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260화 (260/284)

#260

술래잡기 (2)

역천의 서약.

그들과의 악연은 아우테리카 진입 첫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필 이세계에 막 발을 내디딘 한스가 처음 방문한 마을이 바로 그들의 비밀 거점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 ‘불사왕의 파편’을 숙성시키는 작업이 한창이던 찰나에.

‘물론 내겐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지만.’

첫 대면 후로도 그 역천의 서약 놈들과는 이런저런 일들로 계속해서 부딪혔다.

북부 산맥에서의 엘프 세실리 구출 사건부터 최근에 있었던 공화국에서의 오바이포 클랜 사태까지.

‘그 대부분을 처리하긴 했는데···. 철저한 점조직 연합체라 연계된 놈들을 뿌리 뽑는 게 쉽지 않았지.’

한스는 눈앞에 떠오른 작은 금속 조각을 바라보며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이것은 놈들이 벌인 여러 수작 중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심연의 문 개방 현장에서 발견한 작은 단서였다.

목걸이의 줄로 사용된 가느다란 사슬의 일부로 추정되는 것.

[크흣— 그래, 이름이 테르말 가디아스라고 했나.]

자신의 모든 것을 대가로 바쳐 기어코 심연을 열고 광기의 숙주가 된 자.

당연하지만 놈에 대한 뒷조사도 이미 끝마친 지 오래였다.

남부에서 그 일을 벌인 주체인 대족장 발테온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나서 곧바로 정보 조직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사연이야 안타깝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그가 왜 심연의 문을 열고 대륙의 파멸을 획책했는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으로 소중한 것을 잃고 세상을 원망하는 이들이야 발에 챌 정도로 흔하지 않나.

다만 마침 그에겐 정말 세상을 위협할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 남들과 다를 뿐이었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인가.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에게 있었던 비극도 역천의 서약이 꾸민 수작이지 않았나 싶긴 한데.’

능력 있는 이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후에 접근해 타락시키는 것 또한 악의 세력의 전매특허이지 않던가.

물론 다 지난 이제 와서 따져봤자 아무 의미 없는 추측일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광기의 숙주가 되었고, 광기의 숙주는 혁명가라는 놈이 가지고 갔으며, 한스는 매개체를 통해 그 숙주가 있는 장소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추적해 왔으나 결국 그 종적조차 알 수 없었던 혁명가가 있는 곳을.

우우웅—

잘게 진동하는 금속 조각을 바라보던 한스가 다시 그것을 챙기고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사전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 이제 놈을 추적하기 위한 의식을 최대한 빨리 시작하되,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확실하게 놈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 귀찮은 놈이 또 어떤 수작을 부려놨을지 모를 일이었으니.

[나오셨나이까··· 왕이시여···. 소녀, 올리비아··· 위대하신 불사의 왕을 배알하나이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의 앞에 밴시 퀸 올리비아가 스르륵 나타나 부복했다.

미리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불사성의 이상을 감지하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 모양.

과연 그의 오른팔이라 할 만한 행동력이었다.

[그래. 때마침 잘 왔구나, 올리비아.]

[무엇이든 하명하소서···. 소녀, 신명을 바쳐 왕의 명을 이행하겠나이다···.]

생각해 보면 생각 이상으로 긴 시간이었다.

다수의 정보 조직을 거느리고 이 세상의 정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되면서 놈을 찾는 게 이리 오래 걸릴 것이라 예상치 못했었는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란 말이야.’

하지만 세상에 끝나지 않는 놀이는 없는 법.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으니 이제 그만 마무리 지을 때도 되었다.

[모든 간부들을 소집해라.]

물론 그의 사전에 ‘못 찾겠다 꾀꼬리’ 같은 포기 선언 따윈 없었다.

이건 숨바꼭질이 아닌, 반드시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나는 술래잡기였으니까.

전 차원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이의 장르를 제멋대로 데스 매치로 바꿔버리는 한스였다.

***

아제리온 제국 황실에서 마침내 공식적인 공표가 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고 기다리던 그것.

