸 생생한 사념 정보 속 기억을 바탕으로 한스의 연구가 가미된 결과.
‘이곳이 살마가 지나왔던 장소란 말이지?’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조차 속인 끝에—.
살마의 기억에 남은 장소를 자기가 직접 방문한 것처럼 인과를 비트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럼, 본격적인 현지 조사를 시작해 볼까···?”
주변의 숲과 나무들을 둘러본 해리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식물에 생소한 식생이었지만, 그것들이 뿜어내는 상쾌한 기운은 「자연 동화」를 가진 그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만하면···.
“나와라, 파스칼.”
휘우우웅—
그의 정령들도 앞으로 제법 편하게 놀 수 있을 테니까.
***
호남성 장사시 인근의 양형산.
“퉤, 쓰벌. 오늘 영업도 글렀구만.”
“어쩔 수 없지. 지금 상황이 상황이잖여. 나라까지 무너진 마당에 겁도 없이 싸돌아댕기는 멍청이가 을매나 될까.”
“그렇게 태평한 소리 늘어놓을 때야? 이러다 다 굶어 죽게 생겼다고! 이거 우리도 딴 데로 옮겨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않아도 두목도 어디로 옮길지 고민인 것 같드라. 얼마 전에 소호채도 못 버티고 이사 간 걸로 생각이 많은 모양이여.”
산을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산길 어귀에 뭉쳐 저들끼리 쑥덕거리는 대여섯 명의 무리가 있었다.
자칭 양형산의 산군이자 그릇된 세상을 질타하는 영웅호걸— 이라 하지만.
그냥 까놓고 말해 산적들이었다.
“아, 거. 입구 쪽에선 아직도 신호 없어? 오늘도 공치면 두목이 엔간히 지랄할 텐데.”
“읎다. 아무래도 오늘도 그른 거 같다야.”
“에휴, 요즘은 상행도 없고. 어디 돈 많은 호구 하나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네.”
“낄낄낄— 실없는 소리 할 거면 그냥 디비 자라, 마! 이 화창한 하늘에서 뭔··· 응?”
바로 그때, 언제나처럼 화목하게 산의 평화를 지키던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쳐왔다.
“으힉?! 저, 저게 뭐여? 이쪽으로 온···!”
별생각 없이 하늘을 쳐다보다 뭔가를 발견한 이의 경악성을 시작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하나둘 고개를 들던 그들의 눈앞에—.
후우우웅—!
갑자기 몰아치는 거센 광풍 속에서.
“오, 사람 발견.”
하늘에서 웬 사람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어쩐지 듣기만 해도 나른해지는 듯한 태평한 목소리와 함께.
그리고 그를 마주한 순간, 산적들 사이에 일제히 같은 생각이 퍼져 나갔다.
‘···정말 사람이 맞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발에 녹안까지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땅에 색목인(色目人)이 드문 편이긴 하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저게 사람 귀여? 거기다 눈은···!’
‘요··· 요괴?!’
하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완벽한 조형을 자랑하는 미형의 얼굴과 양옆에 삐죽 솟아오른 귀, 녹색 눈동자 안에 자리한 별 모양의 동공.
심지어 몸 주위엔 유형화된 바람을 두른 채로 하늘을 날아서 내려오지 않았던가?
이건 아무리 편견 없이 개방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이라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기사(奇事)였다.
“······.”
“······.”
산적들이 슬그머니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로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으나, 사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이고~!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대협!”
하늘에서 호구가 떨어지길 바랐던, 코에 커다란 점이 있는 산적이 가장 먼저 넙죽 엎드리며 구슬프게 외쳤다.
“귀하신 분께서 이런 보잘것없는 놈들에게···.”
“뭐, 뭔가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늙으신 노모께서 저만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그 뒤를 따라 서둘러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 산적들.
밑바닥에서 오로지 생존 본능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이들답게 재빠른 상황 판단이었다.
다른 건 다 둘째 치고, 바람을 다루며 하늘을 날아오는 이적을 행한 이에게 생각 없이 대거리하는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음, 이거 이해가 빠른 분들이네요.”
그런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늘에서 내려온 이방인, 해리스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 사람들과의 첫 조우에서부터 과하게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무엇보다 여기서 「제노글로시」가 활약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이거 꽝인 줄 알았는데 당첨이었잖아?’
이곳의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모든 언어에 「제노글로시」가 관여하고 있다는걸.
시스템의 자동 번역 기능은 정식으로 입장한 최초의 차원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무단으로 진입한 차원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없었으면 괜히 또 한스를 데려오고 언어를 새로 익히는 등,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었겠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제노글로시」를 얻었던 『무작위 기타 스킬 습득』에도 자연스럽게 다시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물론 50만 포인트라는 막대한 지출이 필요하긴 하지만···.
‘아니, 아니지.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에 뽑기의 유혹이 스멀스멀 차올랐으나, 지금 당장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럼 일단, 여러분의 본거지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사실 멀리서부터 그들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에 있는 산채의 존재 또한 이미 파악한 지 오래였다.
그저 그들이 더 가까웠기에 이쪽으로 먼저 온 것일 뿐.
즉, 이건 그저 단순한 요식행위였다.
“그··· 무슨 일로 그런 누추한 곳에 방문하시려는 것인지 여쭈어도 될···.”
“어허! 이 사람 참! ···헤헤, 물론입죠! 이쪽으로 따라와 주십쇼! 가장 빠르고 쾌적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눈치 없는 한 친구의 반문에 슬며시 그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감지했는지, 눈치 빠른 커다란 점의 산적이 다시 분위기를 살리며 곧바로 그를 안내해 주었다.
살짝 기분이 상할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인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산채로 안내받은 그는 한순간에 모든 산적들을 휘어잡았고, 이내 그들을 심문해 본격적인 정보 수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신비고수 ‘해리수’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불과 한 시간 남짓이 지난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