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광기의 왕 (1)
평범한 체구의 검은 인영과 15층 빌딩만 한 크기의 하얀 거인.
그것에는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표현조차 한참 부족했다.
애초에 싸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그 규격 차이는 누구라도 거인의 우세를 점칠 수밖에 없을 정도였지만···.
막상 이 현장에서 저 둘을 보게 된다면 그 생각도 자연스럽게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오오오—
그도 그럴 것이.
그 작은 체구의 인영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거인의 기세를 밀어내고 세상을 뒤덮어 가는 모습에는.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것은 산 자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폭력.
세상의 죽음 그 자체라고.
‘아아, 이거 기분 최고군.’
그렇게 사방으로 뻗쳐나가는 검은 기운의 중심부.
그 한가운데에 고고하게 자리한 한스는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힘에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실 그는 온전한 불사왕이 된 후로 만족스럽게 싸워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일본에서 있었던 번천회주와의 충돌이 최선을 다한 싸움이라 볼 수 있었으나, 그때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다 아우테리카에서의 전투는 대부분 시나리오의 일부인 데다, 심지어 정신이 완전히 나갔을 때조차 하인리히를 죽일 수 없다는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던가?
실상 아우테리카에선 전력을 다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지상과 심연 사이의 경계.
모든 것이 뒤틀리고 뒤섞인 혼돈의 영역.
혁명가 놈은 이 공간에서 자신이 가진 권능의 힘이 극대화된다고 했지만.
그건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쿠드드득—
폭력적인 기세가 거침없이 내달린다.
그 여파에 주변 공간이 비틀리고, 심연과 뒤섞인 죽음이 사방으로 이빨을 들이밀었으며.
그것은 그대로 거인이 있던 장소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푸크크큿! 아아— 그래, 이래야 불사왕이지! 세상의 종말로 안배된 존재라면 그 힘에 마땅한 오만 또한 갖추고 있어야 마땅한 법!”
하지만 그 압도적인 위력 시위를 마주하고도 거인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검붉은 기운을 발산해 죽음을 뿌리친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며 몸을 한껏 웅크리곤.
곧바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아아아앙!
그 직후, 한스의 코앞에서 발생한 충격에 공간이 뒤틀렸다.
상이한 두 기운이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었다.
[호오? 제법이군.]
“끄흐흣, 이제 시작이다!”
콰드득—!
거인의 손톱이 한스의 주변을 감싼 장벽을 대번에 파고들었다.
다섯 개의 첨단에 모인 검붉은 광기가 검은 죽음을 찢어발기며, 동시에 다른 손이 재차 휘둘러졌다.
쿠우우웅!
강맹한 충격파와 함께 퍼져 나가는 폭음.
그 한 번의 공격에 주변의 흐름이 뒤엉키며 반경 수백 미터가 한꺼번에 뒤집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한참 떨어진 장소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덩칫값은 한다고 생각하면서.
[푸흐— 그래, 이거 재밌겠구나.]
하지만 별다른 위기감은 없었다.
그저 명색이 같은 심연 출신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생각뿐.
오히려 놈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면 더 실망했을 것이다.
‘물론···.’
본인이 말했던 대로, 격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말은 지켜야겠지만.
한스는 사방을 잠식한 자신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그의 근원인 심장이 이 세상의 밑바닥에 있는 심연과 공명을 일으키며 평소 이상의 반응을 이끌었다.
그 결과.
-끼야아아악—!
-끄아아아!
-크르륵— 끄륵—
기묘한 귀곡성과 함께.
기운이 퍼진 영역 내의 모든 ‘죽음’이 한꺼번에 반응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사(凍死), 분사(焚死), 익사(溺死), 폭사(暴死), 역사(轢死), 압사(壓死), 병사(病死) 아사(餓死)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죽음이 공간을 비집고 나와 형상을 이루며 세상에 현현했다.
언데드도, 유령도, 악마도 아닌 추상적인 무언가.
그 실체를 이룬 죽음이란 개념의 홍수 속에서.
[그럼 이제— 함께 결정해 보자꾸나.]
그들을 지배하는 왕, 불사왕이 선언했다.
[너의 죽음을.]
어리석은 자의 사형 집행을.
***
두 번째 심연의 문이 열리고 광기가 끌어올려졌을 때.
그 대부분은 불완전한 소환의 여파로 온전히 나오지 못하고 세상 전체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중 일부분, 중심핵이 되는 파편 하나만이 의식을 집행한 이의 몸으로 파고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혁명가가 입은 육체의 근간이 된 광기의 씨앗이었다.