바로 사이먼 대신 라일리가 황태녀로 책봉된다는 소식이었다.

“음··· 하긴 이제 황실도 확실히 할 때가 됐지. 판이 이렇게까지 뒤집혔는데 언제까지 사이먼 황자님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하핫!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 황태녀 전하 만세!”

“실상 계승 경쟁은 끝났다고 봐야겠네요. 이거 참, 의외라고 해야 할지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이미 대세가 기운 지 한참 되었기에 그에 따른 반발은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이먼의 가장 큰 우군이자 라일리 습격의 배후였던 허먼하트 공작가가 그녀의 역공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실상 전면전만 벌어지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가문의 보전에 전력을 쏟기에도 바빴던 것이다.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 아니, 백작님께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데 어찌해야 한다. 하필 결사대로 활동하시는 중이라···. 일단 수도의 저택에 전달해 두면 되려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프리스틴 백작을 통해 선을 대는 게 최선이다. ···음? 잠깐, 차라리 이참에 황태녀 전하께서 황궁에 들이신 애인에게 미리 접근하는 것은···?”

덤으로 이세아도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되었으나, 다른 귀족들은 그것에 대해선 그러려니 하는 입장이었다.

사실 힘이 없던 시절의 라일리 휘하에서 공적까지 부족했기에 자작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지, 그녀가 계속 그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또 아마 백작에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불사왕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면 후작위도 부족해질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고, 라일리 황태녀가 황위를 승계받은 후엔 무난하게 공작위까지 올라가게 되겠지.

귀족들이 그녀에게 선을 대고자 애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건 그녀가 지구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에나 생길 일이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제국의 정세가 요동치고 있을 때.

또 다른 거대 집단인 주신교단은 그 이상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었다.

“···리에스타 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 네.”

걱정스러운 얼굴의 하인리히가 조심스럽게 리에스타 성녀를 불렀으나 그녀는 이미 정신이 다른 곳으로 향한 듯 모호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언제나 생기 있었던 얼굴은 파리하게 질린 채였고 입가와 눈꼬리는 연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곧 신전에 도착합니다. 미리 게이트를 준비해 달라 요청했으니 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저희가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남은 곳은 저희가 없어도 알아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거인이 출몰하지 않은 지도 제법 되었고 말이죠. 놈이 나타나면 그때 바로 출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죠···. 예···.”

항상 똑 부러지던 평소와 같지 않은 얼빠진 대답.

조용히 뒤를 따르는 일행들을 이끌고 도시를 가로지르던 하인리히가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가 저렇게 당황하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조금 낯선 기분도 들었다.

불사왕과 엮일 때에도 저런 반응은 아니었는데···.

‘하긴, 그럴 만도 한가.’

그는 외부에 나가 있던 그들에게 전해진 교단의 연락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담긴 파급력을 생각하면 저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내용이 바로—.

현 교황 하티아누스 2세의 임종이 머지않았다는 급보였으니.

‘이미 몇 번이나 전조가 있었을 텐데···. 역시 교황 성하께서 일부러 알리지 말라 하신 거겠지.’

외부에 있는 그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칠까 우려해서.

그러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교황의 곁을 지키던 측근이 그들에게 연락해 온 것일 터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바로 게이트를 가동하겠습니다.”

리에스타에겐 대신전의 모든 이들이 가족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현 교황에게 입양되어 교단에 들어온 입장에서 그는 유독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생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성자님.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행분들께선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인리히는 그녀가 로셀리아 대신전에 있을 때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교황의 문병을 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좋아하는 정원에 가는 것을 포기할지언정 그 일과만큼은 단 하루도 어기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가끔씩 안부만 묻던 나랑은 다르게 말이지. 그러고 보니 난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뵌 게 정상 회의 때였나?’

물론 용사 파티로서 밖에 나돌아 다니느라 바빴단 핑계가 있었으나, 그래도 살짝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

“허허허,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 급하게 들어오는고? 이제 시집갈 때 다 된 줄 알았더니 아직도 애구나.”

