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57화 (257/284)

#257

제갈세가 (3)

이제 이세계 시간으로 5일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성장한 특전, 「이계전송진 소환」.

그에 쿨타임이 되자마자 강환계로 넘어온 휴고는 해리스의 주선을 받아 곧바로 제갈세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음, 이거 짜릿짜릿하군.’

느긋하게 세가 내를 산책하던 그는 주변에서 은근히 전해져오는 경계심 섞인 적의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저들 입장에선 굴욕이나 다름없을 테니 저런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해리스가 좀 더 부드럽게 접근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너무 과격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그만큼 반감도 커진 것일 터.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관계부터 회복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며칠 후에 해리스가 떠나고 나면 강환계에서의 일은 이젠 하승훈이 된 휴고가 전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제갈세가 측에서 섣불리 수작을 부려 오진 않겠지만, 앞으로의 원활한 작업을 위해선 관계 개선이 필수였다.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영향력을 키우는 데에 여기만큼 조건이 좋은 곳이 또 없지.’

특출난 강자는 없으면서도 집단으로서의 힘은 여느 세력 못지않고, 세상이 어지러워진 후에도 다른 정파 세력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확장이 용이하다.

‘거기다 아는 것도 많고 유능하기로 이름 높은 가문이기도 하니, 안정적인 환경에서 무공을 익히는 데에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사실 해리스는 운이 좋아서 무유팔괘비공을 자기 식대로 흡수했을 뿐,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그에게는 한 번쯤 ‘정석대로’ 그것을 익혀보는 경험이 꼭 필요했다.

그래야 이후 무공이라는 힘을 어떻게 활용할지 견적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역시 뭔가 선물이라도 해야 하려나?’

자고로 선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

때마침 동정십팔채에서 털어온 재물도 잔뜩 쌓여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이만한 세가가 고작 그런 금품 따위에 넘어갈 것 같진 않았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럼 역시 영약이나 신병이기 같은 돈과 권세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게 좋을 텐데···.

“실례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앞으로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 이곳은···.”

그렇게 생각에 잠겨 하염없이 세가 내부를 거닐던 도중.

휴고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앞을 막아선 여성 무사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세가의 여인들이 머무는 거처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소협.”

“···이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실례를 범했군요. 바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넋 놓고 걷다 보니 어느새 금남의 구역까지 와버린 모양.

괜히 이런 데서 얼쩡거리다 안 그래도 낮은 호감도를 더 깎아 먹을 수는 없었다.

그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돌아서서 떠나려던 그의 귓가에 문득—.

구역 안쪽 먼 곳에서 주고받는 여인들의 대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래서 아가씨께선 좀 어떻···.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

‘음?’

그것은 짧은 몇 마디에 불과했으나.

그는 어떤 직감에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지금껏 지구에서 본체의 수발이나 들던 휴고였지만, 그것이 그가 능력 없이 무력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순수하게 스테이터스에 때려 박은 카르마만 해도 400만에 가까울 지경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아무리 귀환자들이 가진 무력의 핵심이 각자의 세계에서 비롯된 신비와 스킬이라고는 해도, 그 압도적인 수치는 그의 육체를 어떤 특이점 이상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그의 감각 또한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고.

거기에 「신경과민」의 집중과 「다재다능」의 보조까지 더해졌으니, 무방비하게 떠드는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 정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필 불청객들 때문에 뒤숭숭한 상황에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시다니. 이를 어찌해야 좋을꼬.

-이번에 가져온 영약으로는 보름도 채 버티지 못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약재에 내성이 생기신 것도 있지만, 영약의 전반적인 약효 자체가 줄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어허! 입조심하지 못할까? 어딜 경망스럽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뭔가 대책이 필요한···.

“···하 소협?”

그렇게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그의 앞을 막아섰던 무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간다고 해 놓고 왜 아직도 그러고 있냐는 듯.

순수한 육체 능력만으로도 초인에 가까운 휴고와는 달리, 청각을 북돋기 위해선 따로 내공을 운용해야 하는 그녀는 그가 엿들은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그만. 하하핫!”

그에 휴고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뜻하지 않게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흐음, 제갈세가는 의술로도 상당히 이름 높다고 들었는데. 그걸로도 치유하지 못한 환자가 있단 말이지?’

거기다 아가씨라는 호칭을 봤을 때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여식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가주의 직계일지도 모르고.

어찌 됐든 중요 인물이라는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제갈세가에서조차 고치지 못한 불치병이라···.’

휴고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좋아.”

그리고 마침내 어떠한 것에 생각이 미친 그는.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그린 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휴고가 세가를 거니는 동안 해리스는 눈을 지그시 감은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하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제공받는 것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가 이곳에 찾아온 가장 큰 목적이 정보 수집이었으니 그것도 당연한 일.

그리고 그렇게 얻은 정보는 상당히 유용한 것이었다.

‘22년 전에 황궁을 습격해 참변을 일으킨 날개 달린 이방인. 그가 황제를 시해하고 황궁 터에 자리하고 있던 대륙 최대 규모의 용맥, 용심(龍心)을 뜯어가 버렸다?’

역시 제갈세가는 황궁에도 끈이 있었는지 상당히 많은 걸 알고 있었다.

황실이 완전히 몰락한 이상 굳이 함구할 필요도 없는지라 해리스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기도 했고.

‘번천회주. 역시 그놈이 이곳에 왔었군.’