“푸키카칵!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만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이거 도저히 안 되겠는데? 프크크큿!”
때문에 광기는 세상에 혼란을 준다는 목적에는 더없이 적합했으나, 단일 개체로서의 파괴력은 조금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보완하려고 심연의 거인들까지 이용하긴 했는데, 역시 그것만으론 불사왕을 상대로는 한참 부족한 모양이었다.
‘광기는 죽음에 비하면 다소 격이 떨어지기도 하고 말이지.’
콰아앙—
다시 검은 기운과 검붉은 기운이 맞부딪치며 일대의 공간이 깨져나갔다.
하지만 소득은 전무.
실소를 지은 혁명가는 시커먼 기운을 흘리며 여유롭게 물러나는 불사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상대에게서 뻗어 나오는 기운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고, 귀로는 적의에 담긴 의도를 엿들을 수 있었으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공간의 흐름 일부를 조작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콰드득— 화르륵!
그때, 그의 왼쪽 어깨를 물어뜯은 일그러진 형상의 무언가가 한순간에 타올라 잿더미가 되었다.
그 아가리에 물린 그의 신체 일부분과 함께.
동시에 오른쪽 옆구리가 난도질 되어 뜯겨 나갔으며, 왼쪽 발가락들이 뭔가에 압착된 듯 짜부라졌다.
그런 과정들이 아까부터 계속··· 쉴 새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공격의 흐름을 읽고 회피해도, 그 의도를 엿듣고 대응해도.
사방을 뒤덮은 죽음과 거기서부터 파생된 현상은 부지불식간에 다가와 그의 몸뚱이를 물어뜯고 사라졌다.
마치,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물론 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광기로 육체의 능력을 끌어올리고, 재생력을 한껏 북돋웠으며, 세상의 흐름을 뒤틀어 공간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전부 별 소용이 없었다는 게 문제지. 아아— 신이시여! 이 몸의 무능함을 용서하소서!’
거기다 신체의 수복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는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도 그분의 권능 덕분에 아직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게 아니었으면 무리할 정도로 끌어낸 광기 때문에 이미 본능만 남은 괴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쉽게 말해.
그에겐 더 이상 남은 가능성이 없었다.
우우웅—
설상가상, 불사왕의 공격은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주변을 둘러싼 대마법진들.
쿠르르릉—!
모든 획과 도형이 짙은 심연으로 이루어진 그것들이 발동하며, 그가 피할 수 없도록 일대의 광범위한 공간을 한꺼번에 뒤틀어버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듯이.
이곳이 경계의 세상이 아니었다면 이미 왕국 하나 정돈 거덜 냈을 만한 경천동지한 싸움이었다.
[과연, 과할 정도로 튼튼하구나.]
하지만 그 와중에도 거인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소 심각한 손상을 입고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으나, 그나마도 시간이 좀 주어진다면 회복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었을 때, 혁명가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한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푸흐흐, 그렇게 된 거였나? 어째 후각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더라니···.”
허공에 혀를 날름거리다 입맛을 다시며 뇌까리는 백색 거인.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네가 그놈을 데리고 있었구나.”
감각에 집중하며 여러 차례 손속을 나누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이었다.
불사왕과 그자 사이에 인연이 닿아있다는 것을.
그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 듯 상당히 진한 연결이었다.
‘권능이 강화되는 이 공간이 아니었다면 힘들었겠지. 차라리 가진 게 후각이었다면 더 빨리 알 수 있었을 텐데. 아! 신이시여!’
어쨌든 결과적으로 정보를 얻었으니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든 지상으로 넘어간 뒤에 후각을 회수하고 모든 봉인을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설령 불사왕이라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콰아앙—!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이어지는 에너지의 격류에 금방 끊어져 버렸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그가 뭘 알아냈든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슬슬 재생력이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거인의 육체와 달리, 불사왕은 여전히 패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건 상관없다.]
막대한 기운이 움직이며 다시 파괴의 신비를 엮어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 퍼진 죽음은 여전히 거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차피 넌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서 죽을 테니까.]
그 선언에 거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 공간에서 벗어나 원하는 곳으로 넘어가는 건 짧은 시간에 가능한 게 아니었다.
불사왕이 그 시간을 기다려 줄 리가 만무한 일.