“할아버지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교황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는 리에스타.

그에게 인사를 건넨 하인리히는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뒤쪽에 서서 기다렸다,

사실 마음 같아선 두 사람이 회포를 풀 동안 자리를 피해주고 싶었으나, 어째선지 당사자인 교황이 그에게 잠시 기다려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의 본격적인 대화는 간신히 진정한 리에스타가 얌전해지고 나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크흐흠, 이거 성자님을 모셔놓고 실례를 범했군요.”

“괜찮습니다. 저야 그동안 쌓여온 두 분의 유대를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영광이지요.”

“허허허,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습니다.”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하인리히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몸에 남은 마지막 생명력이 찬란하게 타오르는 중이라는 것을.

그것을 알아챈 건 리에스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교황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잘게 떨렸다.

“내 이리 성자님을 청한 것은 마지막으로 꼭 전해야 할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전할 말씀··· 입니까?”

그의 말에 하인리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순간 교황이 전할 말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으니.

그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교황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두근— 두근—

혼돈과 공허가 뒤섞인 심연의 경계 지역에서 거친 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소리는 곧 공간의 뒤틀림에 이리저리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여전히 남아서 서서히 주변을 잠식해 나갔다.

“아아— 주이시여.”

그 중심부에서 새어 나오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한 마디.

정말 사람의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일그러지고 깨져 있었으나, 그 안에 가득 담긴 광기와 광신은 듣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아득하기 그지없었다.

‘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구나.’

두 귀를 쫑긋거리며 세계의 소리를 엿들은 그 존재가 작게 한탄했다.

이제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서서히 접근하던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이 마침내 온전한 형상을 이루며 그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순 없다.’

비록 자신은 여기서 스러질지라도··· 그에겐 다음 세대의 ‘나’를 위해 씨앗을 뿌려둘 의무가 있었다.

그분의 사도가 된 그가 전대의 의지를 이어받은 덕분에 일을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이루지 못하는 건 아쉽긴 하다만 어쩔 수 없지. 다음이야말로 제대로 싹을 틔울 수 있도록 기꺼이 이 한 몸 거름이 되리라.’

꿈틀— 꿈틀—

광기의 씨앗과 하나가 된 그의 몸이 연신 움찔거렸다.

아직 새로운 육체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아 생기는 현상.

죽음을 감지하고 최대한 서둘렀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었다.

‘좀 더 빨리. 제대로. 확실하게.’

그렇게 강박에 휩싸인 그가 애써 육체를 통제하고 있을 때.

철퍽—

심연의 아래에서 올라온 무언가가 그의 몸에 부딪혔다.

[———!]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시선에 들어온 그것은.

가슴께까지 오는 키에 새하얀 몸뚱이를 가진 인간형의, 그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맞이했던 존재였다.

“아아, 이번엔 좀 늦었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반색한 그는 두 손을 뻗어 냉큼 그것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자, 그분의 은총 아래··· 너도 나와 하나가 되는 거다.”

쩌억— 콰직!

한순간에 커다래진 입을 벌려 그것의 머리를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참극.

하지만 그는 부지런히 입을 놀려 남은 잔해까지 깔끔하게 먹어 치울 뿐이었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그는 처음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커진 것은 물론, 불안정했던 육체 또한 한층 더 완성에 가깝게 정련되어 있었다.

두근— 두근—

그리고 사방으로 다시 거친 박동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거 아쉽군. 이왕 이렇게 될 거, 시간에 쫓기지 않게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을. 계획들이 제대로 되기만 했더라면···.”

가벼운 탄식을 내뱉은 그가 시선을 내려 꿈틀거리는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의 불결한 존재들과 달리 아름답기 그지없는 깨끗하고 매끄러운 순백의 육체.

역시 아무리 봐도 이 모습이야말로 궁극의 인간, 신인류 그 자체였다.

‘이제 다 됐다···.’

그렇게 역천의 서약의 설립자인 전(前) 혁명가.

현(現) ‘광기의 왕’이 세상에 나오기 위한 태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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