해리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예상만 하던 것과 확신을 얻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어째서 놈이 그렇게 강했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는가!

‘나처럼 차원을 넘나드는 건 기본. 하나의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으니 그렇게 얻은 카르마도 상상 이상이겠고. 거기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것까지 뜯어갔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놈이 이런 식으로 다녀간 세상이 한둘이 아니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아니, 침착하자.’

하지만 그런 혼란도 잠시.

압도적인 정신 능력치 덕에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제 이 세계에 번천회주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또 힘을 얻기 위해 놈이 선택한 방법이 강환계의 파멸이라는 것 또한 명백하고.

그래.

그렇다면—.

‘내가 그 반대로 한다면?’

어쩌면 놈을 방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세계에서 얻을 건 다 얻은 놈이 이미 손을 털고 떠났다면 아무리 용 써봤자 별 소용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경우에도 카르마라는 수확은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만약, 이 강환계에 가해진 수작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면?

놈이 무언가를 위해 계속해서 빨대를 꽂아두고 이용하는 중이라면?

‘그놈이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그 생각대로 되게 놔둘 수는 없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놈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딱히 세상의 구원자가 될 생각은 없었건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이 세계부터 최대한 안정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제갈세가의 도움이 필수.

해리스는 최대한 성질을 억누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큰 도움이 되었군요.”

“허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려. ···그런데, 이 노부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만.”

“···그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것을 알아내려고 이렇게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자는 제 원수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흐음—?”

그는 태상가주에게서 골치 아픈 질문이 나오기 전에 먼저 선수 쳐서 대답했다.

사실 번천회주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도 사실이기도 했고.

‘괜히 똑똑한 사람 질문에 답하다가 내 밑천만 털릴라.’

사실 지금까지 한 대화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정보가 넘어갔을 테지만, 그렇다고 거기다 멍석까지 깔아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가볍게 헛기침한 해리스는 그것을 위해 슬슬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이거 신세를 졌는데 뭔가 보답이라도 하고 싶군요. 진법을 부순 것도 그렇고, 본의 아니게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기도 했으니까요.”

“허허, 보답이라···.”

“마침 제게 영약 몇 뿌리가 있습니다. 작은 성의이니 이거라도 받아주시지요.”

어차피 그에게 영약이야 뒷산에서 쑥 캐오듯 채취할 수 있는 거니 아낄 것도 없었다.

조만간 무당산에 방문해서 한번 싹 쓸어올 생각이기도 했고.

“오, 그런 거라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소.”

그에 태상가주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성의를 표한다기에 보인 의례적인 반응일 뿐 그다지 기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리스가 슬그머니 본론을 꺼내 들었다.

“물론 그런 것보다는 제가 데려온 아이··· 하승훈이 더 대단하겠지만요. 하핫!”

“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눈을 감은 노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였다.

해리수라는 이 절대고수라면 모를까, 별다른 내력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 청년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서.

“아, 그 아이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물론 근골과 오성도 매우 뛰어나지만요.”

어차피 해리스는 곧 떠날 사람.

그런 만큼 이참에 이들과 협력해 나갈 휴고의 입지를 키워두는 게 합리적이었다.

물론 거기엔 아주 약간의···.

“바로, 어떤 병이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약이 좀 쳐져 있었지만.

***

이세계에서 제작된 마도구는 기운의 체계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의 힘을 빌려오는 신성력은 어떨까?

‘명색이 신의 힘인데 고작 그런 거에 영향을 받을 리가.’

물론 지구에서처럼 차원을 넘어서면 그 위력이 약해지는 등의 문제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원인은 힘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끌어오기 위한 통로에 제한이 걸리면서 생기는 출력 저하에 가까웠다.

신성력이 아예 발동하지 않는 건 아니란 소리.

그렇기에 이런 시도 또한 가능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휴고는 앞에서 안내하는 시비의 뒤를 따라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그가 한 번 발길을 돌렸던 곳의 내부.

가문 여인들의 거처가 있어 외간 남성은 발을 들일 수 없는 일종의 성역이었다.

물론 그도 곧바로 이곳에 초대받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해리스의 호언장담이 있었다고 해도 그의 말만 믿고 함부로 움직이기엔 그들 사이에 신뢰가 부족했으니까.

처음엔 정중한 부탁을 동반한 진위 확인이었다.

<해 대협에게 하 소협의 능력에 대해서 들었다. 본 가에 아픈 이들이 있는데 한 번 봐 주실 수 있겠느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시험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정도로 극진한 태도였고, 그렇게 이틀간 경상자부터 시작해 부상자와 질병에 걸린 이들까지 다양한 환자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쪽이 내세운 방식도 그리 쉽게 남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정작 치료한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어차피 제갈세가 쪽에서도 진위 확인이 목적이었던지라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서로 원하던 대로 되기도 했으니.

“으음.”

휴고는 침상에 누운 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흑단같이 검은 머릿결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열댓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

애처로울 정도로 야윈 데다 호흡도 느리기 그지없어, 얼핏 보면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도 보이는 여자아이가 마치 시체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럼,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차피 보다 원활한 공조 작업을 위해 하는 쇼였으니 더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침상의 소녀에게 다가간 휴고는 곧바로 그녀의 이마를 향해 손을 내뻗었고.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그 손에 쥐어진, 이 세계에서는 생소한 모양의 성표가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화악—

저쪽 차원의 성자님께서 가득 담아주신 신성력을 뿜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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