결국 눈앞에 놈이 있는 한 자신은 봉인을 풀러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지만···.
평정을 유지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한스의 생각도 복잡해진 상태였다.
혁명가가 말한 후각이란 단어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이가 있었던 것이다.
‘디아나.’
영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후각을 가지고 있던 소녀.
능력도 좋고 그 능력의 기원이 궁금해서 곁에 두고 계속 지켜보던 참이었는데···.
‘혁명가와 관련 있는 능력이었나? 아니, 정확히는 유폐된 신과 관계된 것이겠군.’
지금은 심연에 처박혀 있지만 신은 신.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아까 말한 권능도 그것이겠군. 저놈이 가진 건 후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인가? 그렇다면···.’
슬슬 싸움이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한스는 마무리를 위해 거인을 몰아붙이면서 머릿속으로는 차분하게 새로 입수한 정보를 정리했다.
그렇게 곧 상황이 끝나리라 낙관하던 순간.
《XX된 XXX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이변이 발생했다.
두근—
알림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거센 박동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세계의 흐름을 모조리 뒤틀어 버릴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자연스레 사방을 점유하고 있던 죽음이 흩어지고 준비 중이던 마법진들 또한 산산이 깨져나갔다.
[큭? 이건 무슨···!]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은 이상 현상이었다.
한스는 애써 기운을 수습하며 거인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견제했으나···.
두근—
그 노력이 무색하게 연달아 울리는 박동에 주변의 모든 좌표와 위상이 헝클어져 버렸다.
심연을 둘러 육체를 고정하고 있음에도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강맹한 파동.
한스는 자연스럽게 그것의 근원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상의 까마득한 아래에 있는 곳.
그중에서도 심연의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누군가의 고동이었다.
‘미친···! 설마 이렇게 개입할 수 있을 정도라고?’
아무리 이곳이 지상보단 심연에 가까운 경계면이라곤 하지만, 오랜 세월 유폐되었던 존재가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줄이야!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낀 한스가 이를 갈았다.
그렇게 그가 간신히 버티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 고심하고 있을 때.
“아아— 나의 주이시여! 당신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감격에 겨운 듯 양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린 혁명가가 몸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어딜!]
그에 바닥의 인력을 애써 무시한 한스가 다시 놈에게 날카롭게 벼려진 죽음을 쏘아 보냈으나.
‘썩을! 이 무슨 거지 같은 경우가!’
쉴 새 없이 뒤틀리는 공간에 그의 공격은 허상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무리한 대가로 몸이 덜컥 아래로 한 단계 내려간 건 덤이었고.
“푸흐흐— 불사왕이여. 갈 길 없이 흘러들어온 차원의 유랑자여. 그분의 은혜를 입고도 그 뜻을 거스른 이단이여.”
그렇게 한스가 서둘러 육체를 고정하며 그 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중하던 찰나.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거인이 만신창이가 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분의 의지가 나와 함께하는구나. 아무래도 너는 내 죽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끄끄끅!”
그 말을 끝으로 안면을 뒤틀며 가래 끓는 듯한 웃음을 흘리던 놈은 이내 세상의 흐름을 비집고 나온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놈이 향한 목적지가 어딘지는 뻔했다.
[크흐, 이 건방진 놈이 감히···!]
그에 후속 조치를 하기 위해 서둘러 정신을 집중하던 한스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끌려들어 가는 몸을 느끼고 신경질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젠장, 안 그래도 할 게 많은데 귀찮게!’
이곳에 계속 있어봤자 쓸데없이 정신력만 소모되는 상황.
한창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지금 괜히 드잡이질할 시간은 없었다.
‘당신도 다음에 두고 보자고.’
늪에 빨려 들어가듯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던 한스의 몸이.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
툴크 왕국의 북쪽 국경, 북부 산맥과 인접한 강철의 성채 인근.
찌지지직—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저게 뭐야?”
“잠깐··· 저거 설마?”
“비상! 비상! 빨리 윗선에 보고해!”
성채와는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건만,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균열이 발생했다.
아니, 이상은 단순히 균열이 생기는 정도에서 끝이 아니었다.
쫘좌자자작—!
마치 천을 좌우로 잡아 찢듯 과격한 소음과 함께 균열이 뜯겨 나가고.
쿠웅!
그 안에서 나온 순백의 몸체를 가진 거대한 거인.
“끄흐흐— 아아, 찾았다!”
광기의 왕이 지상에 첫발을 내디뎠다.